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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유물
조선
무기, 군함
1592년(선조 25)
선체길이(雙葉尾를 제외한 상장부분) 26∼28m, 선체너비 9∼10m, 선체높이 6∼6.5m 정도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만들어 왜적을 쳐부순 거북모양의 배.
기 원
거북선[龜船]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으로서, 1413년(태종 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다.
또, 1415년(태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상소하고 있다.
위의 두 기록내용으로 보아 귀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의 일종임을 짐작할 수 있다. 거북선의 기원을 왜구의 침해가 가장 심하던 고려 말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이 이미 고려 말 또는 조선 초부터 거북선이 제조, 사용되었으나,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에 의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창제, 실용화되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이순신의 ‘창제귀선(創制龜船)’은 임진왜란 초반의 잇따른 해전에서 함대의 선봉이 되어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투옥과 더불어, 그리고 그가 전사한 뒤에는 거북선의 가치 또한 떨어지고 만다.
임진왜란 후의 거북선은, ‘창제귀선’의 제원(諸元)에 대한 기술적인 전승을 이루지 못한 채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조선 말기까지 각 수영에 존재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의하여 창작, 구사된 바로 그 거북선인 것이다.
한편, 비록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거북선의 유형에 속하는 배가 따로 구상된 예가 있다. 이미 이순신의 귀선이 용맹을 떨치고 있던 1592년 태자를 호종한 이덕홍(李德弘)은 왕세자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귀갑거(龜甲車)의 전법과 귀갑선의 이로움을 아뢰고 있다.
그는 귀갑선의 체제를 “등에 창검을 붙이고, 뱃머리에는 쇠뇌[弩]를 매복시키고, 허리에는 판옥(板屋)을 지어 사수를 그 속에 두고……”라 하고, 또 “듣건대 호남의 장수들이 이것을 써서 적선을 크게 무찌르고 있다.”고 언급한 뒤 이듬해 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귀갑선의 구상도를 첨부하여 그것의 제작을 건의하고 있다(艮齋先生文集 卷二).
이와 같은 귀갑선의 구상은 그 발상에 있어서 이순신의 창제귀선과 비슷한 데가 있으나, 구조상의 개념은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 이 귀갑선의 발상과는 별도로 지금도 거북선에 대하여 귀갑선이라는 명칭이 종종 혼용되고 있다.
이순신의 창제귀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1591년 2월 13일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으로 취임하였다. 왜구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미리 간파한 이순신은 본영을 비롯하여 각 진(鎭)의 전쟁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특수전투함인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특히, 조선기술에 뛰어난 막하의 군관 나대용(羅大用)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임진년(1592) ≪난중일기≫에서 “거북선에 사용할 범포(帆布:돛베) 29필을 받다(2월 8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3월 27일).”, “비로소 포범(布帆)을 만들었다(4월 11일).”, 그리고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현자포(玄字砲)를 쏘아보았다(4월 12일).”고 적고 있으니 거북선은 임진왜란 발발(4월 13일) 직전에 처음으로 그를 바다 위에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창제귀선’의 설계나 체제에 관한 기술적 자료가 임진왜란 종식 후에 전승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당시의 설계자료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한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단편적인 사료를 재삼 평가하여, 그 모습과 특징을 종합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기록 중에서 거북선을 직접 체험 또는 목격한 자가 남긴 기록으로서 거북선과 관련된 내용과 거북선의 실전 모습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임진년의 이순신의 장계
거북선은 이순신이 옥포해전(玉浦海戰)에 이어 두번째로 출동한 당포해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어 혁혁한 전공을 올리며 서막을 장식하였다. 이순신은 임진년 6월 14일에 써올린 <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狀>에서 자신이 창제한 귀선의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귀선의 실전상황을 생생히 기술하고 있다.
즉, 사천 선창의 전황을 보고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이 일찍부터 섬 오랑캐가 침노할 것을 염려하고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사옵니다[別制龜船]. 앞에는 용두를 설치하여[前設龍頭] 아가리로 대포를 쏘게 하고[口放大砲], 등에는 쇠꼬창이를 심었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게 되어, 비록 적선 수백 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突擊將)으로 하여금 이 귀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들어가 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銃筒)을 쏘게 한즉, 산 위와 언덕 아래와 배를 지키는 세 군데의 왜적도 또한 비오듯이 철환을 함부로 쏘아…….”
또 당포 선창의 해전실황에서는 “왜선은 판옥선(板屋船)만큼 큰 배 9척과 아울러 중소선 12척이 선창에 나누어 묵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큰 배 위에는 층루가 우뚝 솟고 높이는 서너 길이나 되며 밖에는 붉은 비단휘장을 쳤고, 사면에 ‘황자(黃字)’를 크게 썼으며 그 속에는 왜장이 있는데 앞에는 붉은 일산(日傘)을 세우고 조금도 겁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먼저 거북선으로 곧장 층루선(層樓船) 밑으로 치고 들어가 용아가리로 현자철환을 치쏘고(仰放), 또 천자·지자철환과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쏘아 그 배를 쳐 깨뜨리고[撞破其船]……”라고 쓰고 있다.
(2) 정랑 이분의 행록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원균(元均)의 패전으로 귀선이 상실된 정유년(1597)에 본영에 와서 행정적인 업무에 종사하였으나, 귀선이 건재하였던 정유년 이전에도 작은아버지 이순신을 방문하고 있음을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다.
