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을 읽다
綠雲 김정옥
큰 창 사각 테두리 안에 풍경을 담았다. 줄잡아 3, 40년은 됨직한 주택들이 울레줄레 들어찼다. 그 뒤쪽으로는 창문을 여러 개 단 키 큰 연립주택도 보인다. 앞쪽엔 아롱이다롱이 제각각 다른 옷을 입은 집들이 옆으로 길게 늘어서 한길을 바라본다. 마치 큰길 쪽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카메라 줌을 당기듯 바짝 풍경을 당겼다. 조붓한 골목을 사이에 둔 집 두 채가 눈에 띈다. 두 집 모두 해 뜨는 곳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동향집이다. 한 귀퉁이가 벌겋게 녹이 슨 두 쪽짜리 철대문, 출입문 하나 달랑 딸린 오뚝한 옥탑방, 두 집 구조가 엇비슷하다. 하지만 두 집의 표정은 정반대다. 한 집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얼룩덜룩하다. 벽돌 사이사이에는 검은 곰팡이가 피어 칙칙하고 어두워 음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사람의 따뜻한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옆집은 통유리창 앞 널찍한 선반에 피튜니아꽃이 화사하다. 그 옆으로 올망졸망한 다육이가 옛집 댓돌 위에 놓인 코고무신처럼 정답다. 게다가 하얀 불두화가 담장 너머 세상을 기웃거리고 담벼락 아래에 있는 살피꽃밭엔 빨간 방울토마토가 조롱조롱 매달렸다.
자연의 상생과 어울림이 아늑하게 느껴진다. 오글오글 살아 숨 쉬는 생명이 깃든 곳에 은빛 햇살이 속살거린다. 나도 그 풍경 속으로 풍덩 빠져든다.
발코니에 자줏빛 사랑초가 하늘거리는 아침이다. 텔레비전 한 프로그램에 강형원 기자가 초대 손님으로 나왔다. 방북 취재 당시 찍은 진달래꽃 사진이 그의 인생 사진이란다. 그 사진은 진달래꽃 뒤로 총을 든 감시병이 노동자를 감시하고 있었다. 패널이 ‘진달래꽃을 찍으려고 했는데 뒤에 배경이 찍힌 건지, 뒤에 있는 상황을 찍으려는데 진달래가 찍힌 건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는 생뚱맞게 “시각적 문해력이지요.”라고 한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뜨악해졌다. 그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흐드러진 진달래꽃보다는 북한 노동자의 고단함이 먼저 읽혔다. 하루하루가 힘든 북한 노동자의 삶이 애달팠다.
시각적 문해력視覺的 文解力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어느새 내 마음속에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 그는 그 말을 왜 꺼냈을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세계를 보라는 뜻일 게다. 눈에 보이는 것조차 잘 보지 못하는 내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에 교직에 있을 때 일이다. 수업을 시작하면서 교과서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자기 느낌이나 겪은 일을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글을 읽기 전에 이미지로 먼저 상상해 보자는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재잘거렸다. 애기똥풀 삽화 하나로 ‘과학 백과사전’이 펼쳐지고, 기저귀 찬 막냇동생도 불려 나오고, 엄마 아빠 비밀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술술 나왔다. 교과서 밖의 세상으로 한없이 뻗어나가는 아이들의 맑은 세계가 텅 비었던 그릇에 하나씩 차올랐다.
세상의 이미지를 읽고 풀이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자연에 담긴 신의 오묘한 섭리를 알기에도 턱없이 부족하고, 끝이 없는 사물의 본질을 헤아려 읽는 것도 힘에 겹다. 아이처럼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넓은 세상을 읽을 때 내 세계가 더 넓어지고 남을 포용하는 마음도 커지리라.
고사성어에 ’일엽장목一葉障目’이라는 말이 있다, 나뭇잎으로 눈을 가리고 이것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먼저 눈에 달라붙은 나뭇잎과 귀를 막은 콩알을 확실히 떼어내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삶의 풍경을 당겨서 가까이 읽기도 하고, 대여섯 걸음 물러서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도 헤아려 본다면 세상사 모든 일이 구수하고 푸근해지지 않을까.
도롯가에 고개를 꼿꼿하게 곧추세운 강아지풀을 만났다. 한여름 이글거리는 태양에도 끄떡없이 쌩쌩하게 버티며 강단지게 살아내는 것이 대견하다. 기껏 살아봐야 고작 일 년, 그마저 날씨가 서늘해지면 별수 없이 스러지는 삶인데도 꿋꿋하게 존재를 드러낸다. 강아지풀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로 자기만의 삶에 도취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세상을 더 멀리 보기 위해 심지를 곧게 곧추세우는 것인가. 나는 또 그들의 풍경을 읽는다.
누군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내 삶을 본다면 어떻게 느껴질까. 옹이가 박혀 거북이 등딱지처럼 갈라진 해묵은 노송으로 비치려나. 실금 잔뜩 낀 먹다 만 장항아리로 보이는 건 아닐는지. 가을 들녘 멍석에 널린 탱탱하고 맵짜한 고추로 읽혔으면 좋으련만.
글을 쓰는 것 또한 우리 삶의 풍경을 읽는 것이리라. 솜털이 보송보송한 초등학생 한 무리가 재갈대며 지나간다. 노을 지는 발코니에서 남편이 멀거니 밖을 내다본다. 등 굽은 그의 모습이 애잔하다.
나는 오늘도 찬찬히 일상을 읽어나간다.
첫댓글 회장님 좋은 작품 감상 잘 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삶의 풍경을 읽는 것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도, 내 마음의 풍경도 그려내는 일이네요.^^
아이처럼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바른 '시각적 문해력'으로 풍경을깊게 음미하는 것 또한 작가의 덕목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고미화 국장님,
졸필을 읽어주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김정옥 선생님의 삶을 조명해봅니다.
쉽지 않았을 젊은 날의 초상은 이제 흔적없이 지워지고 지금의 모습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찬 겨울을 이겨낸 꽃들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환한 미소와 친절함이 몸에 배고 지칠줄 모르는 노력과 열정이 모범이 되는 그런 사람입니다.
글이 삶의 풍경이라면 선생님의 글은 화병의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너무나 과한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말씀으로 응원해주시는 금철 샘이 한층 우러러 보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