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산중(밤)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며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몰아쳐댄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거세게 내리고 있다. 두한과 정진영이 산길을 정신없이 오르고 있다.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며 뒤쳐져 따라오던 정진영이 발을 헛디디며 비탈로 굴러 떨어진다.
두한 진영아.... 진영아....!
정진영 ........괜찮아.
두한 걸을 수 있겠어..?
정진영 (끄덕이며) 이제 얼마나 남았니...?
두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암자가 나올 거야.
정진영 오히려 내가 짐만 되는구나.. 미안하다, 두한아..(일어선다)
두한 정말 괜찮겠어..?
정진영 응..
그들 다시 산을 오르는데 두한이 걱정이 되는 듯 산 아래를 되돌아본다.
정진영 너무 걱정하지마, 두한아. 영태 형님께서 알아서 잘 하실 거야.
두한 ............가자.
그들 그렇게 다시 산길을 오른다.
# 2 종로 거리
이곳에도 빗줄기가 극성스럽다. 우비와 판초를 뒤집어 쓴 헌병 중대가 각 요소요소에 배치되고 있다. 두 눈을 부릅뜬 헌병대 장교가 명령을 하달한다.
장교 조금이라도 거동이 수상쩍은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저항하면 총을 사용해도 좋다. 단 한 놈도 놓쳐선 안 된다. 종로를 샅샅이 뒤져라!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헌병들이 골목골목으로 흩어진다. 그 한쪽에 서있는 순사들 옆으로 우산을 받쳐든 마루오까가 순사1과 다가온다.
마루오까 한밤중에 무슨 일인가?
순사2 (고개 숙이며) 오셨습니까, 마루오까 경부님?
마루오까 무슨 일인가 묻지 않나?
순사2 헌병대 장교들이 술집에서 종로의 주먹패들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마루오까 뭐라? 헌병들이 폭행을 당해? 종로의 주먹패들에게?
순사2 하이.. 저희들도 방금 도착해서 자세한 사항은 모르겠습니다만 헌병대 간부들에게 말을 걸기가 무서울 정도로 상황이 심각합니다.
마루오까 그래....?
갑자기 일대가 소란스러워지며 헌병들이 술집에서 건달들을 마구잡이로 끌어 내온다. 마루오까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지켜만 보고 있다.
# 3 우미관 사무실
양코가 졸린 듯 하품을 늘어지게 한다. 김무옥과, 문영철, 양코, 번개, 와싱턴이 모여 앉아 있다.
문영철 (시계를 보며) 술자리가 길어지는 모양인데...?
번개 종로회관에도 안 계시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디들을 가신지 모르겠습니다.
와싱턴 그러게 말일세.. 어디를 가면 간다고 이야기나 해줄 것이지...
문영철 어떻게 할까? 우리 먼저 들어갈까?
김무옥 그러지 뭐.. 어차피 늦으면 관철여관으로들 오겄제.. 일어들 나자..
그들 그렇게 일어나려는데 삼수와 털보가 급히 뛰어들어온다.
삼수 형님들... 크, 큰일났습니다. 빨리 피하십쇼.
모두들 ..............?
와싱턴 피, 피하라니?
김무옥 밑도 끝도 없이 고것이 뭔 말이여?
삼수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헌병하구 순사들이... 닥치는 대로 우리 애들을 끌고 가고 있습니다.
김무옥 뭣이여?
문영철 갑자기 왜? 우리 애들이 무슨 사고라도 쳤냐?
털보 아닙니다. 그냥 이유도 없이.. 어쨌든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어서요.
문영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줄 모르겠구나.. 임마, 잘못한 것두 없는데 왜 도망을 가? 나가보자.. 왜 그러는지..
그때 헌병들과 순사들이 우르르 밀어닥친다. 당황하는 종로패들. 그러나 김무옥과 문영철만은 침착하다.
문영철 무슨 일입니까?
장교 (권총을 휘두르며) 모조리 끌어내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헌병들과 순사들이 달려든다. 그러나 김무옥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저항한다.
김무옥 놔, 이거 놓치 못혀?
문영철 (뿌리치며)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이유가 뭡니까?
장교 (다가가 총을 겨누며) 이유? 그건 가보면 알아...
문영철 지금 말씀해 주십쇼.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말입니다.
장교 건방진 놈....
헌병 장교가 권총으로 문영철의 안면을 가격한다. 이어 헌병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진다. 총개머리 판으로 사정없이 우미관패들을 내리찍는 헌병들..
장교 모두 끌고 가!
헌병들과 순사들이 번개, 와싱턴, 삼수들을 끌고 나간다. 김무옥, 문영철은 아직도 맞고 있다.
# 4 명월관 외경
# 5 동 어느 방
문 밖에서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김영태가 초조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다. 술상은 없다. 잠시 후 설향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그 앞에 앉는다. 김영태가 담뱃불을 짓눌러 끈다.
설향 저를 급히 찾으셨다구요?
김영태 예..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일단 내 말부터 들어주십쇼. 지금 두한이가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설향 ..................?
김영태 헌병대와 경찰이 두한이를 체포하기 위해 총동원됐습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쫓기고 있고, 붙잡히면 당분간은 빠져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설향 ....어, 어쩌다가......
김영태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누군가는 두한이를 도와야 하는데 설향씨 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설향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길래요...?
김영태 매우 심각합니다. 헌병대와 관련된 일이라 이번에 잡히게 되면.....아무튼 설향씨가 좀 도와줘야겠습니다.
설향 말씀하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김영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두한이에게 지금부터 제가하는 말을 전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설향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김영태 설향씨도 한 번 가본 적이 있을 겁니다. 예전에 구마적 부하들에게 쫓겨가 숨어 지냈던 그 암자 말입니다.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설향 예.. 그곳은 안전한가요?