그의 <행록 行錄> 속에는 창제귀선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즉, “공(충무공)이 수영에 있을 때 왜구가 반드시 쳐들어올 것을 알고, 본영 및 소속 포구의 무기와 기계들을 수리, 정비하고 또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만한데[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上覆以板], 판자 위에 십자(十字)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송곳[刀錐]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이라 하였다. 뒷날 싸울 때에는 거적[編茅]으로 송곳[錐刀]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아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비려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항상 승리한 것이었다.”
(3) 임진년의 왜측 기록
<고려선전기 高麗船戰記>는 왜함대에 종군한 69세의 도노오카(外岡甚左衛門)가 임진년 7월 28일 부산포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된 자국 내의 사정과 부산포 침공 이후 왜수군(倭水軍)이 겪은 연패의 참상을 기록한 것으로, “어리석은 노인의 붓끝이 후일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써놓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맺고 있다.
여기에는 한산대첩에 이어 7월 10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의 실전상황이 목격한 대로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다. “구키(九鬼嘉隆)와 가토(加藤嘉明)는 와키자카(脇坂安治:한산해전의 패장)가 전공을 세운 것을 듣고, 같이 6일에 부산포로부터 나와 바로 해협 입구에 이르러, 8일에는 안골포의 오도(烏島)라는 항(港)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朝鮮曆 10일)의 진시(辰時:오전 8시경)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盲船:장님배. 귀선에 대한 왜측의 별명)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 석화시(石火矢)·봉화시(棒火矢)·오가리마따(大狩俣) 등을 쏘면서 유시(酉時:오후 6시경)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다락에서 복도, 테두리 밑의 방패에 이르기까지 모두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6촌의 견목(堅木)이며, ……또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화살[大箭]로 다섯 칸(間), 또는 세 칸 이내까지 다가와 쏘아대는 것이다.……”(鍋島家에 소장된 筆寫原本에서).
(4) 임진왜란 후의 나대용의 상소
이순신의 전사 후 8년이 지난 1606년(선조 39) 나대용(羅大用)이 창선(鎗船)의 효용을 상소하는 가운데, “……거북선이 비록 싸움에 이로우나 사부(射夫)와 격군(格軍)의 수가 판옥선의 125인보다 적지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어, 창제귀선의 승무원이 125∼130인 정도임을 알 수 있다.
(5) 명나라 화옥(華鈺)의 기록
≪이충무공전서≫의 안설(按說)에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 海防議≫에서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충무공이 창제한 거북선을 가리킴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을 직접 보고 간 명나라 사람들의 설명내용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당시 기록 등에서 창제귀선의 체제와 주요 기능에 관계되는 것을 종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거북선의 크기:판옥선의 크기와 같다. ② 용두(龍頭):뱃머리에 용두를 설치하여 용의 아가리를 통하여 대포를 쏘았다. 또 사각(射角)의 조정이 가능하였다(仰·放·玄字……).
③ 철첨(鐵○):거북의 등처럼 만든 귀배판(龜背板)에는 철첨(쇠송곳)을 꽂아 적병의 등선(登船)을 막았다. ④ 포(砲)의 수:포혈(砲穴)은 좌우 각 현(舷)에 6개, 용두에 1개, 선미(船尾)에 1개가 있어 모두 14문이 사용되고 있다.
⑤ 포의 종류:천자포·지자포·현자포·황자포 등의 각종 총통을 장착하고, 실전에서는 탄환 이외에도 대전(大箭)을 많이 발사한 것 같다.
⑥ 철갑(鐵甲):철로 덮어 많은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도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⑦ 척수(隻數):<고려선전기>에 의하면 임진년의 거북선은 3척이었다. 이는 ≪나주목지 羅州牧志≫의 “나대용이 임진년 난리를 당하자 이충무공을 좇아 거북선 세 척을 꾸몄다.”라는 사실과 상통된다. 그러나 을미년(1595)에는 명나라에 “수군통제사 이순신은……전선 60척, 귀선 5척, 초탐선(哨探船) 65척을 거느리고……”(事大文軌 권12)라고 통지하고 있으므로 을미년의 거북선은 모두 5척인 것으로 보인다.
⑧ 정원:창제귀선의 승무원 수는 당시의 판옥선에 준하여 125∼130인 정도로 생각된다.
⑨ 돛대:돛대는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였다. 전투에 임할 때는 돛대의 장비를 보호하고 기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돛대를 눕히고, 노(櫓)만으로 추진한 것 같다.
창제귀선에 대한 원전이 계승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북선이 철갑을 입힌 배라고 하는 이른바 철갑전설(鐵甲傳說)은 임진왜란 이후 꾸준히 전승되었다. 그리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국내외에 널리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전설 그 자체도 구승적 사료(口承的史料)로서 중요하지만, 거북선의 철갑은 당시의 실전상을 신중히 살펴본다면 과학적으로 수긍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서와 같이 거북선은 적선들의 집중공격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배였다. 특히, 가공할 왜적의 화공(火攻)과 화술(火術)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철갑을 이용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철장갑이 쇠송곳만을 귀배판에 꽂았다면 화공에는 더없이 불리한 것이다. 물론, 거북선이 다소의 사상자를 기록한 것은 사실이나, 배가 가진 원래의 기능과 활동력을 상실한 일은 없었다.
