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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1950
헬렌 이모는 쿨룬 열차역에서 우리 부모가 살고 있는 신도시 쪽으로 가려고 택시를 불렀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 을 달리고 있는 택시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참 인상 적이었다. 나무가 무성 한 산, 초록색으로 물든 골짜기, 드물게 보이는 집과 사람들. 번잡하고 더러운 상하이에 비하면, 신 도시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자연 그대로 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멘트로 지은 큰 직사각형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 주위는 대나무로 둘러 쌓여 있었다. 건물은 남중국해에 수정같이 맑은 물을 쏟아 붓는 강 하구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택시는 강언덕 옆 비포장 도로에 섰다. 헬렌 이모와 나는 넓은 강하구위에 있는 긴 돌 다리를 건너서 회색 시멘트 집에 가야 했다.
거의 5년 동안 떨어져 있다가 내 부모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걱정스럽지도 않았다. 기쁘 거나 침울한 감정은 없었어도 무감각하지는 않았다. 무심하다기 보다는 그저 멍한 기분으로 나는 헬렌이모를 따라서 부모님 아파트로 통하는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 층계를 올라 갔다. 아마 나는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나이마와의 이별로 시작 해서, 난징 빈민촌에서의 새로운 삶, 이모와의 상하이 생활로 이어지는 격변, 사는 곳의 바뀜, 삶의 변화에 익숙해 졌을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장기판에서 이리저리 옮겨지는 졸 같았다. 나에게 홍콩에 오는 것은 나를 지배하는 어른들에 의한 가장 최근의 묘책에 불과 했다.
상하이에서 4년 사는 동안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희미 해져 갔다. 헬렌 이모가 부모님 이야기를 꺼낼 때외에는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조차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키가 크고, 마른, 심각한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인상은 엄격한 표정으로 꽉 차 있었다. 내가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몰랐다. 어머니는 나에게 불가사의같은 존재 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보아도 나에게 심하게 대하지 않았다. 하늘에 있는 별처럼 매혹적이었지만, 멀고 멀었다.
어머니가 아파트 안으로 안내 했다. 아버지는 작은 침실안 책상애 앉아 있었다. 침실은 그 보다 더 작은 식당겸 거실로 연결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방을 통과하여 아버지 침실로 갔다. 거실겸 식당은 난징 저택 입구 크기의 반이었다. 나는 자식이 존경과 복종을 보이기 위한 전통 대로 존칭으로 “아버님, 어머님 하고 부르며 정중 하게 인사 했다. 어머니에게는 입구에서, 아버지에게는 침실문을 들어 서며. 포옹도, 키스도, 감정의 표현도, 여행에 대한 질문도, 헬렌 이모와 내가 무사히 도착 한 데 대한 안도의 한숨도 없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우리가 분명히 그의 시야에 들어 왔는데도 옆방 책상 등나무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 았다.
어머니와 이모는 서로 인사를 교환 했다. 나는 낯선 사람처럼 문 옆에 서 있었는 데, 아무 연관이 없는 것 처럼 느껴져 매우 불편 했다. 1,2분 후, 사업상 거래를 마친 것 처럼 이모는 떠 났다. 나는 이모가 가는 것을 보고 예기치 못한 슬픔이 복 바쳤다. 그러나 나는 어떤 질문이나 항의를 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헬렌이모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차 한잔 하고 가라고 하지도 않았다. 물론 어린아이가 어른들 하는 것을 알려고 하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낯선 사람들 끼리 보다 더 차가운 너무나 짧은 만남은 전혀 뜻밖이었다.
내일이나 생각하자고 마음 먹고, 나의 새로운 세상을 알아 보려고 했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희미한 기억과 연관 시켜 보려 했다.
아버지는 지금도 호리 호리하게 키가 크고 않아 있을 때도 장대하게 보였다.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의 눈초리는 무섭게 보였고 옷은 검소하고 엄격하게 입었고 태도는 깔끔 했다. 그는 한두번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릴 정도로 나의 존재를 거의 무시 했다.
