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전남 영암군 소호면 태백리,소산리,상천리. 학산면 신덕리, 매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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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적산(隱跡山 394.6m) 주봉인 상은적산은 산줄기 남쪽 중심부에 자리한 가장 높고 웅장한 봉우리다. 정상
주변에 바위지대가 많지만 위험한 곳이 없어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다. 이 산줄기에는 상은적산 말고도 은적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봉우리가 또 하나 있다. 북쪽 끝 영산강 물결에 머리를 맞대고 위태롭게 자리한 암봉인 하은적산이 바로 그것이다.
(용지봉에서 바라본 월출산과 문필봉)
두 은적산 모두
정상 일대에서 보는 조망이 일품으로, 발 아래로 목포시가지와 이제는 담수호가 되어버린 옛 바다의 흔적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하지만 은적산은
지명사전에도 그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지척에 위치한 월출산이란 명산의 그늘에 가린 탓이다. 월출산의
화려함과는 비교가 될 수 없기에 주목을 끌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구멍바위. 베틀바위)
게다가 위치 또한 영암과 목포를 연결하는
축에서 빗겨나 있어 스쳐지나가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속살을 들춰보면 의외로 거칠고 웅장한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난다. 능선을 따라 늘어선 바위
무리의 기괴함과 여기 저기 간담을 서늘케하는 수십 길 벼랑은 밑에서 느낀 산의 이미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작지만 속 깊고, 평범해 보이나
아기자기한 그런 산이다.
(영산강의 하루)
전에만해도 은적산은 발들여 놓기도 힘들게 잡목이 우거진 여느 동네 뒷산과 다름없었다. 능선을 따라 소로가
형성되어 있지만 옛날 화목을 구하기 위해 다녔던 흔적일 뿐 본격적인 등산을 위해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영암군 소호면사무소 면장을
비롯한 직원들과 공공근로사업 요원들이 등산로를 개척하고 정비했다. 잡목 제거와 표지판 설치 등의 기본작업을 모두 마쳤다.
(영산강을 배경으로)
산행은
소호면 사무소에서 학산면 방향으로 1.5km 떨어진 곳의 자그마한 언덕인 함정굴에서 시작된다. 조릿대가 가득한 이곳은 예전에 주민들이 산짐승을
잡기 위해 함정을 파두었던 장소였다고 한다. 어른 키 정도의 장승이 버티고 서 있어 등산로 입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
사이로 싸리나무류의 잡목이 가득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유유히흐르는 영산강)
숲 속의 능선을 따라 천천히 고도를 올리며 15분 정도 오르니 산길
오른쪽으로 고인돌이 맞는다.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나지막한 기둥이 상판석을 받치고 선 고인돌의 모습이 장난감처럼 깜찍하다. 고인돌을
지나면서부터 경사가 조금씩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봉우리에 올라섰다.
(문필봉)
용지봉이다. 독립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지만 풍수지리적으로 용의 형상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추측이 있고 인근 주민들이 가뭄이 들고 비가 오지 않으면
이곳에 올라 연기를 피우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용지봉 정상에서 북서쪽 내리막길을 타고 능선을 따르면 산길 왼쪽으로 노동 마을과 그 위의
노동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하은적산표지석
조용해 보이는 산골 마을의 정취가 느껴지지만,그 뒤 산자락을 험악하게 깎아먹은 임도의 모습이 보인다.
용지봉에서 출발해 20분쯤 가면 눈앞이 시원해지는 넓은 바위지대로 나선다. 노동제 바로 뒤편이다. 은적산 산행 중에 가장 먼저 시야가 트이는
곳이다. 전망대 바위에서 5분 거리에는 노동 마을에서 올라온 임도와 널따란 헬기장이 산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도청과 남악신도시)
임도에서 다시
능선으로 진입한 뒤 15분 정도 진행하니 오른쪽으로 길이 갈리는 곳에 구멍바위라는 조그만 팻말이 붙어 있다. 모두들 그 길을 따라 20m 정도
올라가니 사람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난 바위 하나가 앞을 막았다. 산 아래에서도 구멍이 식별 가능할 정도로 큰
바위다.
구멍바위에서 다시 주등산로로 내려가 옥룡암터로 향했다. 길은 다시 숲으로 잦아들며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임도 끝 안부를
지나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곧바로 올려치니 널찍한 헬기장으로 올라섰다. 주변이 짙은 숲으로 둘러싸 작은 운동장 같은 분위기다. 이곳에서 100m
정도 더 진행하니 산길은 넓은 임도로 나서고 오른쪽에 또다시 잔디밭같은 헬기장이 펼쳐진다.
(굽이굽이 영산강)
임도를 따라 300m 정도 계속 가면
길이 크게 굽돌면서 노동 마을 방향으로 내려서기 시작한다. 여기서 100m 정도 아래에 자리한 넓은 공터가 바로 옥룡암 절터다. 이 암자는 신라
말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수학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그대로 남아 있고 절터 뒤편의 커다란 바위 아래에는 시원한
석간수가 솟아나고있다.
지금은 임도공사로 인해 식수도 오염됐지만 물길을 트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면 훌륭한 샘터가 될 것이다.
옥룡암터에서 다시 헬기장으로 돌아와 북서쪽의 숲속을 가로지르는 능선으로 방향을 잡으면 상은적산까지 오르막이 계속된다. 넓적한 솥뚜껑처럼 생긴
바위를 지나니 정상부의 기암군이 도열하듯 줄지어 서 있다.