한편 철갑에 대한 당시의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건축된 남대문이나 남한산성의 성문 등 여러 도성과 산성에 현존하는 성문의 철갑비(鐵甲扉)는 그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 유물은 2∼3㎜ 두께의 장방형 철엽(鐵葉)을 목판 위에 비늘모양으로 입힌 성문의 철갑문짝이다.
이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실용화된 공격화기의 성능에 따라 창과 방패의 대비에서 관례화된 철갑방패의 기본양식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단조공법(鍛造工法)으로 제작된 철엽을 비늘모양으로 장착한 조선철갑의 전형적인 시공양식은 거북선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철갑전설을 비롯하여 귀선철갑에 관계되는 현존 사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전적 전승으로서의 철갑전설
전설은 과거의 복원을 위한 유익한 사료인 것이다. 철갑귀선을 비롯하여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의 ‘강강술래’, 행주산성싸움에서의 ‘행주치마’, 곽재우(郭再祐)의 ‘홍의장군’ 등, 임진왜란이 낳은 이야기들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전승될 것이다.
철갑전설은 필경 철갑을 직접 만든 대장간의 철공들과 해전에 참가했던 병사들의 회고담에서 비롯되어 구전으로 전승된 대중의 전설이며, 동시에 대중의 정설(定說)이었음을 특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설의 성립에 대한 이와 같은 확신은 이 ‘전설’이 임진왜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00년의 전승경력을 지닌 원천성 있는 전설로서, 결코 최근 한말 이후의 외래문헌의 영향에 의하여 유발된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철갑전설 자체의 발단과 유래에 깊이 유의한 바 있는 언더우드(Underwood,H.H., 元漢慶)는 1934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 <Korean Boats and Ships>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내용을 보고하고 있다.
“……그러한 철갑전설을 창작해 낸다는 것은 철갑 그 자체를 발명하는 것만큼이나 비범한 재주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 이 전설은 아주 최근의 것이 아니다. 대원군 시절, 프랑스의 원정이 예상되었을 때, 한 불운한 관리가 그 독재군주로부터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절망적인 불안 속에서 명실상부한 철갑선을 만들기 위한 시도에 그의 모든 재물을 소비하였으나, 그 철갑선은 비정하게도 뜨기를 거부하였다.……”
또한, 저자는 이 관리가 이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 연희전문학교 교수의 친척이었음을 밝히고 있어, 위의 내용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즉, 1860년대 천주교도들의 처형에 이어 서양 선박들이 근해에 출몰할 무렵, 대원군은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불운한 관리가 겪은 ‘철갑선 건조의 하명사건’은 철갑전설의 유래를 최소한 120년 이전으로 소급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한편, 구전내용이 후일의 기록으로 옮겨질 수도 있으나, 그것은 문필을 향유한 상층사회의 관심 여하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구전에 대한 기록적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는, 그 구전 자체의 구승경력조차도 쉽게 추적할 도리가 없다.
철갑전설 성립에 대한 논의는, 그 발단이 한말 개화기보다도 훨씬 앞선다는 사실의 확인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상의 구전적 철갑전설의 보이지 않은 전승경력에 연관하여 다음에 제시될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龜船紋圖>가 전설의 끊임없는 명맥을 입증해 주고 있다.
(2) 회화적 전승으로서의 귀선문도
구전적 철갑전설의 성립과 그 명맥을 같이하는 회화적 사료 한 점이 현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입지름 10.8㎝, 몸지름 20.3㎝, 밑지름 9.5㎝, 높이 16.7㎝의 작은 조선 중기(17세기 초반) 청백항아리에 북화풍의 강한 필치로 철갑귀선 한 척이 그려져 있다.
이 청백철화귀선문항아리[靑白鐵畫龜船紋壺]는 1910년경 경상남도 고성에서 발굴된 것으로, 부봉미술관(富峰美術館)의 관장 김형태(金炯泰)가 소장하다가 해군사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황불연기를 토하고 있는 용머리의 묘사가 특이하나, 그 해학적 표현이 회상적인 감회를 전해주는 듯 흥겹다.
이 귀선도는 심미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귀선구조의 각 부분을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철갑귀선은 철갑을 제외하고도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그 면모를 판이하게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철갑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이 귀선도에 대한 사료성의 평가를 겸하여 우선 선체구조의 주요 부분을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① 돛대:앞뒤 2개가 가지런히 눕혀져 있는데, 이는 임전태세를 갖춘 모습이다. 앞에서 당시 기록으로 인용한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에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라고 한 기록과 부합되는 광경이다.
② 귀배판(龜背板):철갑 위에 철첨이 꽂혀 있다. 장방형 철엽이 사용된 것같이 보이나, 실제로는 거북무늬의 육각형 철엽을 붙인 경우도 빛에 따라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철엽의 형상을 판정하기는 어렵다. 또, 장방형으로 뚫린 통용구(通用口) 2개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귀배판 좌우에 각각 2개로 보아 모두 4개인 셈이다. 이는 돛대의 조작 및 정비·관측·채광·통풍 등 다목적인 용도로 추리된다.