어머니도 많이 변하지 않았다. 아직 아름답고 말이 없었으며 거리감이 있었다.
두사람 모두 50대였고 최근에 지옥같은 고생을 했지만, 나이들어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아직도 진한 검은 색이었고 주름살 하나 없었다. 기적같이, 감옥과 빈민촌은 그들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책상에서 글 쓰는 일을 다시 시작하자, 어머니는 나에게 거실에서 나와서 따라오라고 몸짓을 했다.
발코니를 지나 또다른 작은 방으로 갔다. 그 방에는 두개의 작은 침대와 아주 작은 두개의 책상이 있었다.
“큰형과 큰 누나가 여기서 잘 거야. 너와 형이 잘 벙커 베드가 만들어 질때까지, 너는 바닥에서 잘 꺼야.” 라고 어머니가 설명 해 주었다.
내가 이곳에 온지 2주동안 나는 형의 책상 밑에 깔아 놓은 메트에서 잤다. 우리 아파트는 3개의 작은 방이 있었다. 하나는 부모님이 썼는 데 아버지 책상이 베드 쪽을 면하고 놓여 있었다. 형과 누나가 다른 방을 썼고 세번째 방은 부보님 방과 통해 있었고, 거실과 식당으로 사용 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아파트 건물의 나머지는 건물주의 가족과 몇명의 세입자들이 차지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때, 아버지는 평소의 심각한 표정을 짓고 깊은 목소리로 차게 나를 훈계 했다. 내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완곡한 표현을 쓰거나 경고하기 위한 서론 없이 연설을 시작 했다.
“우리 가족은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천장을 쳐다보며 운을 띄웠다. “힘든 시기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가족 개개인은 뜻밖의 곤경으로 부터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나는 “예상치 못한 곤경에서 가족을 구해내"는 결과가 무엇인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감히 설명을 요구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나의 상하이 생활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고, 몇년동안 서로 떨어져 있었는 데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 크게 실망 했다.
그는 훈계를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나는 너를 중국 중학교에 보낼 것이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 보며 말 했다. 너는 우수한 성적을 내서 가족을 도와야 한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 였다.
나는 상하이에서 겨우 5학년을 마쳤다. 5학년 에서도 나의 어린나이와 작은 키는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힘들었고 공부를 따라가기도 버거 웠다. 더구나 나는 항상 과잉행동 장애로 고생 했다. 따라서 긴 하루 학교 일과 동안에 집중 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50분 짜리 수업을 하루에 7 시간 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은 나에게 고문이었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수업시간에, 내가 난징의 빈민촌에서 그랬듯이, 교실에서 뛰쳐 나가고 싶었다. 상하이에서 뛰쳐 나가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의자에서 무척 몸을 움직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수업중에 움직이는 것은 규율 위반이어서 손바닥을 맏고 구류되는 처벌을 받았다. 심지어 본의 아니게 몸을 꿈틀 거려도 선생님으로 부터 심한 꾸지람을 받았다.
학생은 동상처럼 목석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어야 했다. 나는 나만의 환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상하이에서 무사히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에게 6학년을 빼고 중학교에 다니라고 하고 있다. 중학교는 50분 짜리 수업이 하루에 8번 있다. 나는 많은 곤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생각은 적중 했다. 아버지가 골라 준 학교에 가기 시작 한지 며칠 후 나는 싸움에 말려들어 퇴학 당 했다. 이것이 홍콩에서 나와 아버지 사이의 폭풍 같은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의 실망과 분노 그리고 나의 걱정과 두려움으로 뒤 엉켜 있었고 이것은 나의 십대동안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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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난징 아버지의 저택에 살 때는 아버지는 가족 앞에서 그의 직장이나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나는 그가 아침에 검은 리무진을 타고 집을 나가는 것을 자주 보았지만, 그가 중요한 정부 관리 라는 것 외에는 그가 하는 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권력을 잃은 후 가족을 떠나 호랑이 다리 감옥에서
3년을 지낸 후 홍콩에 있는 어머니와 합류 했다. 공산당이 중국공화국을 새운 후, 우리형제 몇명은 장카이색을 따러서 타이완으로 갔다. 나와 우리부모가 5년 동안 떨어져 있다가 홍콩에서 다시 만날 때 까지 우리들은 많은 트라우마를 받았다. 아버지의 불명예와 투옥으로 인해서 가족이 크게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불행한 시기에 대해서 아직 까지 한마디 말이 없었다. 난민촌에서의 생활에 대한 대화가 없었던 만큼 아버지의 감옥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오 가지 않았다. 가족에게 아무런 특별한 일이 없었던 것 처럼 보였다. 조셉 스탈린에 의해서 완벽하게 만들어진 망각술에 숙련된 개업의 처럼 우리 모두가 아무일 없는 척 했다.