김영태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그곳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겁니다.
설향 그러면.............?
김영태 두한이는 더 이상 경성에 있을 수 없습니다. 경성, 아니 조선 땅을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설향 ....................?
김영태 만주나 중국으로 떠나라고 하십시오. 되도록 멀리, 일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말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종로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하십시오. 절대 돌아오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설향은 두려운 듯 덜덜 떨고 있다.
# 6 종로서 고등계
미와가 부하 형사들에게 보고를 받고 있다. 밖에서 들어온 듯 형사들의 옷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미와 긴또깡이 또 사고를 쳤다고?
문달영 예, 경부님.. 겁도 없이 헌병대 장교들에게 주먹을 휘두른 모양입니다. 폭행 당한 장교들이 거의 초죽음이 됐다고 합니다.
미와 뭐라, 헌병 장교들이 초죽음 돼? 그래서, 그래서 긴또깡을 체포했나?
김태서 사건 직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제 놈도 막상 일을 저지르고 보니 두려웠겠지요.
미와 도망을 갔다?
김태서 그래서 지금 헌병대 사령부의 병력들과 우리 종로서의 사법계, 외근계 형사들이 총동원되어 긴또깡을 찾고 있습니다.
미와 그래?
오무라 그리고 사건 현장에 긴또깡 말고도 서너 명이 더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 황병관이라는 유명한 조선인 레슬링 선수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미와 황병관?
오무라 하이. 얼마 전에 레슬링 동양선수권을 제패한 자입니다. 그 자의 신원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 워낙 알려진 자라서 말입니다. 그 자를 체포하면 사건의 윤곽이 보다 확실하게 드러날 것 같습니다.
미와 중요한 건 긴또깡이 아닌가?
오무라 긴또깡의 소재 역시, 지금 그 녀석의 부하들을 남김 없이 잡아들이고 있으니 곧 밝혀지게 되겠지요.
미와 이거야.. 긴또깡 이 녀석,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을 떨더니만 사고를 쳐도 아주 제대로 쳤어..
문달영 그러게 말입니다, 경부님.. 그 동안 운이 좋아 죽을 고비를 잘도 넘겼는데 이번에는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것입니다.
미와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지.. 헌병대는 우리 종로서와는 또 다른 곳이니까.. 하지만... 워낙에 생명력이 끈질긴 놈이 되어놔서 말이야..
미와의 그 모습에서..
# 7 우미관 앞
장대비가 쏟아지는 극장 간판 아래, 헌병대의 병력들과 종로서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다. 김영태가 멀리서 잠시 지켜보다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우미관으로 다가간다.
헌병장교 뭔가?
김영태 안에 볼일이 있습니다.
헌병장교 누군지 신분을 밝혀라.
김영태 김영태라고 합니다.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
헌병장교 여기 우미관에서 말인가?
김영태 그렇소.
헌병 장교는 의심스러운 듯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는데, 그 옆에 서있던 종로서 사볍계 형사 하나가 다가와 헌병장교에게 조용히 이야기한다.
형사 이 자는 범인으로 지목된 긴또깡의 심복입니다.
헌병장교 뭐라, 긴또깡의 심복?
형사 ...(끄덕인다)...
김영태 ...................
헌병장교 드디어 물건다운 놈이 걸려들었군. 이 자를 연행하라.
두 명의 헌병이 달려들며 김영태 양쪽으로 팔짱을 낀다. 김영태는 이미 예상한 듯 순순히 그들을 따른다.
# 8 남산 헌병대 사령부 외경(밤)
음산한 그 모습 위로 찢어질 듯 처절한 비명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다.
# 9 동 헌병대 고문실
문영철이 팔이 뒤로 묶인 채 한쪽 구석에 축 늘어져 있고, 물 고문을 당하는 김무옥이 입과 코에서 물을 뿜어내며 기침을 해댄다.
취조관 다시 한 번 묻겠다. 긴또깡은 어디 있지? 네 두목 긴또깡 말이다.
김무옥 여... 영문도 모르고....끌려왔는디... 그걸 워떻게 알겄습니까?
취조관 아직도 모르겠다? 너 여기서 살아나가기 싫은 모양이구나?
김무옥 참말로... 모른다니께 그러시오. 생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지...난 정말 모르요..
취조관 그래.. 그렇다면 생각이 나게 해주지.. 다시 시작해!
취조관의 명령에 따라 헌병대원들이 김무옥의 머리를 욕조 속으로 처박는다. 김무옥의 두 다리가 발버둥친다.
# 10 동 다른 고문실
와싱턴이 천장에 매달려 채찍으로 얻어맞고 있다. 웃통을 벗어제낀 건장한 헌병대원이 때리고 있다. 그 한쪽에 번개와 양코가 무릎을 꿇고 잔뜩 겁에 질려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보지도 못하고 있다. 와싱턴이 비명을 지르다가 그예 축 늘어지고 만다.
취조관 데려다 가둬!
헌병 하이..
헌병 둘이 와싱턴을 질질 끌고 그 방을 나간다.
취조관 다음..
그러자 번개와 양코의 가슴이 철렁하다. 헌병대원들이 번개를 일으켜 세워 천장에 매단다.
번개 사, 살려주십쇼... 전 아...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제발... 살려주십쇼..
하지만 헌병대원의 채찍은 용서가 없다. 번개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한다. 양코는 덜덜 떨기만 하고 있다.
취조관 김두한 어딨지?
번개 모.... 모릅니다.
헌병대원의 채찍이 다시 번개에게 날아든다.
취조관 이제 생각이 좀 나나?
번개 저, 정말.. 모... 모릅니다.
다시 채찍이 날아든다. 번개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해 버린다. 옆에 있던 다른 헌병들이 번개의 얼굴에 물을 뿌린다. 번개가 다시 희미하게 눈을 뜬다.