③ 노(櫓):현판(舷板)에 노공(櫓孔)이 10개 있으므로 노의 수도 좌우 각각 10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좌현의 1·2번 및 마지막 10번째 노는 그려져 있지 않다. 전투 중에 파손되어 상실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형(櫓型)은 오어식(oar式) 노의 하장노역(下粧櫓役)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1·2번 및 10번 노공을 노공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도 있어, 소묘상(素描上)의 불확실성을 감안한다면 좌우 각각 7개의 상장노역으로 간주될 가능성도 있다.
④ 포혈(砲穴):현(舷)의 패판(牌板)에는 선미쪽의 한 칸을 제외하고 6문의 포혈이 있어, 이분의 <행록>에 “좌우에 각각 6개의 포혈이 있다.”고 한 것과 일치된다. 또한, 뱃머리에는 횡량(橫梁) 위의 좌우 패판에 포혈이 한 개씩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⑤ 용두(龍頭):패란(牌欄)에 이어 깐 판자 위에 우뚝 세워진 용두는 방포(放砲)하는 포문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유황불 연기를 토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것은 이순신의 장계(唐浦破倭兵狀, 壬辰年 6월 14일)에 나타난 포문으로서의 ‘방포형용두(放砲型龍頭)’가 아니라, 연기를 토하는 소위 ‘토연형용두(吐煙型龍頭)’인 것이다.
임진왜란 전반기에 활약한 5척의 자매함(姉妹艦) 사이에는 이미 실전경험에 따라 국부적으로 개조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또한 그 중에는 판옥선에서 개작된 것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따라서, 이 <귀선문도>에 나타난 ‘토연형용두’도 싸움이 없던 후대라기보다는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추가된 유형일 가능성이 있다. 이 <귀선문도>의 거북선 묘사가 <행록> 등의 기록에 의존한 것이 아님은, 이 용두의 표현이 잘 입증하고 있다.
⑥ 노판(艫板):노판은 6(7)쪽의 곡목(曲木)을 이어붙였는데, 위쪽에 또 다시 6쪽을 이중으로 이어붙여 횡량 밑 부분을 견고하게 보강하고 있다.
⑦ 선미형(船尾形):항아리 자체의 연대는 고사하고 이와 같이 선미의 만곡형 쌍미엽(彎曲型雙尾葉)이 절미(截尾)된 거북선 또는 판옥선이 정조 때(이충무공전서 출판) 이후의 그림에 나타난 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으로도 이 <귀선문도>의 시기는 정조시대 이전 또는 거북선의 변화가 뚜렷해지기 이전, 즉 숙종대 이전의 연대로 소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관찰에서 각 항의 특징을 종합해 볼 때 이 ‘철갑귀선도’는 임진왜란 당시의 귀선상(龜船像)을 은연중에 암시해 주고 있으며, 철갑전설의 성립 진의를 묵묵히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3) 고려선전기의 거북선
현존하는 사료로서 거북선의 철갑에 관련된 기록으로는 임진년에 도노오카가 남긴 이 <고려선전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저자는 왜의 수군에 종군하여 이순신 함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연전연패하는 왜수군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다. 그는 임진년 7월 10일(倭曆 7월 9일)에 있었던 안골포해전에서 번갈아 달려드는 3척의 거북선을 지척에서 목격하고, “……큰 배 중에 3척은 장님배이며, 철로 요해(要害)하여……”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음미해야 할 문구가 바로 “철로 요해하여(鐵ニテ要害シ)”이다. 이는 해당 구절에 대한 구어문체인 “鐵でおおわれており”(桑田忠親, 山岡莊八監修, 日本の戰史 5, 1965)에 준하여서 “철로 덮여 있고”라고 옮기면 적합할 것이다. 아울러 원문의 뜻을 따라 “철판을 입혀 방비하였다.”는 뜻으로 새겨 마땅한 것이다.
이로부터 240년 뒤인 1831년에 일본의 ≪정한위략 征韓偉略≫은 거북선에 관하여 <고려선전기>를 인용, “……적선 중에는 온통 철로 장비한 배가 있어, 우리의 포로써는 상하게 할 수가 없었다.……”(川口長孺, 征韓偉略 卷之二, 水藩彰考館, 天保二年, 1831)라는 해설을 가미하고 있다. 하지만 ≪정한위략≫은 1차사료 즉, 원천사료가 아니다.