아버지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나에게 전혀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불문율이 있었다. 자신의 인생과 자라온 과거사를 자식들과 이야기 하지 않는 다. 과거사를 가까운 친구나 동년배의 친척에게 말하는 것은 괜찮았다. 그러나 자식들과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세대 간의 선을 넘는 일이어서 유교 윤리 상 절대 타부로 되어 있었다.
유교적인 틀 안에서는 어른들은 항상 나이 어린 사람들과 다르게 보여야 하고 다르게 행동해야 했다. “늙음”는 침착하고, 참을성이 많고, 믿을 수 있고, 아는 것이 많고, 현명 함을 의미 했다. 그래서 늙은이들은 공경받을 만 하고 젊은이들의 복종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어떤 값을 치루더러도 어른들이 항상 위엄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였다. 자식들과 멀어지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자식들과 교훈적이거나 교화적이지도 않은 친밀한 대화를 갖는 것은 자신의 위치와 위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홍콩에서 아버지는 매일 글을 썼다.그의 책상은 엷은 중국 원고지로 쌓여 있었다. 원고지는 상하로 나열된 작은 정사각형으로 꽉차 있었다. 아버지는 보물 처럼 아끼는 금 파카 만년필을 사용하여 이 작은 정사각형을 위에서 아래로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페이지 마다 하루 종일 한자로 메꾸어 나갔다. 그는 무엇을 쓰는 지 가족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서 몇시간 씩, 쓰고, 쓰고 또 썼다. 언젠가 잠깐 쉬는 동안에
그는 나에게 말했다. “권력은 만년필로 부터 나온다!” 라고.
10살 밖에 안된 나는 아직도 최근에 꺼져 버린 상하이 상업 열풍이 기억에 생생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말이
만년필 뚜껑이 금으로 돼 있는 것 하고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 했다. 금은 가치가 보존되는 금속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날로 가치가 떨어지는 지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금을 모았다. 몇년 후 내가 또 한번의 내 인생 변화를 겪기 위해서 공산주의 중국에 돌아 올 때 까지 나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1930년에 마오가 “권력은 총구로 부터 나온다!” 라고 한 유명한 말을 살짝 훔친 것이었다.
슬픈 이야기 지만 아버지는 마오의 말을 약간 바꾸어 인용하여 마오를 놀리려고 한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당시에 홍콩에서 발간되는 잡지와 저널에 국제외교 관계를 분석하고 중국이 어떻게 통치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의견이 담긴 정치에 관한 코맨타리를 쓰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작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데도 불구 하고,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적절하게 퍼뜨린 말과 생각이 전쟁으로 엉망이 된 중국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얻게 할 것이라고 아버지는 믿었다. 권력에 관한 한 마오는 현실주의자였고 아버지는 몽상가 였다.
아버지의 침묵과 우리의 멀고 대립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사로 잡아왔던 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속을 태웠다. 내가 유모 나이마가 돌보아 주던 시절에도 나는 나이마에게 아버지에 대한 질문으로 그녀를 성가시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고 나는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나를 때릴 것이라고 했다. 그말은 아버지가 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나이마를 그녀의 고향집으로 내 보내던 날 아버지가 나에게 처음으로 손을 대기 전 에도 나는 그를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워 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나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은 아버지를 불가사의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에 대해서 더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그가 어떻게 성장 했는 가, 그의 아버지는 누구였는 가, 그의 아버지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 가, 그는 왜 투옥 되었는 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막동이 아들인 나에게 왜 그렇게 차게 대하는 가를 알고 싶었다.