취조관 (번개의 서류를 보며) 너.. 아주 질이 안 좋은 놈이로구나. 아직 어린놈이 소매치기 전과가 무려 8범이야.. 너 같은 놈은 세상에 있어선 안될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번개 사......살려........
취조관 살려달라구?
번개 ............(고개만 끄덕인다)
취조관 하지만 이미 늦었어. 너 같은 쓰레기에게 난 두 번의 기회를 주었어. 널 죽이면.....(양코를 가리키며) .....저 녀석이 알아서 불겠지..
번개 .....그.. 그게 무슨....?
취조관이 턱짓을 하면 웃통을 벗은 헌병대원이 사정없이 번개를 후려친다. 번개가 죽을 듯이 비명을 지른다. 채찍질은 한동안 계속되고.... 그 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양코의 바지가랑이가 축축이 젖어온다. 그 공포 어린 양코의 모습에서...
# 11 헌병대 취조실
얼굴에 칼자국이 선명한 헌병대 대위와 김영태가 마주해 있다. 잠시 후 헌병들이 두한과 황병관들이 술을 마셨던 그 곳의 웨이터를 데리고 들어온다.
대위 잘 봐라. 이 자가 함께 있었나?
웨이터 ................?
김영태 ..................
대위 맞나?
웨이터 예...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인 건 맞습니다만...
대위 그런데...........?
웨이터 싸움을 했던 당사자는 아닙니다.
대위 같이 있었던 자인 건 분명하겠지?
웨이터 예.
대위 됐다. 그만 데려가라.
헌병들이 웨이터를 밖으로 데려나가면 대위가 김영태를 노려보며 묻는다.
대위 의외로구나.. 왜 도망을 가지 않았지?
김영태 도망갈 이유가 없었소.
대위 그래? 하지만 잘못 생각했다. 폭행을 방조한 것도 직접 폭행에 가담한 죄에 못지가 않아..
김영태 .................
대위 하지만 우리에게 순순히 협조를 주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 긴또깡은 어차피 잡히게 돼 있어. 시간을 오래 끌수록 그 자에게 더욱 불리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긴또깡... 어디에 있지?
김영태 ......................
대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고 있어. 그렇지?
김영태 모릅니다.
대위 몰라? 너는 긴또깡과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김영태 그 땐 워낙 경황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지자고만 했소.
대위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김영태 사실이오.
대위 (도리질을 치고는) 좋아.. 의리를 지킬 시간쯤은 내 이해하도록 하지. 그럼 시작해 볼까?
김영태 ....................
대위는 양쪽에 서 있는 헌병대원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동시에 취조관들이 한바탕 김영태를 두들겨 팬다. 대위가 여유 있게 담배에 불을 붙인다.
# 12 암자 외경
# 13 동 어느 방
주지는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두한 또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스님.
주지 허허허. 아무래도 소승과 처사님은 인연이 깊은 듯 싶소. 아무쪼록 계시는 동안 편히 지내도록 하시구려.
정진영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
주지 그럼 쉬시구려.
주지가 일어나 나가면 두한과 정진영 일어나 합장한다.
정진영 그래도 경성 안에 이렇게 숨을 곳이 있어서 다행이야.
두한 영태 형님 말씀대로 일단 피하기는 했지만 마음이 편치가 않아. 혹시 나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영태 형님이나 황병관이란 사람도 걱정이고...
정진영 불려가 고생은 좀 하겠지만 별 일이야 있겠니? 잘한 거야.. 거기 그대로 있었다간 지금쯤 넌 이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그리고 두한이 네가 아니었으면 황병관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을 거야.
두한 .........................
정진영 두한아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거 아니잖아. 다 잘 될 거야. 일단은 아무 생각 말고 쉬어.
자책과 걱정스런 두한의 얼굴에서.....
# 14 혼마찌깡 외경(아침)
# 15 동 거실
하야시와 시바루, 미우라가 모여 있다.
하야시 종로가 쑥밭이 됐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거늘... 김두한은 매사 그런 식이란 말이야..
미우라 그게 김두한 오야붕의 성품이 아니겠습니까?
하야시 나 역시 그런 김두한의 강인함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 하지만 한 조직의 오야붕은 동시에 유연함도 갖춰야 한다. 세찬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갈대와 같은 유연함 말이야..
미우라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야시 어쨌거나 김두한이 참으로 안됐군... 우리가 어제 조금만 신경을 써줬어도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유감이구만..
미우라 그건 김두한 오야붕이 우리의 호의를 불편해 할까봐 오야붕께서 배려해 주신 것이 아닙니까?
하야시 ...........
시바루 지금이라도 오야붕께서 도와주십시오. 헌병대 장교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다면 김두한은 절대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야시 김두한을 도와달라? 나미꼬와 함께 지내더니 시바루 자네도 김두한의 추종자가 되었구나.
시바루 전 김두한이 아무 이유 없이 그들과 싸웠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로와 화해를 하신 이상 그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야시 종로에서 정식으로 요청이 온다면 고려해 볼 수는 있겠지.. 하지만 헌병대라면 나 역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야.
시바루 ..................
하야시 ..................
# 16 헌병대 고문실
김영태가 피투성이가 된 채 의자에 묶여 기절해 있다. 문이 열리고 김영태를 취조한 헌병대 대위가 들어온다.
대위 깨워...
헌병대원 하이..
헌병대원들이 김영태의 몸에 찬물을 끼얹는다. 김영태가 희미하게 의식을 찾으며 신음한다.
대위 정신이 드나?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겠나?
김영태 .................
대위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하는 게야. 그만큼 했으면 너의 오야붕에 대한 의리는 지킬 만큼 지킨 것이 아닌가?