(4) 경상좌수사의 인갑기록
인갑기록 鱗甲記錄>은 1748년(영조 24)에 작성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장계 초본에 나오는 내용으로, 거북선의 철갑을 뜻하는 내용이 국내 기록으로는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문서는 문장에 정정한 곳이 없어 장계 초본이라기보다 보관용으로 정서한 필사본이라 함이 더 적합할 것이다. 아뢰는 사람이 ‘慶尙左道水軍節度使臣李謹’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당시의 경상좌수사인 이언섭(李彦燮)으로 밝혀져 있다. 한편, 이 귀중한 사료가 240년간 보존되어 온 내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 경상좌수사의 장계는 거북선에 대한 건의문인데, 거북선과 누선(樓船)을 비교하여 거북선이 전술적으로 뛰어남을 거듭 지적하고, 또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공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누선을 거북선으로 대치할 것을 극구 주청하고 있다. 거북선에 관계되는 주요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① “인갑으로 덮개를 하고[鱗甲爲蓋] 그 안을 넓혔으며, 굽은 나무로 가슴을 꾸미고, 가파르고 뾰족하여 가볍고 날래니, 외양은 신령한 거북이 물 위를 달려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누선과 비교한다면 그 빠르고 둔함이 하늘과 땅의 판이함으로나 비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 인갑이 있어서 시석(矢石)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속에 군사와 기계(무기)를 감추어서 재주를 떨치며 부딪쳐 나아감에 빠르기가 육군의 갑마(甲馬)와 같으니, 그것으로 선봉을 삼아 파도가 도도한 가운데로 달리어 공격하며 나는 듯이 쳐들어 간다면 실로 막강한 이기(利器)이온바, 수군이 믿는 바는 오로지 이 전함인데……”
② “이른바 거북선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판으로써 덮개를 하고 그 위에 거듭 인갑을 하였고[所謂龜船則不以爲樓以板爲蓋仍作鱗甲], ……노젓는 군사가 노를 젓는 데 편하여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어 바람을 맞아 물을 가름에 빠르기가 날랜 말과 같사온바……”
③ “오호라! 저 전란(임진왜란)의 때에 충무공께서 왜구를 맞아 순식간에 충성으로 분발하여 상담의 고통으로 진력하매, 거북선을 처음 만들어 용감하게 승리하였으니, 후세의 변란을 다스리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충무공은)처음부터 끝까지가 참으로 병법을 아는 뛰어난 장수였는데, 혹시 사변이 일어나면 걱정 없이 나아가 진(陣)에 임하여 흉포한 적을 다스림에 있어, 빠르게 나아가 부딪쳐 쳐들어 감에 충무공이 만든 거북선의 전략에 부합되어야 할 것인즉, 진에 임하여 적을 무찌르는 용기가 비록 충무공의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지혜로움과는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외방의 진을 굳게 지키는 도리에 있어서는 결코 빠름을 버리고 둔함을 취할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장계는 위의 구절 외에도 같은 취지의 뜻을 거듭 강조하고, 끝으로 누선과 귀선의 제도를 별지에 도면으로 그려 비변사에 올린다고 쓰고, 거북선 건조에 대한 승인이 조속히 내려질 것을 강력하게 주청하고 있다. 위의 문장 속에는 그때부터 150년 전의 이순신과, 또 이순신의 창제귀선의 얼이 생생하게 부활되어 있다.
이 경상좌수사의 장계는 철갑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충무공전서≫의 출판(1795)보다 47년 전에 작성된 것이다. 책임감이 왕성한 후대의 한 수사(水使)가 자신이 비록 이순신의 지혜로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방법만은 반드시 계승되어야 할 것임을 아뢰는 대목은 심금을 울리듯 감동적이다.
이 기록에서 귀선철갑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②항의 첫 구절이다. 여기서 “이른바 거북선”의 ‘이른바’는 바로 이순신의 ‘창제귀선’으로부터 그 특징이 유래된 바로 그러한 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이며, 그것은 누각을 만들지 않고, 목판으로 덮개[背甲板]를 하여, 그 위에 거듭 “인갑을 입혔다.”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인갑’은 무엇인가? 이것은 쇠비늘 또는 놋쇠비늘을 비늘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낱말이다. ‘철갑’은 쇠로 만든 갑옷을 통칭하므로 ‘인갑’은 철갑 중에서도 그 구조가 비늘모양으로 만들어진 철갑의 일종이다.
따라서 거북선에 입혀진 철갑의 종류는 바로 ‘인갑’인 것이다. 즉 쇠비늘을 비늘모양으로 장착한 것이다. 쇠비늘은 대장간에서 단조(鍛造)된 철엽이며, 두께는 조선 철갑의 전형에 따라 2∼3㎜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1862년 3월 9일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철갑선 모니터(Monitor)와 남군의 철갑선 메리맥(Merrimack)은 서로의 전세를 걸고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이 전투는 장갑선 사이의 싸움이었고 결국 에릭슨(Ericsson,J.)에 의해 창제된 모니터가 승리하여 북군의 전세가 크게 회복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흥선대원군이 “거북선과 같은 철갑선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은, 시대에는 부합되었으나 기술의 공백으로 실패를 면하지 못하였다.
모니터에 3년 앞선 1859년 진수된 프랑스의 글루아르(Gloire)는 현(舷)의 흘수(吃水) 부위에 12.2㎝, 상부 현판에는 11㎝ 두께의 철판을 장착함으로써 근대철갑선의 전조를 이루었으나, 이듬해인 1860년에 진수된 영국 최초의 철장(鐵裝) 주력선 워리어(Warrior)는 46㎝ 두께의 티크판에 11.4㎝ 두께의 철판을 입힘으로써 프랑스를 능가하였다.
미국의 모니터(1862)에 270년이나 앞선 소위 장갑전법의 비조(鼻祖)가 이미 우리 나라에 존재하였다. 목조전선시대(木造戰船時代)가 낳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즉 이순신에 의하여 창제된 철장 장갑선이 바로 그것이다. 해전사상 화포가 실용화된 이후 함대운동과 포격전을 주전법으로 한 근대식 해전의 특색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 것은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또한, 접전 때마다 선봉이 되어 전세 확립에 크게 이바지한 거북선은 장갑전법의 선구로서, 속도와 기동성이 주력전선인 판옥선(항해시 약 7노트)보다 앞서는 이른바 장갑돌격선이었다.
