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절 후 제10주 -
브레이크가 고장 난 욕망열차
( 누가복음 12 : 13~21 )
Ⅰ. Story. 「 하치 이야기 」 국보문학 예화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변함없이 주인을 사랑하고 따르는 충성심을 개에게서 발견할 때마다 만족한 웃음을 드러냅니다. 그 맛에 사람들은 개를 키웁니다. 특히 진돗개 같은 명견은 한 사람을 자기 주인으로 인정하게 되면 죽을 때까지 그 마음을 절대로 바꾸지 않는 대단한 충성심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 시부야 역 앞에는 ‘충견 하치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개 동상으로 인하여 젊은이들은 그곳을 약속장소로 삼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하치는 일본의 천연기념물인 아키타견의 혈통을 갖고 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진돗개가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타견의 조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아키타견의 외형을 들여다보면 삼각형모양으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두 귀나 오른 쪽으로 말린 꼬리와 까만 주둥이와 코를 보면 영락없는 진돗개입니다. “하치의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고마바의 농학부교수였던 우에노가 출근을 할 때면, 항상 그 개는 주인의 뒤를 따라 나와 배웅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에노 교수가 퇴근을 할 때도 하치는 그 역 앞에서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우에노 교수와 하치는 남다른 우정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우에노 교수는 정말 개를 사랑했습니다. 하치를 목욕시켜서 옆자리에 눕히고 잠을 자기도 할 정도였기에 그의 부인은 그 개에게 심한 질투를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 부인의 눈에 하치는 정말 꼴도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우에노 교수가 강의를 마치고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하치는 약 9년8개월 동안이나 시부야 역 앞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에노 교수를 기다렸습니다. 이미 죽은 주인을 기다리는 그 개의 충성심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기금을 모아 하치의 동상을 시부야 역 앞에 세워주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주인 우에노 교수를 기다리던 충견 하치는 병에 걸려 13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사람들은 하치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식을 치른 후에 하치의 뼈 가루를 우에노 교수의 무덤 옆에 묻어주었습니다. 왼쪽 귀가 늘어지고 앞 다리가 유난히도 굵어보였던 까만 눈의 하치는 세상을 떠났지만, 가죽은 우에노 과학박물관에 기증되었고, 지금도 하치는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박제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Ⅱ.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께 충성하기보다 세상에 충성한 사람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형에게 불만이 많은 동생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말씀만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들 형제는 부모의 유산을 나누는 문제로 서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상속법은 장자는 유산에서 두 몫을 받게 되어 있었고, 나머지 형제들은 똑같이 나누어 갖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유산을 나누었다면 갈등이 그리 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옛날이야기 중에 놀부와 흥부이야기는 너무 유명합니다. 형 놀부는 부모의 유산을 동생 흥부에게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형제간에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남남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바로 욕심이 문제입니다. 욕심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와 같습니다.
예수님께 나온 이는 아마도 동생인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위로 자기들의 유산 나누는 문제를 해결받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의 생명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임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욕망의 늪에 빠져있는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그저 재산을 늘려나가는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어 소출이 풍성해지자 그는 대뜸 창고를 확장할 생각부터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풍성함이 가난한 자를 위해 나누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저 이 땅 위에 물건들을 많이 쌓아놓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쩜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당황하지 않아야 합니다.
Α. 욕망은 밑 빠진 항아리처럼 채워지지 않습니다(15).
1. 욕망, 탐욕, 탐심 등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말들입니다. 욕망은 밑 빠진 항아리 같아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비록 형이 동생에게 유산을 제대로 나누어주지 않아 불만스럽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준다고 해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2. 욕심은 뭔가 부족함을 느끼는 마음이고, 탐욕은 욕심을 채우려고 탐하는 것이고, 탐심은 탐하는 마음입니다. 왜 사람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꾸만 채우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참된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소유와 상관없습니다.
3. 욕망의 항아리, 그 밑 빠진 항아리는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만 채워집니다. 콩쥐팥쥐이야기에 보면,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두꺼비가 깨진 곳을 막아주어 물을 채울 수 있었듯이,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어야 참된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Β. 욕망은 멈출 줄을 모릅니다(16-18).
1.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이미 “부자”입니다. 그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풍년이 들어 소출이 엄청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는 그것을 쌓아놓을 창고를 더 크게 지으려고 합니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
2. 아마도 이 부자는 아무리 많은 소출이 생겨도 똑같은 마음을 먹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입니다. 욕망은 끝이 없고, 멈출 줄도 모릅니다. 이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욕심의 포로가 되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살다가 가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전도서에 보면,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전 5:10)고 했습니다. 참된 만족은 물질이나 소유의 많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만족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Γ.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9-21).
1. 하나님은 그저 자기를 위해 쌓기만 하는 그 부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 우리는 하나님이 오라고 부르시면 언제라도 가야하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결코 아니란 말씀입니다.
2. 시편 90편은 모세의 기도인데, 10절에 보니까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이면 “날아간다”고 표현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하신 것은 영생입니다.
3. 우리는 이 세상 - 날아가는 세상에서 영생을 준비해야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쌓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손을 펴서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지 말고 나누어야 합니다.
Ⅲ.
한 낚시꾼이 낚시를 하다가 이상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 물고기는 금빛을 띠고 있었는데, 물고기가 낚시꾼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면 제가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드릴게요.” 그는 물고기가 하는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물고기가 말을 한다는 것도 그렇고 또 하도 애원하기에 그 물고기에게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세 가지가 아니라 소원 다섯 가지만 들어주면 너를 살려주마.” 그러자 물고기는 서글프게 말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소원밖에 들어줄 수 없어요.” 그러자 낚시꾼은 “그럼 네 가지 반만 들어다오.”하고 말했습니다. 물고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습니다. “세 가지밖에는…” “좋다. 네 가지 소원만 들어다오.” 그러나 물고기는 이미 숨이 끊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탐심”이란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욕심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는 “더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탐심에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탐하느라 세월을 허비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지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므로 여러분의 보화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쌓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祝福)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