때때로 나는 그의 친구가 홍콩의 누추한 우리집에 와서 저녁 먹으며 아버지와 소란스럽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그의 어린시절을 잠깐 옅 볼수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그의 친구에게 상냥하고 말을 많이 했다. 유명한 중국 술 130도나 되는 “장미 이슬”을 몇잔 먹은 후에는 더욱 그랬다. 이런종류의 모임 동안 평범한 마을 출신으로 저명한 인사가 된 그는 자주 광범위한 화제와 회상의 중심 무대를 장악 했다.
“농부에서 인텔리겐치아(지식층)로 상승한 이 장관에게 건배!” 한 친구가 잔을 들어 올리며 외치자 다른 친구들이 장미 이슬을 꿀꺽 삼켰다. “당신의 여정과 분투가 우리 모두와 자식들에게 가이드가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다른 한 사람이 경의를 표 했다.
가끔 누군가가 “이장관의 지도 하에 다시 권력을 잡자!” 라고 외쳤다. 이때 쯤이면 모두 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술을 마신 다음 술잔을 앞으로 기울여 다 마셨다는 것을 보였다. 그리고 사기를 북돋아주는 외침에 대한 결심과 이해를 보여 주기위해서 서로 눈을 부릅뜨고 쳐다 보았다.
이 경의와 용기를 북돋아 주는 외침은 나를 매혹 시키는 감추어진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찾고 있는 권력과 아버지가 젊었을 때 겪는 여정과 분투를 알고 싶었다. 때때로 어머니가 억지로 나의 아버지에 대한 질문에 한 두번 대답을 해 주었지만, 어머니는 내가 귀찮게 묻는 것에 대해서 당황해 했다.
“너는 왜 알려고 하냐? 너는 네 아버지를 좋아하지도 않는 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나를 이상하게 쳐다 보았다.
나는 한번도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다고 말 한 적이 없다. 어머니는 말은 없었지만 확실히 관찰력과 지각력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정보는아버지를 모시던 하인으로 부터 나왔다.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인생과 아버지 젊은 시절의 비밀을 알려 주었다.
아버지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자, 그의 산동 고향에서 남녀 수십명을 난징 저택으로 데려 와서 그와 그의 가족을 섬기는 시종으로 훈련 시켰다. 자신에게 서브하는 사람들을 같은 집안 사람들이나 고향 사람들로 채우는 것은 오래된 중국 전통이다. 어느 지방에서 난 사람이 성공 하면, 그는 그의 행운을 같은 고향 출신이나 같은 잡안 사람들과 나눈다. 그는 그들을 그가 성공적이고 번영 하는 경력을 쌓은 도시로 불러온다. 그들은 그를 모시면서, 그가 유명인사로 출세한것이 마치 자신의 것 처럼 자부심을 가진다.
그들은 변함없이 충성 하고 믿을 만 하다. 그들은 공통된 조상의 고향으로 결속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속은 "다른 사라들"로 부터 "우리"를 분리 시킨다. 중국사람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항상 조상이 시작한 지방이다. 다시말하면 그의 아버지와 조상이 자란 곳이지 꼭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니다. 출생이 그저 편리하게 우연히 일어난 사건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공시적인 내 신분증에는 내가 산동 출신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상하이에서 태어 나서 난징에서 5년동안 살았고 산동에 한번도 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보디가드와 하인일을 하고 있는 시종들은 북산동의 궁핍한 동네에서 살 때 부터 그의 가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이며 은인인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 더 좋아하는 일은 없었다. 그 혹은 그의 부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그의 성취의 영광과 권력에 더 가깝게 느끼게 했다. 그는 지위를 잃었고, 투옥 되었으며, 더이상 그들을 고용하지 않아도, 그들에게는 아버지는 항상 중국정부의 명예로운 장관이었다. 그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말 할 때는 항상 “명예로운 장관 리…”로 시작 했다.