한편, 일반 전선도 관심 여하에 따라 주요 부위에 대한 철판의 장착이 수시로 가능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분의 <행록>에 “적은 배를 쇠로 싸고 젖은 솜으로 가리었는데……”라 하였듯이 이미 임진왜란 초기의 해전에서 왜선 중에 철로 방어한 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인 방어의 보강은 장갑선으로서의 철갑은 아니며, 당초 장갑선의 목적으로 고안된 거북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왜군의 별칭에 따라 장님배로 기록된 거북선은 ‘밖에서는 배 안을 엿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장갑선이며, 교전 때는 물론 평소의 항해 때라도 승무원이 배갑판 밖으로 나올 기회는 돛의 조작 등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승무원의 불편함이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거북모양을 본떠서 만든 철저한 갑각형장갑(甲殼型裝甲)이다. 거북선의 철장은 귀배판의 철갑과 철첨뿐만이 아니라, 포혈 주변의 패판도 적절히 보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소요된 철의 양은 척당 9t 정도로, 특히 선고(船高)가 낮은 거북선의 경우, 배의 안정성에는 무리가 없는 것이다.
거북선의 체제와 위력이 종종 몽충(蒙衝)의 이름으로 상징된 것은 흥미있는 비유라 하겠다. 몽충은 소의 생가죽을 등에 덮어 보강하고, 양편에 노젓는 구멍을 내었으며, 전후좌우에는 활과 창을 사용할 구멍을 내어서 적이 가까이 올 수 없게 한 고대 중국의 맹렬한 돌격선의 이름이다(通典).
완벽한 장갑선인 이순신의 거북선은 세계 역사에서 최초의 시도였으나, 국부적으로 철판을 이용하여 방비를 보강한 사례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1585년 네덜란드 안트워프(Antwerp)의 공략 당시 부분적으로 철판을 붙여놓았으나 좌초되어 노획된 피니스 벨리스(Finis Bellis)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 밖에도 1578년 갑판 위의 망루 부분을 철로써 방비한 구키의 아다케형(安宅型) 군선, 1370년 원나라에서 뱃머리를 철로 싼 류영충(廖永忠)의 군선, 그리고 1203년 남송 때 현측(舷側)을 철로 보강한 진세보(秦世輔)의 수소차륜식(水搔車輪式) 해골선(海鶻船) 등이 있다(J. 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1971).
진세보의 해골선만 하더라도, 석궁(石弓)·투석기(投石機) 및 투탄기(投彈機), 그리고 화창을 장비한 배이므로 개방된 발사공간의 확보가 불가피하였다.
장갑선의 역사를 일괄한다면, 시석시대(矢石時代)에 탄생한 중국의 몽충, 화포의 실용화시대에 고안된 이순신의 거북선, 그리고 근대적 장갑선으로 성공을 거둔 미국의 모니터를 같은 계보에 특기하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북선의 역사적 의의는 어디까지나 이순신의 승리에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임진왜란 후의 거북선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나자 거북선은 이미 그 존재가치를 잃고 말며, 실질적 운영에 있어서도 한때 도외시된다. 국방의 증강과 수군의 정비가 이루어짐에 따라 전선과 거북선에 대한 규격상의 복구책이 강구되었으나, 전선의 변천에 따라 거북선의 크기도 증대추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1795년(정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속에는 거북선의 제도를 기술한 내용이 있어, 비록 후대의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지만, 거북선의 제원(諸元)을 아는 데 귀중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1606년(선조 39) 조선차관(造船差官) 나대용은 임진왜란 후에 봉착한 수군의 운영난을 통감하여 자신이 고안한 창선(鎗船)의 사용을 다음과 같이 상소하고 있다.
“거북선이 비록 싸움에 쓰기에 이로우나 사격(射格)의 수가 판옥선의 125인보다 적지 아니하고, 사부(射夫) 또한 불편한 연고로 각 영에 한 척씩만 두고 더 만들지 않습니다. 신이 항상 격군(格軍)을 줄이는 방책을 생각해 왔는데,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검과 창을 숲처럼 꽂아 이름지어 창선이라 하였고, 격군 42인을 나누어 실어 바다에서 노젓는 것을 시험하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宣祖實錄 39年 12月 戊子).
임진왜란 후에 병력의 충원이 뒤따르지 않자 거북선의 운영은 곤란한 상태에 처하고, 각 영에 한 척씩만 배치된 채 제도의 형식만이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척수도 모두 5척으로 임진왜란 당시나 다름없었다. 봄·가을에 훈련할 때면 사수와 격군은 임시로 충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1615년(광해군 7)에 비로소 순검사(巡檢使) 권분(權盼)이 수군을 검열하고 이순신이 정한 바의 전선의 옛 제도를 감정하여 구제도로의 복귀를 시도하니, 이때 작성된 것이 소위 구제도에 대한 <감정절목 勘定節目>이다. 이 무렵의 사정은 전선과 거북선의 고대화현상(高大化現象)을 심각하게 거론했던 숙종 때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備邊司謄錄 第41冊).
국방의 증강과 수군의 정비 등이 논의되던 무렵인 1686년(숙종 12) 12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 중신들이 전선의 체제가 전에 비해 커졌으니 이순신의 옛 제도에 따라 개선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놓고 토의하게 된다.
