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미숙의 아우 단보 군이 그의 죽은 누이가 지은 『난설헌고(蘭雪軒藁)』를 가지고 와 보여
주었다. (…) 나는 시학(詩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본대로 평한다면 그 뛰어나기가 숭산과 화산이 빼어나기를 다투는 듯하고, 한당(漢唐)의
시보다 뛰어난 것들이 많다. 또한 사물을 보고 정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시절을 염려하고 풍속을 근심함에는 열사의 기풍이 있다.(『서애집』)
류성룡(1542~1607)이 1591년에 쓴 ‘허난설헌집 발문’의 일부이다. 미숙은 허봉(1551~1588)의 자(字)고
단보는 허균(1569~1618)의 자로, 허난설헌의 오빠이고 동생이다. 1589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허난설헌, 많은 작품들은 유언에
의해 불살라졌다. 그런 가운데 동생 허균은 친정에 남겨진 것들과 자신이 외운 누이의 시를 모아 210여 편의 문집으로 엮었다. 그리고 평소
존경하던 형의 절친 류성룡을 찾아가 발문을 부탁한 것이다. 허균은 류성룡의 발문을 붙인 몇 권의 필사본을 다시 만들어 지인에게 돌렸다.
중국에 먼저 알려지다
허난설헌은 신사임당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 역사의 여성인물이다. 시와 그림에서 각자 뛰어난 세계를 구현한 그들이지만, ‘출세’로
이어지는 길은 가족 남성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어야 했다. 율곡 어머니라는 사실로 사임당의 역사가 더욱 빛났다면, 시인 난설헌은 허봉과 허균으로
인해 역사에 기억될 수 있었다. 하늘이 내린 재주가 있다한들 그 시대 여성들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노력이 없이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명사의 발문까지 받아놓았지만 곧이어 임진왜란이 터지는 바람에 그 간행이 미뤄졌다. 조선의 전쟁을 도우러 온 참전 문인
오명제(吳明濟)는 돌아가 『조선시선(朝鮮詩選)』(1600)을 펴내는데, 시를 수집한 경위를 이렇게 썼다.
기다렸던 한양에 도착하여 많은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공관 밖에 거주하며 여러 학자들과
교분을 나누고 막사로 돌아오겠다는 나의 간청이 받아들여져 허 씨[허균] 집에 머물렀다. (…) 이 때 그 누이의 시 2백 편을 얻었다.(
『조선시선』)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의 애호가들을 감동시켰다. 여기저기 이름난 시선집들은 난설헌의 시로 독자들을 끌어들였는데, 현재 확인된
것만 해도 10권이 넘는다. 요절이라는 안타까운 현실은 천재 시인의 존재를 신화화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었다. 여선녀가 동방 조선에 내려와 잠시
머물다 갔다는 식이다. 이름난 학자들의 무게 있는 시평도 지속적으로 나왔다. 반지항(潘之恒)은 허난설헌을 가리켜 “한나라 반소와 같은 존재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하며, 이에 대해 조선의 군신들도 동의할 것일 바 오히려 그녀보다 앞서지 못함을 느낄 것이다”라고 썼다.( 『긍사(亘史)』,
1608)
누이의 시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 허균의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1606년 명나라 황손의 탄생을 알리러 온 사신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도 난설헌 시에 감회를 남겼다. “주지번이 내게 누님의 시에 대해 묻기에 갖고 간 시권(詩卷)을 바로 바쳤다.
그가 읊어보더니 감탄했다.”( 『성소부부곡』)며 허균은 그날을 기록했다. 주지번은 난설헌의 시를 “빼어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뼈대가 뚜렷하다”고 했고, 양유년은 허난설헌이 길이 만대에 전해지느냐 아니냐는 이제 역사가의 몫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2년 후 허균은 공주
목사로 부임하여 누이의 시문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한다. 평소 허균은 “누님은 두 아이를 잃어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누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누이의 것이라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 세상에서 시야말로 사라지지 않을 누이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허난설헌은
동생 허균에 의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형제의 간절함으로 남은 누이와 그의 시(詩)
한편 1년 먼저 세상을 뜬 오빠 허봉은 난설헌이라는 시인을 탄생시킨 인물이다. 난설헌보다 12살이 많았던 오빠는 당시(唐詩)의
대가 이달(李達)을 모셔와 누이의 시 공부를 돕게 했다. 그는 또 아끼던 두보의 시집을 여동생에게 보내며 두보처럼 되기를 바란다.
이 책 『두율(杜律)』은 소문단(邵文端) 공이 가려뽑은 것이다. 우주(虞註)보다 간단명료하니 읽을
만하구나. 지난 날 내가 성절사의 명을 받아 가던 길에 통천에 머물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난 섬서(陝西)의 거인(擧人) 왕지부(王之符)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지. 헤어질 때 내게 이 책을 선물했는데, 상자 속에 고이 간직해 온 지 몇 년이 흘렀구나. 이제 너에게 보내니 한 번 읽어보렴.
내 뜻을 저버리지 말기를. 두보의 명성이 내 누이에게서 다시 일어날 수 있겠지?(1582년 봄 오라비 하곡)
허봉은 아우 허균에게 “경번[난설헌의 자]의 글재주는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했는데, 그래서 형제는 누이의 그
천재성을 살리기로 뜻을 함께 한 것이다. 허봉은 귀한 문방이 생길 때마다 누이를 생각했고, 시를 동봉하여 공부를 독려했다.
귀한 자리 있을 때 하사받은 붓이라네 가을 규방에 보내니 풍경들과 놀아보려무나 오동나무와
마주하여 달빛도 그려보고 등불을 따라 몰려드는 벌레들도 그리겠지 (「누이에게 붓을 보내며」)
허봉은 난설헌에게, 난설헌은 허균에게 스승이 되었다. 허균이 시를 쓰면 난설헌이 문장을 손 봐 주었다. 또 이들 남매는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힘이 되어 주었다. 오빠 허봉이 귀양길에 오르자 난설헌은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가느라 마음 더욱 바쁘시네”
고 시작하는 시를 보내 위로한다. 허봉은 누이 부부의 아들이면서 자신의 조카인 희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묘비명을 지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인 아이는 희윤이다. 희윤의 아버지는 성립인데, 나의 매부이다. 희윤의 할아버지는 첨(瞻)인데, 내
친구이다. 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짓는다. 해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친다.(「희윤묘지(喜胤墓誌)」)
딸과 아들을 연달아 잃은 난설헌은 두 아이의 무덤 앞에서 서러워하다가 “아무렴 알고 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테지”(「곡자(哭子)」)라며 자신을 위로한다. 5월의 길목에서, 형제들의 간절함으로 세상에 나온 난설헌의 시 한편을 읊어본다.
제비는 처마 비스듬히 짝지어 날고 [燕掠斜簷兩兩飛] 지는 꽃 어지러이 비단 옷을 스치네
[洛花撩亂撲羅衣] 규방의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洞房極目傷春意] 녹음이 짙도록 낭군은 돌아오지 않네
[草綠江南人未歸] -강사에서 독서하는 낭군에게 寄夫江舍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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