김영태 모....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대위 아니야, 넌 분명히 알고 있어.
김영태 모르오..
대위 난 그렇게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야. 입을 열지 않는다면 너는 물론이고 헌병대에 잡혀온 너희 패거리들은 단 한 놈도 살아 나가지 못해.
김영태 ...................
대위 두목의 잘못 때문에 너희들이 죽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김영태 며... 몇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요. 나는 오야붕이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하오.
대위 그 충성심 하나는 알아줘야겠구나. 하지만 긴또깡은 반드시 잡히게 돼 있다. 쓸데없는 만용은 이제 그만 부리는 것이 좋을 거야.
김영태 정말.... 모르오.....
대위 어쩔 수가 없구만. 좀 더 강도를 높여라.
김영태 하이.
헌병대들이 다시 전기고문을 시작한다. 김영태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
# 17 암자 마당
비는 그쳤지만 아직도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하다. 대웅전에서 주지의 염불소리가 은은히 새어나오고 있다. 두한은 생각에 잠긴 채 탑 주위를 계속 돌고 있다. 한쪽 툇마루에 앉아 그런 두한을 쳐다보던 정진영이 다가온다.
정진영 곧 소식이 올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두한 아니야... 뭔가 일이 잘못된 거야.. 아직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영태 형님한테 일이 생긴 거야.
정진영 속단하기는 아직 일러. 형님께서도 뭔가 생각이 있으실 거야. 곧 연락이 올 거야.
그러나 두한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듯 안절부절이다. 그때 가까이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온다. 두한과 정진영은 긴장한 채, 암자로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본다.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설향이 들어선다.
정진영 저기 설향씨 아니냐?
두한 .................
설향 두한씨...? (다가와 글썽이며) 어떻게 되신 거예요? 몸은 괜찮으시요?
두한 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설향 김영태씨한테... 이야기를 들었어요..
두한 영태 형님은 무사합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설향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저와 만나고 어디론가 가셨거든요..
두한 ....................
정진영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죠. 두한아...?
두한 ....................
# 18 동 방안
두한과 정진영, 그리고 설향이 마주해 있다.
설향 경성을 떠나시라고 하셨어요. 만주나 중국으로 가시는 게 좋겠다고 하시면서... 절대 종로에 돌아오셔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어요.
두한 ....................
설향 두한씨..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하셔야 해요.
정진영 내 생각도 그래, 두한아.. 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 밖에 없는 것 같다.
두한 ..................
설향 두한씨............
두한 꼭 그렇게 해야 될까?
설향 아니에요. 그건 사정을 모르셔서 하는 말씀이에요. 지금 붙잡히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두한 종로를 버린다는 건 나에겐 죽음 같은 일입니다.
설향 하지만...
정진영 두한아,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야만 해. 어차피 헌병대에 붙들려 가면 종로도 끝이야..
두한 ...................
정진영 영태 형님 말씀대로 하자, 두한아.
두한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고민이다.
두한 아이들은 모두들 무사합니까?
설향 서.... 서둘러.... 오느라 미처...
두한 ..................
설향 두한씨... 절대 다른 생각하시면 안돼요. 지금은 당장 괴롭겠지만 후일을 기약하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실 수 있을 거예요. 예, 두한씨...?
두한 .....................
# 19 암자 외경(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유난히 쓸쓸하다.
# 20 동 방안
두한은 열어놓은 방문에 기댄 채, 깊은 수심에 잠겨 있다. 정진영은 이부자리를 깔며 그런 두한을 조심스레 살핀다.
두한 아무래도 종로에 다녀와야겠다.
정진영 무슨 소리야?
두한 영태 형님을 만나봐야겠어. 중국으로 떠나는 거 영태 형님과 좀 더 상의를 해본 후에 결정하는 게 좋겠어.
정진영 그건 안돼. 지금 종로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잖아.
두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렇게 떠날 수는 없어.
정진영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 설향씨를 보내신 걸 보면 영태형님도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거야.. 종로에 간다 해도 만난다는 보장도 없는 거라구..
두한 영철이나 무옥이라도 만나봐야지.. 그래야 해..
정진영 안돼, 그건 절대 안돼. 두한이 넌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위험해. 정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다녀올게.
두한 위험하긴 너두 마찬가지야..
정진영 나는 괜찮아... 붙잡힌다 해도 조금만 고생하면 금방 나올 거야. 하지만 너는 경우가 달라.
두한 ...................
정진영 내가 다녀올게.. 가는 김에 최동열 아저씨도 한 번 만나봐야겠다.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너한테는 쉬운 일은 아니잖아?
두한 ....................
정진영 내게 맡겨, 두한아. 내가 다녀올게.
두한 .....................
# 21 카페 비너스
최동열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거푸 술잔을 들이킨다.
김이수 큰 일이구만.. 너무 큰 일이야... 두한이의 동료들이 모두 헌병대에 끌려갔다네.. 두한이가 참으로 걱정이구만...
임동호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일지도 모르네. 일본 군인들은 너무도 잔혹한 자들일세.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세균전에 대비해서 전쟁 포로나 조선인,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하네.. 참으로 끔찍한 일이지..
김이수 서, 설마......?
임동호 군의관으로 만주에 다녀온 동료로부터 은밀하게 전해들은 이야기일세. 그 내용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지 입에 올리기도 어렵구만..
최동열 .....................
임동호 소위 천황의 황군이라는 자들은 그런 자들이야. 두한이가 그런 자들에게 붙들리게 된다면 어떤 짓을 당하게 될지 몰라. 부디 잡히지 말아야 할텐데...
김이수 하지만 숨어 지내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나. 더구나 그 아이는 요시찰이기 때문에 종로 밖을 나가 본 적도 없으니...
