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실존철학상담 실습을 1년 간 받는 분이 자신의 고교시절 "은따체험"에 대해서 제 지도로 3회기 정도 실존현상학적 자기분석을 단계적으로 시도하였습니다.
앞선 2회기까지는 "은따"가 확실했다고 생각했으나 아래 마지막 글에는 그것을 '실존적 고독과 자기다움의 실행 의지'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수련감독으로서 저는 앞선 두 차례의 분석에 대해서 오류라고 직접 지적하지 않고 스스로 다양하고 근원적인 해석을 해보도록
이끌었습니다.
이하는 실습생을 허락을 받고 공유한 최종 자기분석 보고서와 거기에 딸린 수련감독의 의견입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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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철학상담 모둠 활동(2023.2.21)
❖ 은따 체험 에피소드 중심으로 가능한 상세히 서술하고 은따의 판단 근거를 찾고 다시 그 시절로 가 실존철학상담사로서 지금의 내가 조언을 해보자.
* 한 집단 안 에서 특정의 사람을 따로 은근히 떼어 멀리하는 일. 또는 그러한 따돌림을 받는 사람.
다시 또 학창시절을 되돌려 보았다. 그 때는 분명, 고등학교 시절에 은따를 경험한 것으로 생각을 했다. 지금 다시 되돌려 보고, 또 보아도 은따라고 확신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부족하다.((그럼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어울림에 대한 욕망이? 아래에서는 자격지심을 원인으로 제시)) 거의 없다는 게 맞겠다. 뇌리에 박힌 몇 가지 선명한 기억이 ‘나는 은따였다’라고 착각을 하게 만든 것 같다. 그 몇 가지 기억이란 전교 조례 시간 짝이 없어 위축된 마음을 느꼈던 기억, 몇몇의 친구들이 무시하는 듯 바라보는 표정, ‘쟤는 왜 저래?’라는 의미가 담긴 얼굴들이다. 학기 초에 몇 몇의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어울리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내고, 그러다가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끼리 어울려 다니게 되는 경우도 있다.((당시 학우들에게나 다른 누군가를 통해 이 해석을 검증받아야 한다.))) 이러한 기억들이 성인이 된 후에, 대놓고는 아니지만, 나는 은근히 ‘따’를 당했었다고 결론을 짓게 되었다.
처음 그 친구들의 눈빛이 기억 났을 때, ‘나의 진가를 모르는 너희들이 바보다.’라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학창 시절 나의 행동이나 태도들을 돌아보았을 때, ‘나라도 나같은 아이랑 안 놀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친구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아마 나의 행동이나 태도를 떠올려 보면서 내가 은따라고 확신의 도장을 찍어버린 것 같다.
과제를 하면서, 내가 진짜 은따였다고 할 수 있을까, 학창 시절 동안 많은 친구들과 대화를 했을 것이고, 기억에 남지 않지만 소소한 재미도 있었을 텐데, 저 몇 가지 기억으로 확신을 해도 되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또한 생각을 반복하다 보니, 내 기억이 맞기는 한 것인가, 스스로 조작을 하지는 않았는가, 감정은?, 망상처럼 혼자서 지지고 볶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기억의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어서, 평소 연락을 잘 하지 않았지만, 몇 명의 친구들에게 나의 학창시절에 대해 물어보았다. ‘아주 빛나는 아이’, ‘야무지다’, ‘허투루지 않다’, ‘목표가 있었다.’라는 답을 해주었다. 대학 친구 중에서 이렇게 말해 주는 이가 있었다. ‘밝고 환하여 가까이 가기 어려운 친구였는데, 우연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고, 그 때 생각이 많고 외로운 아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대화를 통해 알게 된 너의 모습이 정말 달라 놀랬다’라고.((이 우울의 정체는? 생활 고민이 아니라 실존적 고민?)) 그리고 내가 아웃사이더 클럽을 만들어 무리 속에 있지만 고독을 느꼈던 3인이 활동했다고 했다.
결론은, 은따라고 확신할 판단 근거는 없다. 하지만 대학 친구가 이야기 해준 ‘외로운 아이’라는 말에서 무릎을 쳤다. 10대의 나는 은따라기 보다, 고독과 외로움을 느꼈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무리 속으로 들어가려 했고, 인정을 받고 싶었고, 사랑을 받고 싶어했던 아이였던 것 같다. 내향적인 기질의 아이였지만, 밝고 명랑해야 친구들이 좋아 할 것 같아 과장된 억지 행동을 하기도 했다. 무리 속에 있어도 교감 없이 그냥 뭉쳐져 있다는 느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앤과 다이애나가 보여주었던 우정을 희망했다. 하지만 우정을 나누기에 나는 준비가 되지 않은 아이였다.
