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반이면 우리 집에 아침신문이 들어온다. 내가 잠에서 깨는 시각은 그 이전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나는 대개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글을 쓰거나 인터넷신문 검색을 한다. 정적 속 아파트 승강기 문이 열리면서 현관 앞에 신문 떨어트리는 소리가 나면 나는 현관문을 열고나가 신문을 집어온다. 나는 종달새형이라 잠을 일찍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 활동하는 버릇은 오래 전부터다.
나는 아홉시 저녁뉴스가 끝나갈 무렵 잠에 드는 편이다. 여기에 비해 집사람은 밤 열두시를 넘기기는 예사다. 설거지나 집안일을 마무리할 것도 많아서겠지만 언제나 늦은 밤까지 꼼지락꼼지락 활동하는 편이다. 그러니 어떤 때는 집사람이 잠자리 들려고 할 즈음 나는 잠에서 깨어 일어날 수가 있다. 그럴 때는 우리 집 거실은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는 날로 집사람은 전형적인 올빼미형이다.
큰 녀석이 대학가면서 부모 곁을 떠났다. 지금은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제대하더라도 공부를 더해야하고 제가 살아갈 길을 찾느라고 바깥에서 떠돌 것이다. 작은 녀석은 이태 전 중학교를 마치자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떠났다. 그러니 아들 녀석 둘을 삭막하게 키워오던 집이었지만 모두 제 갈 길로 떠났다. 큰 녀석은 휴가 때, 작은 녀석은 귀가일 되어야 얼굴을 본다.
우리부부가 신혼살림을 시작하기는 삼랑진 역 앞이었다. 총각시절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책이나 몇 안 되는 옷가지를 둔 단칸방이었다. 보일러 연탄가스가 염려되어 근처로 한 번 더 옮겨 큰 녀석이 태어났다. 큰 아이 돌이 다가올 무렵 고성 당항포 바닷가 중학교로 옮겨 근무했다. 학교 가까운 시골마을 아래채 세 들어 살았다. 바닷가라 물이 귀해 우물물을 아껴 썼던 기억이 있다.
낮선 곳에서 정을 붙여 살아갈 즈음 다시 밀양으로 되돌아갔다. 이제는 밀양 수산에 생활근거지를 두고 부곡 가는 길가 있는 어느 학교에 잠시 근무했다. 그 무렵 낙동강 강변 마을에서 단칸방에서 둘째가 태어났다. 이후 나는 밀양시내로 옮겨 근무했다. 비로소 조그마한 아파트에 네 식구의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서 오년 남짓 살다가 창원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짐을 꾸려 떠나왔다.
창원에 처음 와서 낮은 아파트와 연립주택이 섞인 명서동에 세 들어 살았다. 그곳은 지금 낡은 아파트를 헐고 재건축이 한창이다. 큰 녀석이 배정받은 중학교 통학거리가 불편해 한 번 더 이사한 곳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반림동 아파트다. 창원에 터 잡아 살기 시작한 지가 십삼 년째 접어들었다. 그 사이 초등학교와 유치원 다녔던 두 아들 녀석이 자라서 부모 품에서 벗어났다.
큰 녀석은 일 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한 휴가다. 작은 녀석은 한 달 마지막 주 토요일 귀가일이 있지만 부자간 몇 마디 오고갈 이야기도 없다. 그래도 두 아들 녀석이 며칠이라도 집에 머물 때는 집안에 생기가 돈다. 말벗이 없어 시무룩해 있던 집사람은 갑자기 생기가 돈다. 아들을 위해 찬거리를 사와 다듬고 냉장고가 채워져 있다. 두 아들 녀석은 언제나 아비 편이 아니고 어미 편이다.
아들 녀석이 손님처럼 왔다가 훌쩍 떠나고 나면 나는 또 찬밥신세가 된다. 집사람에게 보낸 배려가 없었기에 돌아올 배려가 적은 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면벽 수도하는 도승은 아닐지라도 집안에서 별로 말이 없이 지내왔다. 하다못해 집사람이 즐겨보는 드라마를 곁에서 같이 보면서 고개라도 끄떡거려주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고작 일기예보에만 관심을 두었다.
집사람이 내 곁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다. 나를 무정한 사람이라고 수없이 실망했고 원망했지 싶다. 살갑게 오고간 정은 약에 쓰려 해도 없다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 삼월신학기라 학교 업무와 아이들과 부대끼느라 심신이 많이 지쳤다. 주말이라 문학동아리 월례회에 나가야할 일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만사 제쳐두고 집사람과 꽃구경이나 가고 싶다. 어느 산자락이나 들판으로. 09.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