임동호 이보게, 동열이 혹시라도 두한이와 연락이 닿으면 무조건 도망치라고 하게. 일본군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말이야.
최동열 ..............글쎄..
김이수 글쎄라니......? 무슨 대답이 그런가?
최동열 두한이가 어떤 아이인지, 그 아이 성품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임동호 ..................?
최동열 동료들이 저 지경이 된 걸 안다면 두한인 도망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걸세. 그래서 더욱 걱정이 되는 거야.
김이수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구먼.
최동열 전시체제가 극에 달한 이때에.... 하필이면 왜 이런 때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구만...
최동열의 그 한숨에서..
# 22 종로서 고등계
미와는 신문을 훑어보며 유쾌하게 웃고 있다.
미와 하하하.. 참으로 대단하구만... 역시 우리 대일본제국의 황군은 위대하단 말이야..
오무라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경부님?
미와 당연하지 않은가? 이것 좀 보게.. 우리 대일본제국의 군대가 저 대륙에서 불패의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는구만.. 그리고 불량선인들의 조선내 활동 또한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어.. 그러니 내가 왜 즐겁지 않겠는가? 응? 하하하하....
형사들 (함께 웃는다)...
미와 그건 그렇고..... 긴또깡에 관한 소식은 더 들어온 것이 없나?
오무라 아직까지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숨겨주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놈을 숨겨주는 걸 보면 조선인들은 도대체가 믿지 못할 족속들입니다.
미와 무슨 소리, 무슨 소리...... 다 그런 것은 아니지. (일어나 문달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충직한 조선인 형사들도 있지 않은가?
문달영 감사합니다, 미와 경부님
김태서 긴또깡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헌병대가 눈에 불을 켜고 놈의 행방을 쫓고 있으니 곧 붙잡힐 것입니다.
오무라 그렇습니다, 경부님. 요즘 그 때문에 남산 헌병대에서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미와 하여간 헌병대 이 친구들 못 말리겠다니까. 우리는 엄두도 못 낼 일이 아닌가? 대단해..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고 말이야..
# 23 남산 헌병대 사령부 복도
각 취조실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공포스럽다. 잔뜩 긴장된 표정의 황병관이 헌병들에게 이끌려 그곳으로 들어선다. 갑자기 어느 방문이 열리며 초죽음이 된 삼수가 질질 끌려나온다. 황병관은 두려움으로 몸이 굳는다. 헌병들 움츠려든 황병관을 억지로 끌고 간다.
# 24 동 취조실
황병관이 헌병들에 의해 강제로 의자에 앉혀진다. 등을 보이며 서있던 헌병 대위가 황병관에 관한 서류를 보며 돌아선다.
대위 네가 황병관인가?
황병관 그... 그렇습니다.
대위 .....레슬링 동양선수권을 제패해 국위를 선양한 공로가 있군. 맞나?
황병관 ...................
대위 (서류를 내려놓으며) 헌데 김두한과 같은 건달과는 왜 어울렸나?
황병관 어쩌다 보니....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위 그런데 왜 도망을 갔지?
황병관 그, 그건.....
대위 그 때는 순간적으로 두려워서 그랬다 치고... 나중에라도 자수를 했어야지..
황병관 사실은..... 이 모든 일이 저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칼을 빼들고 달려드는 헌병장교를 김두한이 막아주려다가....
대위 뭐라?
순간, 채찍이 황병관의 몸으로 날아든다. 황병관은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대위 건방진 녀석. 감히 그런 놈을 두둔하려는 것인가!
황병관 전....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대위 (채찍을 휘두르며) 닥쳐라! 다시 한 번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네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황병관 ..................
대위 국위를 선양한 공로가 없었다면 너 역시 긴또깡의 패거리들과 똑같이 대해주었을 것이다. 운이 좋은 줄 알란 말이다.
황병관은 헌병대 대위의 시퍼런 서슬에 질린 듯 부들부들 떤다.
# 25 동 고문실
잠시 고문이 멈춘 듯 헌병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와싱턴과 양코가 묶인 채, 간신히 눈만 뜨고 있고, 번개는 한쪽에 죽은 듯 쓰러져 있다.
양코 와, 와싱...턴 형님...... 살아 있소?
와싱턴 .....으...응.. 아이구... 차라리...죽는 게 낫지... 근데... 번개는 괜찮나? 왜... 말이 없어?
양코 번개야... 번개야...
번개 ...(대답이 없고)
양코 (퍼뜩 겁이나) 번개야? 니... 죽은 거여?
와싱턴 이봐, 번개...
양코 번개야.......(왈칵 눈물이 솟는데).....
번개 ........(신음)........왜.. 자꾸 불러...? 힘들어.. 죽겠는데..
양코 (안도의 한숨) 이 썩을 놈아... 죽은 줄 알았잖혀...
번개 나 죽으면... 좋지 뭐...
양코 그려.. 죽어라... 이 호랑말코 같은 자식아...
번개 ...(미소)...
와싱턴 괜찮나? 번개 자넨... 요령이 없어. 웬만큼 당하면 우리들처럼 기절한 척이라도 하란 말이야.
번개 나도.....그러고....싶은데......너무....아파서......너무...아파서......
양코 그려.. 나도 그려.. 그렇게 패는데.. 비명부터 나오지, 기절한 척이나 할 수 있겄냐?
와싱턴 미치겠구만.... 이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지.........이렇게 며칠만 있으면.... 우린 하나도 못 살아남을 텐데......알지도 못하는 두한 아우의 행적을 대라니....
양코 알면.... 불기라도 하겠다는 거요?
와싱턴 그렇다기 보단... 답답하니까....
양코 형님이 모르길.... 정말 다행이요.
와싱턴 ................
번개 아파.........너무 아파 죽겠어.....
