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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아진 성자"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
1). 서언: 교황권 절정기인 1209년 이노센트 3세의 교황청에 행색이 초라한 28세의 청년과 친구 11명이 찾아와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거지 모습의 초라한 청년은 '라테란' 궁전의 길고 화려한 통로를 걸어 교황 보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복도 옆에는 많은 추기경과 주교들이 호기심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형제들의 모임"을 수도회로 인가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13C. 역사가인 '파리의 마태'는 이 대면에 대해서 더 자세히 기술해 주고 있습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이 청년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돼지 치기 같은데 돼지들한데 설교하고 오면 허락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러난 그 청년은 실제로 오물이 가득한 돼지 우리에서 하루 밤을 자면서 돼지들에게 설교를 하였고, 이튼날 다시 교황을 찾아왔습니다. 교황은 그의 비범함을 인식하며 "그대들의 형제회를 인가하노라. 큰 수도회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황과 대면한 이 인물은 바로 성자 프란시스(프란체스코)이었습니다.
2). 가장 낮아진 성자"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 성자 프란시스(1182~1226)는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승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아버지 피에트로는 의류 상인이었으며, 아내 피카가 프란시스를 낳을 때 그는 프랑스 방문 중이었습니다. 피카는 난산 중에 있었는데, 한 순례자가 지나며 그녀에게 집이 아닌 마구간에서 출산한다면 모든 과정이 순탄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집 옆의 마구간으로 가서 프란시스를 낳았다고 합니다. 사실 프란시스의 출생 전승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연상시키며 프란시스가 전개할 미래 사역도 시사해 줍니다. 아버지 피에트로는 프랑스에서 사업으로 성공하였고, 또 아내도 프랑스 출신이어서 이탈리아인 아들을 "프란시스(프랑스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잘 생기고 명랑한 청년이었습니다.
부유하게 생활했고 무지개 같은 화려한 옷들을 좋아했으며 오락을 즐기었습니다. 20살이 되자 그의 고향 아시시는 인근 도시 페루기아(Perugia)와 정치적 문제로 전쟁을 벌렸고 프란시스는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페루기아에서 1년간 옥에 갇혀 큰 고초를 겪은 후, 그는 간신히 귀향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프란시스는 전쟁과 투옥 경험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성찰하며 세속적인 환락과는 결별하고 영적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단벌옷과 지팡이 외에는 소유하지 않았던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묵상한 후, 프란시스는 이를 평생 따르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갑자기 변한 프란시스를 의아해 했고, 그는 자신의 결혼을 앞두고 있어 방종 할 수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어느 여인과 결혼하느냐고 물었고, 프란시스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의 신부는 청빈(Lady Poverty)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날 프란시스는 성자 다미앵 성당에서 기도하는 중 갑자기 "집을 세우라."는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 아시시의 여러 예배당들은 부서진 상태였습니다. 프란시스는 그 음성을 교회 건물을 수리하라는 명령으로 생각하고 망치를 들고 한둥안 쇠하고 버려진 성당들을 수리하였습니다. 얼마후 프란시스는 그 음성을 부귀와 갈등을 통해 무너진 교회를 청빈과 평화의 정신을 통해 새롭게 세우라는 소명으로 재인식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일이 더 늘게 되었습니다. 성당 건물들을 수리하면서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돕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아예 자신이 소유한 것은 다 나누어 주었고, 심지어 아버지 재산인 옷감까지 팔아 구제를 위해 써버렸습니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분노하여 아들을 집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프란시스는 아버지에게 옷까지 벗어 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새 삶을 선언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과 화해했던 성자 프란시스가 딱 한 사람과는 화해하지 못한 분이 바로 그의 아버지이었습니다. 이제 프란시스는 아시시의 거지나 다름없었고 은둔의 기도와 명상에 전념하였습니다. 그의 일은 빈자들을 찾아가 필요한 일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은 구걸을 통해 얻었고, 이조차도 타인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청빈과 결혼하였습니다.
얼마 후 프란시스는 친구들을 모아 프란시스 형제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회색 누더기 옷을 입으며 헤어지면 계속 기워 입어 평생 단벌옷의 사람이 되고 또 벗은 맨발로 살기로 서약하였습니다. 때문에 프란시스 수도회는 "회색 수사(Gray Friars)"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209년 프란시스 형제회는 교황 이노센트 3세의 수도회 인가를 받은 후, 더 크게 성장하였고, 10년 수 5,000여 명으로늘어 났습니다.