산길 서쪽은 여기저기 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아질한 반면 동쪽의 숲은
아늑하다. 점차 고도가 높아지며 우뚝한 바위들 사이로 등산로가 구불거린다. 상은적산 정상에 오르기 전 100여m 구간은 마치 석물 정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기묘한 바위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가운데는 사람이 쌓은 탑도 있었지만 자연의 조화가 빚어낸 병풍석과 어우러져 시간이 사라진 공간
속을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다.
상은적산은 비슷한 세 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어디가 진짜 주봉인지 햇갈릴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정표가 달려 있어 엉뚱한 봉우리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염려는 없다. 옥룡암터 방향에서 진행할 때 가장 마지막에 있는 봉우리가 상은적산 정상이다.
비록 400m도 안되는 봉우리지만 바다에서 바로 솟은지라 고도감이 남다르다.
남북으로 뻗은 끔틀대는 산세 너머로 바다인지 뭍인지
모를 평평한 물체가 널부러져 있다. 월출산과 해남 두륜산과 달마산 능선도 황갈색 이내 너머로 이마를 내민다. 주능선은 하향곡선을 그리며 북쪽으로
향한다. 정상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안부에서 은적산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베틀굴이 있다.서쪽 사면을 타고 내려섰다.
(대불산단과 유달산 우측)
베틀굴은
속에서 베를 짰다는 유래가 전해지는 길이 70m에 달하는 동굴이다. 또 내부에 물이 흘러 예전에는 사람들이 생활했고,그 물에 빠지면 영산강에
떠올랐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첫번째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작은 돌로 막아놓아 한 사람이 겨우 기어 들어갈 수 있는
정도다.
주능선에서 베틀굴로 가는 갈림길에는 특별한 이정표가 없었다. 사람들이 몰리면 훼손과 오염이 될까봐 아직까지 개방여부를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능선에서 200m 정도 가파른 사면을 내려서니 베틀굴이 입구를 벌리고 있었다. 초입에는 서너 명이 충분히 내려설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 안쪽에 동굴 내부로 들어가는 작은 구멍이 보였다.
동굴 속을 한번 들여다본 후 내려왔던 길을 되짚어 주능선으로
올랐다. 갈림길에서 북쪽의 하은적산으로 향해 길을 따라 500m쯤 가니 왼쪽의 장동 마을로 내려서는 또 다른 갈림길이 나왔다. 이곳에서
아랫동네까지는 2.9km 거리. 1시간20분이면 충분히 내려설 수 있다. 이정표에 표기되어 있는 거리는 사람이 다니며 직접 측량한 수치라 상당히
정확했다.
갈림길에서 다시 1km 정도 떨어진 주능선에 관봉쪽으로 내려서는 이정표가 또다시 나타난다. 이 삼거리에서 관봉까지는
1.67km라고 표기되어 있다. 멀리서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는 어찌 보면 관(冠)처럼 생겼다고도 할 수 있는 사각형의 바위가 홀로 올라서 있다.
외롭게 월출산을 바라보는 바위의 모습에서 충신의 꿋꿋한 절개가 느껴진다.
관봉 갈림길에서 임도가 지나는 불치까지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능선길이다. 여기저기 소사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고 발끝에 채는 게 온통 춘란이다. 불치에는 비포장이지만 간선도로와 다름없는 넓이의 임도가
나 있다. 불치에서 하은적산으로 오르는 길은 그동안 떨어진 고도를 다시 높여야 했기에 상당히 힘드는 코스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휘는 능선을 1km 정도 따르니 왼쪽 아래로 30m 정도의 벼랑이 나타난다. 단칼에 잘라 낸 시루떡처럼 절벽의 단면에는 층층이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규칙적이면서도 일관성이 없는 모습이 한 폭의 잘 그려진 추상화를 보는 것 같다. 이 절벽지대에서 하은적산 정상까지는
넉넉잡아 1시간 정도 걸린다.
동쪽보다 서쪽의 조망이 더 좋아 오후 늦은 시각이면 아름다운 석양에 물든 영산강의 모습을 감상할
수도 있다. 안부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암벽구간만 무사히 통과하면 널따란 바위광장이 펼쳐진 하은적산 정상이다. 이 산 정상 너머 북서쪽 아래에
'서마지기바위' 혹은 '마당바위'라고 불리는 넓은 바위가 있다.
(서호양수장)
바위 사이로 잡목들이 자라 덤불숲처럼 보이지만, 막상 바위 위에
올라가 보면 100여 평도 넘는 크기다. 예전에는 이 옆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았다는데, 지금도 그 집터와 샘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산꼭대기에서 물이 난다는 자체도 신기했지만, 눈만 뜨면 보이는 바다를 앞에 두고 도대체 무슨 공부를 했을지 궁금하다.
정상에서
하산길은 북쪽 능선을 타고 거의 직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산길 중간에 돌이 무더기로 쌓인 곳이있어 발을 잘못 디디면 자꾸 무너져 내린다. 약간
가파른 감은 있지만 30분만에 종착지인 양수장 앞 도로에 도착했다. 먼 곳을 바라보니 낙조에 물든 붉은 영산강을 어둠이 천천히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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