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시각장애인 최초 공립학교 교감 구만호 교사
“학생도 선생님도 모두 즐거운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스승의 날을 며칠 앞둔 어느 봄날, 서울 은평문화예술정보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구만호 교사를 만났다. 망막세포변성증으로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그는 장애에 굴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교단에 섰고, 올 초 국내 최초로 공립학교의 교감이 됐다. 그는 “장애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동등한 학교 구성원으로 대해준 동료들, 장애인 이전에 선생님으로 존경하고 존중해준 학생들 덕분에 이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Q. 부임을 축하합니다.
A. 감사합니다. 한때 진지하게 은퇴를 고민했던 적이 있어 감회가 남다릅니다. 은평문화예술정보학교는 건축인테리어, 미용예술, 호텔조리 등의 직업교육을 하는 특성화고등학교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건축디자인을 가르쳤습니다. 대개 선생님이 학생들을 지도한다고 생각하지만, 지난 30여 년의 교직 생활을 돌아보니 학생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웠더군요. 꿈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선택하는 모습, 끈기를 갖고 노력하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나는 저렇게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가’라며 돌아보게 됩니다. ‘제자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인생을 살자’라고 다짐하고 있고, 시각장애로 인해 포기하기보다는 인내하는 길을, 불가능하다고 체념하기보다는 노력하는 길을 걷자고 다짐합니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은 듯해 감사할 따름입니다.
Q. 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A. 학창시절, 저 역시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특성화고등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는데, 당시 담임선생님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선 호되게 꾸짖으시면서도, 고민이 있다고 말씀드리면 늘 진지하게 들어주셨어요.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특성화고 학생이기에 대학 진학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낙담만 하는 제게 선생님은 전공을 잘 살리면 얼마든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보라고 격려해주셨어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반가워 열심히 노력했고, 마침내 건축학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Q. 중도 시각장애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A. 처음 진단을 받은 건 1998년, 야간 대학원을 다니며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수업 준비는 물론 학습지도 집필해야 하고, 논문 발표와 심사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피로가 상당했어요. 이따금 눈이 침침해져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그러던 어느 날 글자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당시 느꼈던 당혹과 충격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죠. 부랴부랴 병원을 찾은 결과 망막 세포가 점차 퇴행하는 ‘망막세포변성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천천히 시야가 좁아지면서 가장 먼저 보행이 어려워졌어요. 무릎이나 이마를 다치는 일도 늘었습니다. 크게 넘어진 뒤로는 손부터 내밀어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죠.
Q. 충격이 컸겠습니다.
A. 저 스스로 시각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시각장애를 이유로 교편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억울했죠. 그러면서도 당연히 포기하는 게 맞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이 바뀌는 나날을 10여 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방학을 이용해 마음을 다잡을 겸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거기서 만난 한 의사가 “시력이 계속 저하되는 건 맞지만 실명까지는 안 될 것 같고, 만약 시력을 잃더라도 그날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라는 의견을 전했어요. 병증의 양상이 중앙 시야부터 차츰 소실되면서 주변 시야까지 번져가는 것이기에 시력이 나빠졌을 뿐이지 아예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 점이 희망으로 다가왔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Q.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요?
A.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동료 교사들도 학생들도 “그래서 시력이 좋지 않았군요”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어안이 벙벙했죠. ‘장애’라는 것에 매몰돼 실제 시야뿐 아니라 사고의 폭도 좁아졌던 건 아닐까, 편견에 갇혀 세상이 보일 반응을 속단한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애를 알렸기에 심리적 압박은 덜었지만, 부담은 남아 있었습니다. 업무상 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요. 저하된 시력 탓에 행정 업무는 시간이 좀 더 걸리니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습니다. 확대독서기 같은 보조기기 덕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큰 무리는 없었어요. 아쉬운 부분은 학생들과 대화할 때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점입니다. 시선 교환이 어려워진 대신 말의 뉘앙스나 손동작으로 학생들과 대화를 이어가면서 교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Q. 국제기능올림픽에 참가해 좋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A. 2009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금메달 확정 발표를 들었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용산공업고등학교 재임 시절 한 학생이 조적 기술을 지도해달라고 찾아왔어요. 처음에는 “눈이 불편한데 어떻게 지도할 수 있겠느냐”며 손사래를 쳤는데, 학생이 “수업 때처럼 해주시면 되잖아요”라며 계속 설득하더라고요. 저를 믿고 따르려는 학생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조적은 벽돌을 쌓아 에펠탑이나 남대문과 같은 건축물을 만드는 분야입니다. 직접 재단하고 벽돌을 마름질해 시멘트로 접착하는 등 일일이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단 1mm의 오차도 큰 감점 요인이 되기에 섬세함과 정밀한 계산이 요구됩니다. 컴퓨터로 설계도를 확대해서 확인하고, 작업 과정을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개선하기를 수십 번 반복했어요. 시력의 불리함을 지속적인 노력과 집요한 분석으로 보강한 셈입니다.
Q. 교육자로서 앞으로 어떤 바람이 있나요?
A.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합니다. 애정과 관심을 준 만큼 돌아온다는 뜻이지요. 한때 저도 보이는 결과에 신경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은 결코 성적을 위한 것이 아니더군요. 교사의 역할은 학생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등을 밀어주고,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어깨를 잡아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을 학생과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 쓰겠습니다. 더 많은 시각장애인이 공립학교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수정·신혜령 기자
* <손끝으로 읽는 국정> 제163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