아시시의 부호 달인 클라라(St. Clara)는 아버지의 반대를 딛고 프란시스의 애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녀는 프란시스 수녀원을 설립했고, "청빈의 클라라(Poor Clara)"라고 불리며 프란시스와 교제하였다고 합니다. 프란시스는 역사상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삶에 나타난 청빈,사랑, 용서가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나병 환자를 껴안으며 친구가 되었고, 이후 프란시스 수사들은 걸인과 병자의 친구가 되기를 소원했다고 합니다. 또한 진정한 신자는 물질과 영광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의 제자 한명이 길에서 돈을 주워 감추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프란시스는 그 제자에게 입으로 돈을 물어 길바닥의 똥에 집어 넣으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제자는 시키는 대로 순종했고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돈을 똥처럼 생각하라."
프란시스는 세상의 모든 존재 하나하나를 "형제"라고 부르며 평화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태양이나 달을 가리킬 때도 "형제 태양"이나 "자매 달"이라고 했습니다. 새와 나무도 친구였고 만물은 창조의 신비를 노래하는 형제였습니다. '구비오'라는 마을에 늑대 한 마리가 출현해 사람들과 가족들을 해쳤습니다. 프란시스는 숲으로 들어가 늑대를 보자 알아듣든 말든 그 사나운 눈을 보며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늑대 형제여! 그대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들에게 끼친 해는 너무나 잘못된 것이오.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하지만, 나는 그대가 사람들과 화해하며 살기를 바라오." 다시 마을로 돌아온 프란시스는 마을 사람들에게 밭에 먹을 것을 매일 미리 둘 것을 권했고, 이후 늑대는 피해를 주지 않았고 마을의 애완견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자 프란시스는 이집트까지 가서 '살라딘'의 조카인 술탄 알 카밀(Alkamil)을 만나 사랑과 용서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술탄은 비록 프란시스의 권고를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비범함을 인지하고 이슬람 지역을 안전히 통행하도록 조치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프란시스의 수사들은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위해 몽골과 중국은 물론 세계를 누볐습니다.
프란시스는 성탄 때 가축 인형과 짚들로 장식되는 '아기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 장면'을 최초로 전시한 이로 전해 지고 있습니다. 프란시스는 기독교의 본래 자리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임을 역설하였습니다. 물질, 명예, 권력과 결혼한 이들에게 프란시스는 청빈, 비움, 섬김과의 결혼이 얼마나 행복한지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누더기 한 벌 옷은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소유했던 모든 보화보다 값진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산상 수훈이 이상(Ideal)이나 목표(Goal)라고 여겼지만, 성 프란시스는 그것이 실행 가능한 원리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프란시스 수도회는 예수님의 사도처럼 살자는 '비타 아포스톨리카(Vita Apostolica)', 즉 "사도적 삶"의 운동으로 불리며 더 확산되었습니다. 현대의 성녀 테레사(d.1997)는 성자 프란시스의 것으로 알려진 다음의 기도문을 늘 외웠다고 합니다.
(Prayer of St. Francis):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주는 것 속에서 얻게 하며, 용서하는 것 속에서 용서 받으며, 죽는 것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소서!" 1226년 생애 말기 성자 프란시스는 40일 동안 금식하였다고 합니다. 건강은 심히 쇠약해졌고 빈자들을 섬겼던 두 손바닥과 맨발로 다닌 두 발에는 상처가 생겼고 피까지 흘렀다고 합니다.
동굴의 돌 위에서 자다가 생긴 옆구리 상처에서도 출혈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인 '성흔(Stigmata)'을 가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섯 군데 상처들은 치료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결국 그는 44세를 일기로 시편 141편을 암송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전에 프란시스가 교황 3세를 처음 대면했을 때 많은 주교들이 비웃었지만 그때 추기경 우골리노(Ugolino)만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프란시스 사망 1년 후 '우골리노'는 교황에 선출되어 그레고리 9세가 되었으며 프란시스를 성자로 시성하고 이 형제회의 확산을 지원하였습니다.
3. 결언: 그의 사망 50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에서는 1,000여 개가 넘는 성 프란시스 수도회와 수만 명의 수도사들이 출현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그의 시대에 유럽은 십자군이 여전히 지속되며 일탈과 침공을 일삼는 때였고, 동양은 칭기즈칸이 수많은 학살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하는 시대였습니다. 살육이 동서로 넘쳐나는 시대에 그는 참으로 숭고하고 완벽한 비움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자 프란시스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매 죽음이여! 그대를 환영하오!(Welcome, Sister Death!)" 끝.
2024년 1월 26일
山下연구소: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