와싱턴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구...
그때 다시 철문이 열리며 헌병들이 들어온다. 양코와 와싱턴의 눈이 공포로 굳으며 다시 기절한 척을 한다. 취조관이 잠시 세 사람을 둘러보더니 번개를 지목한다.
취조관 저 놈......데리고 나가.
다른 두 취조관이 번개를 양쪽에서 끌고 나간다. 다시 철문이 닫히면.......
와싱턴 어, 어딜 데려가는 거지?
양코 혹시......치료라도 해주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와싱턴 그러면 다행이지만...
양코 ................?
# 26 거지촌
거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이좋게 이를 잡아주는데 저만큼 모자를 꾹 눌러쓴 정진영이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정진영 잘 들 있었냐?
왕눈이 ........? 누구십니까?
정진영 (모자를 살짝 올리며) 나야.. 진영이..
왕눈이 지, 진영아...?
정진영 조용히...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왕눈이 그, 그래...
왕눈이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정진영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
# 27 동 방안
정진영과 왕눈이를 비롯한 거지들이 둘러앉아 있다.
왕눈이 다행이다, 진영아.. 넌 용케도 안 잡혀갔구나?
정진영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붙들려 갔어?
거지2 어휴, 말도 마세요. 우미관에 있는 형님들이란 형님들은 모두 붙잡혀 갔다구요.
정진영 뭐.........그럼 영태 형님도 체포되셨단 말이야?
거지2 벌써 붙들려 가셨을 걸요. 요즘엔 종로에 깔린 군인들 때문에 무서워서 동냥도 못 나갈 판이라니까요.
정진영 ...(아득하다)...
왕눈이 두한이는... 우리 대장은 무사하냐?
정진영 ...........(끄덕인다) 무사히 잘 있어...
왕눈이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거지2 지금 어디 계세요? 두한 대장 말이에요.
정진영 그건 알 거 없구.... 너희들이 나를 좀 도와줘야겠다.
왕눈이 우리가?
정진영 그래.... 일단.... (둘러보다가) 막철이 네가 줗겠다. 옷 좀 벗어봐라.
거지3 예? 오, 옷을 벗다니요?
정진영 (미소) 걱정마.. 내 옷 벗어 줄 테니까..
# 28 종로 거리
거지로 변장한 정진영이 거지패들과 함께 오고 있다. 거리는 총을 든 헌병들로 살풍경 하다. 정진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담벽에는 두한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전단이 붙어있다. 정진영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어디론가로 간다.
# 29 헌병대 다른 고문실
의자에 묶인 김영태는 완전히 상처투성이지만 그래도 의식만은 또렷해 보인다. 헌병대위가 어떤 의미에서인지 계속 김영태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 잠시후 두 헌병대가 번개를 데리고 들어온다. 김영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김영태 번개....?
번개 (겨우 쳐다보며) 여, 영태... 형님...
김영태 .................
대위 자.... 좀 쉬었으니 다시 시작해볼까? (채찍으로 김영태의 턱을 들어올리며) 아주 재미있는 구경을 하게 될 거야.
김영태 ....................?
대위 시작해...
대위의 명령이 떨어지자 헌병대들이 번개를 고문의자에 앉힌다. 번개는 공포에 질리고 김영태의 눈이 커진다.
김영태 지금 무엇을 하려는 거요? 이보시오?
대위 (영태의 뺨을 손등으로 치며) 잘 봐라.. 네 놈의 부하가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말이다.
번개 혀, 형님......?
김영태 ...(당황스럽다)...
대위 올려..
헌병대들이 전압 스위치를 올린다. 번개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김영태 그만, 그만....!
대위 (씩 웃으며 부하들에게 눈짓을 준다)... 이제 생각이 좀 달라지는가?
김영태 ..................
대위 좋아..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자 말해봐라..
김영태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
대위 지금 나하고 장난을 치자는 건가? 응? (번개에게) 그럼 넌... 넌 긴또깡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번개 모... 모릅니다... 정말입니다.
대위 그래.... 넌 정말 모르는 것 같구나. 하지만 말이다. 이자는 분명히 알고 있거든... 한데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아... 만약 저 세상으로 가더라도 내 원망은 하지 마라.. 알겠나?
번개 ...................?
헌병대들이 거의 초죽음이 되어있는 번개를 다시 고문하기 시작한다. 번개의 찢어질 듯한 비명에 김영태의 얼굴은 점점 혼란해지기 시작한다.
대위 이봐.... 저대로 놔두면 정말 죽을지도 몰라..
김영태 ...(괴롭다)...
잠시 고문이 멈춘다.
번개 ...........사....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대위 살려달라고 애원하질 않는가? 그저 죽는 것을 지켜만 볼 생각인가? 이것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 죽는단 말이다.
김영태 ................
번개 혀.... 형님....?
김영태 ...................
그러나 김영태는 끝내 번개를 외면해버리고 만다.
대위 지독한 놈... 더 올려.. 전압을 최대한 올려라.
다시 고문이 시작된다. 번개의 비명소리는 극에 달하고 있다. 대위의 표정은 여전히 김영태만을 노려보고 있다. 어느 순간 번개의 비명소리가 절정에서 멈추고 그만 숨을 거둔다. 김영태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스쳐지나간다.
김영태 버, 번개...?
대위 ..........? 어떻게 된 건가?
헌병대1 (확인해 보고는) 숨이... 끊어진 것 같습니다.
대위 죽었어? (약간은 낭패한 듯).........
김영태 ....죽일 놈들... 이런 천하의....
대위 (걷어차며) 닥치지 못해?
김영태가 저만큼 나가떨어진다.
대위 걱정할 것 없다. 사인은 적당히 둘러대고... 즉시 화장해버려. 그리고 다른 놈을 데려와.