1946년에 우리 어머니의 요청으로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남자 하인이 난징에서 상하이로 가는 나를 수행 했다. “라오 리유” 혹은 “늙은 리유”는 우리집 고용인이 아니었지만, 우리가 빈민촌에서 살때 그는 난징에서 근근히 살면서 우리와의 관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아버지 조상 고향인 산동 마을의 우리 대가족의 일원으로 생각 하여, 어머니가 그에게 기차 여행비를 주면서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주저 없이 나를 상하이로 데리고 갔다.
그는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립했다. 그는 난징보다 상하이가 더 많은 기회를 준다고 생각 했다. 그러나 그는 리 집안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고, 거의 매주 주말에 헬렌 이모 집에 와서, 청소 하고 무거운 것을 날라 주고, 나와 놀아 주고, 아버지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나를 즐겁게 했다. 라오 리유는 타고난 이야기 꾼이 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산적들, 그리고 불쌍한 산동의 농부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생생하고 화려하게 해 주었다. 나는 라오 리우의 이야기로 부터,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더 많이 20세기 초기의 중국 시골 생활에 대해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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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효도의 나라이다. 아들의 운명은 때때로 아버지의 운명에 의해서 정해 진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할아버지를 이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향 산동을 이해 해야 한다.
산동은 한반도를 향해서 중국해로 돌출한 북 해안 지방이다. 산동은 길고 유명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5,00년 전에 동아시아의 철학과 도덕적 인 기초를 만든 공자가 아버지 고향에서 1,2 마일 떨어진 곳에서 태어 났다. 타오이즘의 창시자인 나오지(노자)도 산동이 고향 이다. 공자의 지적 후계자인 맹지(맹자)도
이곳 출신이다.
거물 철학자 시절에는 산동이 번영 했다. 이 곳은 농부들의 땅이었다. 흙은 거름졌고 자연산물이 풍부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토지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구가 증가하여 땅의 자양분이 말라서 이 지역은 빈곤이 휩쓸었다. 19 세기 에 산동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농부들이 아무리 부지런하게 또는 독창적으로 농사를 지어도 소용 없이 아주 형편없는 수확을 했다.
“네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농부가 아니고 법관이었다.” 어느날 라오 리유가 나에게 일러 주었다. 청나라 때 지방의 법관은 보안관 대리인(Sheriff Deputy)과 같은 직위 였다. 할아버지는 마을 변두리 태산 근처에서 살았다. 그의 부모도 그들이전의 그의 할아버지도, 또 그들이전의 할아버지도 그곳에서 살았다. 그곳은 그의 조상의 고향, 바로 조상이 씨족을 시작한 원조의 땅이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 처럼, 할아버지도 진흙과 볏짚으로 만들어진 오막살이 에서 살 았다. 황하강은 쾌 자주 범람 했는 데, 그때마다 오막살이 집은 뜨거운 접시의 버터 처럼 물에 녹아 없어졌다.