모두가 권분의 <감정절목>을 가리켜, “당초 절목을 꾸밀 때, 난이 지난 지 오래지 않아 이순신의 휘하 장교나 늙은 병사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어……모든 장수와 함께 묘당에 모아 감정한 것으로, 그 정한 바 치수는 필경 이순신 때의 옛 제도에서 나온 것이고……” 하니 왕도 그 절목을 준수하라는 뜻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의정의 말에 따르면, 거북선에 대한 제도와 치수에 대해서는 이 <감정절목>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아, 거북선도 다른 전선과 같이 점차 고대해졌다는 설은 근거가 있다 하겠다. 결국 창제귀선에 대한 규격상의 체제는 복원되지 못하고 말았다. 전선의 크기의 증대 추세에 대한 비판이 많았으나, 특히 거북선의 비대화는 곧 퇴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1751년(영조 27) 영남균세사(嶺南均稅使) 박문수(朴文秀)는 “신이 전선과 귀선의 제도를 소상히 살펴보매 전선은 개조시에 선체가 점차 길어져 반드시 운영이 어렵사옵니다. 귀선에 미쳐서는 당초의 체제 몽충과 같사옵고,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을 피하오니 신이 이순신의 소기를 살펴보매 귀선의 좌우 각 6총혈이 열리매 지금은 8혈을 열었사오니, 귀선은 전에 비하여 과대하나이다. 또 아뢰올지니, 개조 아니치 못할 바를……”(英祖實錄 27年 2月 己丑)이라고 하여 전선과 귀선의 퇴화상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경상좌수사 이언섭의 소위 ‘인갑귀선’의 상소가 있은 지 3년도 지나지 않아 왕에게 보고된 내용이다. 장소도 같은 영남인데, 박문수는 경상좌수사가 주청한 바의 ‘누선에 비하여 판이하게 예리하고 날랜’ 이른바 이순신의 창제귀선의 정신을 계승한 예외적인 거북선은 볼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또, 정조 때에는 같은 선체에 조립식으로 상체 부분[上粧部分]만 바꾸면 판옥선도 되고 또 거북선도 될 수 있는 소위 병용전선(並用戰船)도 있었지만(正祖實錄 22年 正月 丙戌), 이와 같은 운영방식은 전투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물건을 실어나를 때 편리하도록 한 방책이었다.
임진왜란 후의 거북선은 수영(水營)에 따라, 혹은 수사(水使)의 관심과 재량에 따라 그 변천의 양상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마땅하나, 퇴화설이 자주 거론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순조 때의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은 “근일 들은 바에 따르면 각 수영에 있는 거북선은, 이름은 거북선이라 하되 화호불성(畫虎不成)이라, 다른 배와 다를 바 없다.”(日省錄, 純祖 9年 4月 17日 丙午) 하여 당시의 소문을 전하고 있다.
≪이충무공전서≫는 이순신이 전사한 뒤 200년이 지난 1795년(정조 19) 어명에 의하여 출판된 책이며, 이순신의 일기·장계·행적과 그를 예찬하는 시문, 비명 등 여러 가지 관련 기록을 집대성한 전문 30여만 자에 달하는 책이다. 편집은 당시의 규장각 문신 윤행임(尹行恁)이 담당하였다.
이 책의 권수도설(卷首圖說)에는 ‘통제영귀선(統制營龜船)’과 ‘전라좌수영귀선(全羅左水營龜船)’의 판화귀선도(版畫龜船圖), 그리고 700자 정도의 ‘안설(按說)’이 실려 있다. 거북선의 제도에 관계되는 사료 중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기술된 자료이다. 이것은 물론 정조 때의 거북선을 나타낸 것이나, 숙종에서 영조 때의 거북선도 체제에 있어서는 대략 이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설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거북선의 제도:저판(底版, 밑판. 속명은 本版)은 열 쪽을 이어붙였는데, 길이는 64척8촌이고, 머리쪽 넓이 12척, 허리 넓이 14척5촌, 꼬리쪽 넓이 10척6촌이다. 좌우 현판(舷版:속명은 杉版)은 각각 일곱 쪽을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7척5촌이고, 맨 아래 첫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며, 차츰 길어져서 맨 위 일곱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길이가 113척이 되고, 두께는 다같이 4촌씩이다.
노판(艫版:짐판. 속명은 荷版)은 네 쪽을 이어붙였는데, 높이는 4척이고 두번째 판자 좌우에 현자포 구멍 1개씩을 뚫었다. 축판(舳版:짐판. 속명은 荷版)은 일곱 쪽을 이어서 붙였는데, 높이는 7척5촌, 윗넓이는 14척5촌, 아랫넓이는 10척6촌이다. 여섯번째 판자 한가운데 지름 1척2촌의 구멍을 뚫어 키[舵:속명은 鴟]를 꽂게 하였다.
좌우 현(舷)에는 난간[舷欄:속명은 信防]을 설치하고 난간 머리에 횡량(橫梁:속명은 駕龍)을 건너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과 같다.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 패(牌)를 둘러 꽂았으며, 패 위에 또 난간[牌欄:속명은 偃防]을 만들었는데, 현란에서 패란에 이르는 높이는 4척3촌이며, 패란 좌우에 각각 열한 쪽의 판자(덮개. 속명은 蓋版 또는 龜背版)를 비늘처럼 서로 마주 덮고 뱃등에는 1척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도록 하였다.