헌병대 저 하지만............
대위 (미친 듯) 데려오라면 데려와! 저 놈이 보는 앞에서 다 죽여버리겠어. 어서 데려와..
헌병대 하이..
헌병대들이 나가고... 그러나 헌병 대위의 표정에 이제는 자신감이 없다.
김영태 (E)미안하다. 미안하다, 번개야. 날........날 원망해라. 저 세상에 만나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마. 미안하다, 번개야..
김영태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흐른다.
# 30 종로 거리
정진영과 거지패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헌병대 근처를 지나가려는데 헌병 하나가 그들 앞을 가로 막는다. 거지 아이들 모두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른다.
헌병 어휴 이 냄새.
정진영 헤헤헤. 죄송합니다.
헌병 어서 꺼져라.
정진영 예. 얘들아 가자.
정진영과 거지들은 서둘러 그곳을 통과해 사라진다.
# 31 잡지사
최동열이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다.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최동열 누구십니까? 들어오십쇼.
변장을 한 정진영이 안으로 들어온다.
최동열 누구.....?
정진영 (벙거지를 벗고) 접니다, 아저씨. 정진영입니다.
최동열 아니, 네가 여긴 어떻게......?
정진영 경계가 하도 삼엄해서 부득이 이런 복장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동열 그랬구나. (의자를 내주며) 이리 앉거라.
정진영 예..............(앉으면)
최동열 그래, 어쩐 일이냐? 상황은 대충 들어 알고 있다만... 다행히 넌 붙잡혀가지 않은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정진영 전 두한이와 함께 피해 있다가 잠시 종로에 나왔습니다.
최동열 그래?
정진영 두한이는 지금 경성 안에 있는 작은 암자에 숨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동열 무사하다니 다행이구나.
정진영 아저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상황을 아신다니 두한이 처지가 어떤지 따로 설명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최동열 말해보거라..
정진영 중국으로 피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최동열 중국으로? 그래.. 잘 생각했구나.. 알았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만주로 가는 차편과 통행증을 구해보마. 헌데 두한이가.... 가겠다고 하더냐?
정진영 사실.... 걱정입니다. 아직 두한이는 우리 동무들이 헌병대에 붙잡혀 간 걸 모르고 있습니다.
최동열 사정을 알게 된다면 가지 않는다고 할텐데...
정진영 ..................
최동열 네가 잘 설득해 보거라. 어떻게 해서든 사지를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요령껏 네가 알아서 설득을 해보거라.
정진영 예, 아저씨.
최동열 ...................
# 32 권번 방안
설향이 부지런히 두한의 옷가지를 개어 보따리에 싼다. 그녀의 손길이 어쩐지 성급하고 수선스럽다. 설향은 일을 얼추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 33 권번 마당
설향이 방에서 나와 급히 나가려는데, 넋이 나간 듯 아이란이 들어서고 있다.
설향 아이란아.......(다가가) 그래, 영철씨 면회는 하고 온 거야?
아이란은 고개만 가로젓는다.
설향 그럴 거라구 가지 말랬잖아?
아이란 (울 듯 설향에게 기대며) 설향아.......이제 어떡하니..? 우리 영철씨 어떡하냐구?
설향 ............영철씨 잘 견뎌낼 거야.. 걱정마, 아이란아...
아이란이 설향의 품에 묻혀 소리내어 운다. 설향도 눈물이 난다. 아이란을 감싸안아주는 설향의 모습에서...
# 34 어느 다방
변장한 정진영이 초조한 듯 앉아 기다리고 있다. 주위에 있는 손님들의 시선이 따갑다. 출입구로 설향이 급히 들어와 정진영에게 다가온다.
설향 죄송해요.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정진영 전... 혹시나 연락을 못 받으신 줄 알았습니다.
설향 위험할 텐데.......왜 내려오셨어요?
정진영 그렇게 됐습니다. 지금 최동열 기자님께 통행증을 부탁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늦어도 모레까지는 나올 것 같은데 설향씨가 그것을 좀 받아 주십사 해서 말입니다. 약도는 여기 있습니다.
종이 쪽지를 건넨다.
설향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암자로 올라갈 생각이었어요. 뒷일은 저한테 맡기시고 다신 내려오지 마세요.
정진영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설향 그리고 저...
정진영 ..........? 말씀하십쇼..
설향 진영씨는 현명한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른 분들 이야기는....
정진영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일어나시죠.
# 35 암자 마당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에서 두한이 한참동안 서성거리고 있다. 잠시 후 정진영이 들어선다.
두한 진영아.........?
정진영 기다리고 있었구나.
두한 어떻게 됐어? 영태 형님은 만나봤어?
정진영 .................
두한 못 만난 거야?
정진영 좀 앉자.
정진영은 방 앞 툇마루에 가 앉아 한참동안 말이 없다. 두한은 선 채로 정진영을 보고 있다.
두한 아이들 소식은 알아봤어?
정진영 최동열 아저씨께 통행증을 부탁해 놓았어. 아마 수일 내로 마련해 주실 거야.
두한 우리 애들은 어떻게 됐냐구?
정진영 두한아.......지금 종로뿐만 아니라 경성 전체가 난리야. 헌병대는 말할 것도 없고 경찰들까지 동원돼서 너를 찾고 있어.
두한 아이들은 어떻게 됐냐구 묻고 있잖아.
정진영 모두.........무사해.
두한 정말이야? (의심스러운 듯) 그럼 영태 형님도 만나 보았겠구나?
정진영 그... 그게....
두한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얘기 해.
정진영 저.. 정말이야.
두한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정진영 두한아.............
두한 넌 거짓말을 못해. 솔직히 말해. 모두 나 때문에 붙들려 간 거냐?