그렇게 누추한 집이 있는데도 할아버지에게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조상의 고향에서 유산을 물려 받을 당연한 권리가 있었 는데도 상당한 편견과 반대를 극복해야 했다. 그 이유는 그가 법관이었고 법관은 모두가 미워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지방에서, 법집행의 주 업무는 청나라 정부를 위한 세금 징수 였다. 나라가 유럽 식민지 세력에 의해서 그나마 빈약한 자원이 고갈 상태 였기 때문에, 정부는 이미 과도한 세금을 내고 있는 농부들에게 수 많은 세금을 징수 해 갔다: 머리 세금(수입에 관계없이 두당 얼마씩 걷어 가는 세금), 수확세, 곡물세, 전쟁세. 이많은 세금을 낼수 있는 농부는 거의 없었다. 농부가 세금을 내지 않으면, 법관은 그의 땅을 차압 하거나 아니면 감옥에 보냈다. 농부의 눈에는 법관은 참으로 저주받을 놈이고, 이 세상의 인간 쓰레기 였다. 사실 많은 법관이 자신이 하는 일이 싫어서 다른일을 찾을 수 만 있다면 직업을 바꾸고 싶어 했다. 법관은 그들이 상대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별로 많은 봉급을 받지 않았다. 법관도 먹고 살기 힘들었다. 그들은 살아 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했었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운좋게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산에 살고 있는 마샬 아티스트의 하우스보이로 입양 되었다. 그의 생부는 마을 끝자락에 겨우 오막살이 한채 지을 수 있는 땅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작은 오막살이에서 가족이 실았다. 마샬 아티스트에 의한 입양은 할아버지를 극심한 빈곤에서 구해 주었고 짧고 험한 소작농으로 일생을 보내지 해주 었다. 소작농은 아무리 빈곤해도, 지주에게 수확의 반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중으로 세금을 내는 부담을 안게 된다. 그들은 영양실조와 육체적인 피로로 쓰러져서 10년 내지 15년 이상 농사를계속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들의 아이들은 유아 시절을 못 넘긴다. 소작인의 집근처에는 항상 죽음이 어른 거렸다.
15년동안 그의 혈육들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하나 하나 죽어 갔지만, 할아버지는 태산에 사는 캉푸 마스터의 충성스러운 하인이었고 말 잘듣는 시종이었다. 마스터의 집에 살면서 무술을 배웠고, 청소, 요리, 다른 심부름을 열심히 했다. 그의 무술 실력이 지방정부 법시행 관리들에 의해서 법관으로 발탁된 계기가 되었다. 그 때 그는 캉푸 마스터의 집을 떠났다.
가족중 유일한 생존자인 할아버지가 그의 가족이 살던 곳에 집을 다시 짓자, 마을 사람들은 그가 그들과 함께 마을에 사는 것에 분개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법관이 이웃이 되는 것은 늑대를 양떼와 같은 우리 안에 넣어 놓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적개심과 배척하는 행위로 그를 마을에서 나가게 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의 직업 때문에 그를 증오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19세기 중반이 되자, 산동 뿐만아니라 많은 중국의 가난한 지역에 산적이 출몰 했다. 유럽의 강력한 식민지화 세력에게 패배하고 파산 당한 만주 왕국(청)은 서비스와 교육을 공공에게 재공 하지 않았고, 더구나 지방에서 약탈을 일삼는 산도적들로 부터 사람들을 보호 하지 못 했다. 다행히 지방의 질병과 가난은 식민주의자들을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약탈과 대혼란을 일으키는 산도적들은 농부들을 마음대로 괴롭피며 농촌을 휘젓고 다녔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적에 산동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도적들은 가족을 잃고 생계를 유지 할 수 없는 농사꾼들이었다. 같은 동료 농부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약탈자들은 패거리를 만들기는 했지만 무장을 하지도 않았고 전투훈련을 받아 본적도 없었다. 칼과 창 같은 전통적인 무기를 가져 본 사람도 드물었다. 마을로 쳐들어 갈때는 상대를 겁주기 위해서 무서운 소리를 지르고 끝을 날카롭게 깎은 나무 막대기를 휘둘렀다. 약탈은 했지만 살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들중 가장 나쁜 사람들은 여자를 강간 하거나 납치 했다.
할아버지는 볍관으로서 지방정부가 준 날이 넓은 칼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치 있는 소유물이었다. 통상적으로 그는 허리 띠에 칼을 매달아 옆구리에 차고 다녔다. 요지음 경찰의 권총과 같은 무기 였다. 그는 알통을 가진 큰 체격은 아니었지만, 튼튼 했고 고양이 같이 재 빨랐다. 그는 칼을 기가막힌 기술과 재치로 다루었다. 그의 다리와 잘 조합된 동작으로 힘을 조절하여 날렵하게 움직였다.