❖ 실존철학 상담사로서 해 주고 싶은 말
‘외로움’, ‘고독’과 관련되어 이야기 해 주고 싶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도구로 이용하여,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게 가치 있고 필요한 일임을 받아 들일 수 있게 돕고 싶다. 이 책으로 하이데거의 개념을 설명할 수 있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에 나온 내용을 언급할 수 있다. 그리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 외로움이나 고독을 느낄 수 있지만, 변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시간임을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실존적 존재다. 실존이라는 것은 어느 누가 아니라 내가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살아내는 나는 이 우주 속에 고유한 개별자다. 각자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우리는,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 자체가 어쩔 수 없이 고독한 존재가 아닐까. 그렇지만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고 싶지 않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고 싶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싶고, 사랑도 받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일 것이다. 이런 마음이 크면 클수록 고독감이 더 커질테고, 허탈감마저 들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있어야 한다. 나 자신도 인정할 수 있는 ‘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을 고독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외롭거나 고독하거나, 그래서 마음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면(불안), 이것은 어떤 신호일수가 있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진짜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신호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비본래성’이라고 불렀다. 이 신호는 진짜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알려 주는 것이다. 진짜 모습을 살아가는 것을 그는 또 ‘본래성’이라고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그대로 쫓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신호다.
네가 겪고 있는 이 시기(청소년 시기)는 자기(나)를 발견하고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시기다. 나를 온전히 만나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움과 고독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참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감사하게 여기며.
※ 함께 책을 읽으며, 애벌레가 비본래성에서 벗어나 본래성을 향해 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고독한 시간을 견뎌내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 본래의 모습이었을 때 진정한 사랑(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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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 애벌레는 먹고 자라는 것보다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길을 떠났다. 그 길 위에서 애벌레 기둥을 보았다. 애벌레들은 구름에 가려진 기둥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기막힌 무엇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기둥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애벌레를 밟고 누르며 꼭대기로 오르고 있었다(das Man, Mitwelt, Verfallen, 호기심, Uneigentlichkeit).
어느 날 불안한 그림자가 그(줄무늬 애벌레)를 괴롭혔다. “꼭대기엔 무엇이 있는 걸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거지?”(불안, 개시성, 양심의 부름).
그는 노랑 애벌레를 만나서 속마음을 서로 주고 받았고, 이렇게 대화를 나눈 그녀를 밟고 올라설 수 없었다.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와 기어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결의, 결단). 땅으로 내려와 서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줄무늬 애벌레는 또 다시 더 나은 생활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로 가려 했다. 노랑 애벌레는 온갖 애를 써 오를 만큼 그 꼭대기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기어다니는 생활에 만족하지 않아 오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확신 없이 행동하는 것보다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의 꼭대기를 향해 갔다.
노랑 애벌레도 ‘내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을 하며 방황을 하기 시작했고, 방황의 길에서 늙은 애벌레(누에로 변신하고 있는)를 만나 ‘나비’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은 네가 앞으로 될 그 무엇이란다. 그것은 아름다운 두 날개로 날아다니고 또 하늘과 땅을 연결시킨단다. 꽃의 달콤한 이슬을 마시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전해 주기도 하지.”
“애벌레이기를 포기할 만큼 날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해.”
“마치 겉으로는 죽는 것 같지만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 남는 거란다. 삶이 네 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라, 변하는 것이지. 나비가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다른 애벌레들과는 다르지 않겠니.”
“시간이 조금 걸릴 따름이란다.”(고독, 인내의 시간, 용기)
→ 나의 참모습(본래성)을 만나기 위해서는 혼자서 견뎌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독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한 마리의 나비가 되면 참된 사랑을 나눌 수 있단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그런 사랑 말이야. 애벌레들이 할 수 있는 포옹의 사랑보다 훨씬 훌륭한 거지.”(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노랑 애벌레는 고치 속에 갇히게 되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지고, 날개를 가진 생명체가 된다는 게 믿겨지지 않으면서도, 나비가 되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용기).
노랑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기둥을 오르고 있는 줄무늬 애벌레를 찾아 갔고, 그는 그녀의 도움으로 나비가 되었다.
참고)
책-꽃들에게 희망을
블로그; [알음앓이]하는 사람들의 공간, 어린이 철학48. 너와 나의 외로움
(https://blog.naver.com/saiculture/222972496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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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1년 동안 틈틈이 훈련 받은 실존철학적 사유방식으로 이 글을 과제수행 ‘의도’에서 차분히 정리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훌륭한 실존적 자기분석을 이용한 철학상담 결과물이 되었다. 이제 이런 방법을 한 걸음 한 걸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