정진영 두한아.... 이제부터 독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당분간 종로는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 잊어버리라구.
두한 .....................
정진영 지금은 너 자신만을 생각해야 돼. 우미관 식구들 뿐 아니라 종로 사람들 모두가 두한이 네가 무사하기만 바란다구. 넌 그 기대를 져버려선 안돼.
두한 그랬구나... 그렇게 됐구나. 나 때문에...
정진영 두한아....
두한 ...................
# 36 혼마찌 외경(밤)
# 37 동 서재
묵묵히 미우라의 보고를 들은 하야시가 천천히 입을 뗀다.
하야시 아직.... 김두한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 말이군.
미우라 하이, 오야붕. 제 생각입니다만.... 벌써 경성을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야시 글쎄.....하지만 김두한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야. 어딘가 숨어 있으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겠지.
미우라 하지만 상황이 너무 어렵습니다. 벌써 우미관패 하나가 죽어 나갔다는 소문까지 도는 형편이고 보면, 사건 당사자인 김두한 오야붕은 돌아오는 그 즉시 즉결처분이 확실합니다.
하야시 ..................
미우라 아무리 김두한이라고 해도 도망칠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야시 나도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다.
시바루 ..................?
하야시 지금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사건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 때까지 버텨낼 인내력만 있다면 다시 종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미우라 ..................?
하야시 허허허.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군.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나도 김두한의 편이 되어버린 모양이야.
그들 ..................?
# 38 암자 어느 방(새벽)
두한이 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다. 옆으로 곤한 잠을 자는 정진영의 모습. 잠시 그런 정진영을 쳐다보던 두한은 일어나 상의를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완전히 닫혀지지 않은 문틈 사이로 바람이 들이치며 정진영의 얼굴을 스친다. 방문을 닫으려 일어난 정진영은 그제서야 두한이 자리에 없음을 알고 놀란다.
정진영 두한아......?
정진영은 그대로 밖으로 달려나간다.
# 39 산길
두한이 그 산길을 홀로 내려가고 있다. 그때 멀리에서 자신을 부르는 정진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갈등하던 두한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다시 한 걸음을 옮기는데, 어느새 정진영의 목소리는 너무도 가까워졌다. 두한은 가만히 뒤를 돌아본다. 숲을 헤치며 내려오던 정진영은 숨을 헐떡이며 두한과 마주본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뜨겁게 부딪친다.
정진영 두한아.... 안돼. 내려가면 안돼.
두한 ...................
정진영 이건 무모한 짓이야.. 그들은 널 죽일 거야.
두한 난 그 자들을 잘 알아. 아버지를 찾기 위해 죄 없는 우리 어머니를 처참하게 죽인 자들이야. 내가 가지 않으면 모두들 무사하지 못할 거야.
정진영 하지만 두한아...
두한 다른 방법은 없어. 내가 가야만 돼.
정진영 두한아?
두한은 몸을 돌려 산길을 내려간다. 정진영은 차마 그런 두한을 만류하지 못하고 아프게 보고만 있다.
# 40 종로 거리
두한이 그 거리로 모습을 드러낸다. 막 잠에서 깬 듯 상점 문을 열던 상인 하나가 두한을 보고는 의심하듯 자신의 눈을 비벼댄다. 두한은 옅은 안개가 드리워진 그 길로 사라져 간다.
상인 내.... 내가 헛것을 보았나? 아니겠지. 설마 김두한이는 아니겠지. (그래도 이상하다) 하지만 너무 닮았는걸...
상인은 두한이 사라진 그 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 41 남산 헌병대 사령부
두한이 천천히 정문을 향해 다가간다. 느슨하게 경계를 서던 헌병 보초가 그 갑작스런 인기척에 바짝 긴장하는 눈치다.
보초 뭔가? 어떻게 왔나?
두한 나 김두한이다.
보초 ................?
두한 너희 상관에게 종로의 김두한이 왔다고 전해라.
보초 김두한........?
두한 내 말 못 들었나?
보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두한 헌병대에서 날 찾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보초 ................?
두한 내가 바로 그 김두한이다.
보초 (그제서야) 기, 긴또깡?
경악하는 보초의 얼굴.. 그러나 두한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 모습에서...
# 42 동 헌병대 복도
지하에 있는 고문실 복도가 아니라 장교들이 머무는 관사의 복도다. 두한이 수갑을 찬 채 헌병들에 이끌려 오고 있다.
# 43 동 대좌실
헌병대 대좌가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밖에서 부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부관 (E)대좌님, 긴또깡이라는 자를 데려왔습니다.
대좌 들여보내.
부관, 두한을 데리고 들어온다. 대좌가 다가와 두한을 노려본다. 대좌의 부관이 허리춤의 권총께에 손을 가져간 채 극도로 두한을 경계하고 있다.
대좌 네가 바로 긴또깡인가?
두한 그렇소. 이제 내가 왔으니 내 부하들을 풀어주시오.
대좌 뭐라?
두한 내 부하들을 불어달라고 했소.
대좌 부하들을 풀어달라...?
두한 당신네 장교들을 그렇게 만든 건 바로 나요. 내가 왔으니 이제는 내 부하들을 석방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
대좌 하하하. 제 발로 이곳 헌병대까지 찾아 왔다기에 어떤 놈인가 궁금했는데, 역시 배짱 하나는 대단한 놈이로구나.
두한 ....................
대좌 재미있구만. 아주 재미있어. (무섭게) 너는 아직 네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두한 잘 알고 있소.
대좌 알고 있다고.....?
두한 그렇소.
대좌 여기가 바로 네가 죽을 자리라는 것도 말이냐?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두한 알고 있소.
대좌 ....................
두한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내 부하들은 풀어주시오. 이곳에 온 이유는 그것뿐이오. 부하들을 모두 풀어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