실제 싸움에서 번개 같은 스트로크로 팔, 다리,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의 고향 마을에 정착 한지 얼마 안되어, 4명으로 된 산도적 패가 이른 아침에 쳐 들어 왔다. 그때 할아버지는 마을 입구에서 맨손으로 혼자 권투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체력 단련을 위해서 매일 아침 이 운동을 했다. 산도적의 고함소리와 욕지꺼리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는 대표적인 강푸 포지션을 하고 기다렸다. 그는 칼을 칼집에서 빼들지도 않았다.
끝이 뾰족한 나무막대기로 무장한 산도적들이 이것을 보고 무장한 마샬 아티스트와 싸우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씩씩 거림을 멈추더니 어리석은 짓을 포기하고 도망 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굴욕적인 패배를 잊지 않고 닷세 후에 네명의 산적들은 인력을 보강하여 다시 쳐들어 왔다.
나는 여러번 이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라오 리유와 아버지의 전 집 시종들 로부터 들었다. 그들에게는 거의 전설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저녁 때였다.” 라오 리유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채소 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7명의 산도적이 마을로 쳐들어 오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를 불렀다.” 7명은 산도적 떼로서는 상당한 숫자였다. 그들의 표정과 태도는 마을 사람들에게 곧 큰 재앙이 닥칠 것 같은 공포감을 주었다. 아무 말없이 날카롭게 깍은 나무 맏대기를 꽉 잡고 서 있는 그들은 함악하게 보였고 결의에 차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수확한 밀을 말리고 있는 들판에 그들이 도착 했을 때, 할아버지는 마샬 아트 폼을 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라오 리유는 말 했다. 그는 균형을 유지 하면서 빨리 움직이기 위해서 왼쪽 다리를 앞에 내놓고 앞으로 약간 구부리고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서 있었다.
“그는 칼을 뽑아 들었다.” 라오 리유는 극적으로 덧붙였다. 7명의 산도적은 할아버지로 부터 약 10발 떨어진 곳에 멈춰 어깨를 맞대고 한줄로 서서 나무 막대기를 마치 창처럼 아버지를 향해서 겨누었다. 그들은 며칠전의 굴욕을 보복하기 위해서 분명히 죽이려고 다시 온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는 경멸하는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지않았고 그들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비명을 지르며 칼을 옆으로 휘어 잡고 좌우로 휘두르며 돌격 했다. 산도적
들이 번개같은 속도로 번쩍이는 칼이 자기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자, 공포가 그들을 덮쳤다. 공포로 얼어붙은 그들은 잠깐 서로 쳐다보더니, 마치 덤벼드는 사자에 놀란 얼룩말 떼 처럼 한몸되어 동시에 돌아서더니 목숨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가기 시작 했다!” 라오 리유는 손가락을 편 손을 밖으로 극적으로 젖히며 말 했다.
이 두 마주침 후, 할아버지의 마을이 리라는 이름을 가진 용감한 호랑이에 의해서 방어 되었다는 소문이 태산근처의 몇 군에 퍼졌다. 그후로 산적들은 이 마을을 피했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에게 “자애로운 법관”이라는 별명을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할아버지가 산도적들로 부터 마을 사람들을 보호 해준 것에 대해서 크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만, 할아버지는 또 하나의 좋은 일을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했다. 세금 미납자에게 당장에 세금을 내라고 하지 않고, 행정 장관을 설득하여 그들에게 유예 기간을 주었다. 그것은 정부와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세금 미납자는 투옥을 피할 수 있었고, 정부는 조금 늦지만 미납된 세금을 거둘 기회가 더 많아 졌다. 자주 행정장관은 할아버지의 논리가 현명 함을 발견 했다. 왜 세금 미납자를 감옥에 보낼 까? 그가 농사 짓는 동안 세금을 못 냈으면, 감옥에서 번민하고 있는 동안에는 더더구나 세금을 낼수가 없을 것이다.
투옥으로 부터 할아버지가 구해준 농부들 모두가 할아버지에게 신세를 졌다. 마을 사람들은 어느 덧 할아버지의 충성스러운 팬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통례를 벗어난 방법으로 자신과 그의 가족이 살아 남을 방도를 만들 었다. 그들은 매일 먹을 식량이 있었다.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 이상의 것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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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