뱃머리에는 거북머리를 설치하였는데 그 길이는 4척3촌, 넓이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연기를 안개같이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고, 좌우 패에는 각각 2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12개의 문을 만들었다.
거북머리 위에도 2개의 포혈을 뚫었고, 그 아래에 2개의 문을 냈으며, 문 옆에는 각각 포혈 1개씩이 있다. 좌우 복판(覆版)에도 각각 12개의 포혈을 뚫었으며 ‘귀(龜)’자 기를 꽂았다. 좌우 포판(鋪版) 아래 방이 각각 열두 칸인데, 두 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세 칸에는 화포·활·화살·창·칼 등을 넣어두고, 열아홉 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하였다.
왼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선장이, 오른쪽 포판 위의 방 한 칸은 장교들이 거처하는데, 군사들은 쉴 때는 포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포판 위로 올라와 모든 포혈에 대포를 대어놓고 쉴새없이 쟁여 쏜다.
상고하건대 충무공의 행장에 이르기를 ‘공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왜적이 장차 쳐들어올 것을 알고 지혜를 써서 큰 배를 만들어, 배 위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는 십자(十字)로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하게 하고 그 밖에는 다 칼송곳을 깔았는데 앞은 용머리로, 뒤는 거북꼬리로 되었으며, 총구멍은 전후좌우에 각각 6개씩으로 큰 탄환을 쏘는데, 적을 만나면 거적으로 위를 덮어 칼송곳을 가리고 선봉이 되어 적이 배에 오르려 하면 이 칼송곳 끝에 부딪치며, 와서 덮치려 하면 한꺼번에 총을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지 못하는 일이 없어,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것으로 거둔 공적이 심히 많으며, 형상이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으므로 거북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화옥의 ≪해방의≫에 이르되 ‘조선의 거북선은 돛대를 세우고 눕히기를 임의로 하고 역풍이 불건 퇴조 때이건 마음대로 간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충무공이 창제한 배를 가리킴이다. 그런데 모두 아울러, 그 치수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한 것이 없다.
지금의 통제영귀선이 대개 충무공의 옛 제도에서 유래된 것이나 역시 약간의 치수의 가감은 없지 않다. 충무공이 이 배를 창제한 곳은 실로 전라좌수영이었는데, 이제 좌수영귀선은 통제영 배의 제도와 약간 서로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제도를 아래에 붙여 써 둔다.
전라좌수영귀선의 치수·길이·넓이 등은 통제영귀선과 거의 같으나, 다만 거북머리 아래에 또 귀신의 머리를 새겼으며, 복판 위에는 거북무늬를 그렸고, 좌우에 각각 문이 2개 있으며, 거북머리 아래에 포혈이 2개, 현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1개씩, 현란 좌우에 포혈이 각각 10개씩, 복판 좌우에 포혈이 각각 6개씩이며, 노는 좌우에 각각 8개씩이다.”
안설의 뱃머리 부분의 설명에서 “노판은 네 쪽을 이어붙였는데[艫版聯四]”라고 하였으나, 거북선의 그림을 보면 일곱 쪽의 곡목(曲木)을 이어붙인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노판의 제원 설명이 누락되고, “네 쪽을 이어붙였는데……”는 상장(上粧)의 앞쪽 패판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한다. 또 그림을 보면 거북의 머리는 용의 머리로 되어 있다.
이순신의 ‘창제귀선’에 대해서는 이분의 <행록>을 인용하고 있을 뿐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이충무공전서≫의 권수도설은 정조 때만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후대의 귀선상(龜船像)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포혈의 수는 통제영귀선이 모두 74개, 전라좌수영귀선이 모두 36개로, 이순신 귀선의 14개에 비한다면 그 변천상이 현저하다.
같은 시기로 보여지는 전라우수영 소속의 장자제3·4호귀선(張字第三四號龜船)에서 정원의 배치내용을 보면, 선장 1인, 사부·좌우포도(左右捕盜)에 16인, 화포수 10인, 포수 24인, 타공(舵工)·무공(舞工)·요정수(繚椗手)·선직(船直)에 10인, 능로(能櫓) 90인, 기라졸(旗羅卒) 10인 등 정원은 모두 161인에 이르고 있다(全羅右水營誌).
또, 거북선의 척수를 연대별로 알아보면, 임진왜란 당시 을미년(1595)에 5척, 난 후 8년이 지난 1606년(선조 39)에도 5척, 그리고 1716년(숙종 42)에도 그대로 5척이나, 1746년(영조 22)에는 14척(續大典), 1808년(순조 8)에는 30척(萬機要覽) 등으로 점차 증가되었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고증에 따라 만든 거북선모형이나 1980년 진해 해군기지에서 최초로 진수된 실물크기의 복원귀선은 ≪이충무공전서≫의 도설 중 주로 전라좌수영귀선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철갑과 철첨을 더함으로써 이순신의 거북선을 상징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안설에 의한 복원연구에 따르면, 선체길이(雙葉尾를 제외한 상장부분) 26∼28m, 선체너비 9∼10m, 선체높이 6∼6.5m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거북선 [─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