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5:7-12
지난주 ‘깨진 유리창의 법칙’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범지역에
보닛을 조금 열어둔 자동차 한 대와 유리창이 조금 깨진 자동차 한 대를 놔두었는데,
1주일 후 보닛을 조금 열어둔 자동차는 그대로였지만 유리창이 조금 깨진 자동차는
모든 부속품이 없어지고 유리창은 전부 깨진 고철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악이라도 도모하거나 방치하면
각종 악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마침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외모 지상주의에 놀아나는 현대인들에게는 큰 경고가 됩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얼짱은 압살롬입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을 받는 자가 없으니,
저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삼하 14:25)
옥에도 티가 있기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이스라엘에서 머리카락은 힘과 아름다움의 상징입니다.
얼짱에 몸짱이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왕위 계승권까지 갖고 있습니다.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쉬운 것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
압살롬은 그 최고의 선물로 무슨 일을 하였을까요?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처음 한 일은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놓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요압 장군의 계교와 다윗 왕의 묵인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다윗은 도무지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년이나 흘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커져갔습니다.
그래서 요압 장군을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아무리 사람을 보내도 요압으로부터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압의 밭에 불을 놓은 것입니다.
화가 나서 달려온 요압에게 다윗 왕을 만나게 주선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 다윗을 만났고 자신의 존재가 간신히 용납됩니다.
그의 망나니짓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용인 받고난 후 착수한 일이 15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에 압살롬은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전배 오십 명을 세우니라.”
병거와 말들과 오십 명의 호위병들을 세워 화려한 진용을 갖추고는 한 가지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서 이르되,”
사람은 자고로 일찍이 일어나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찍 일어난 압살롬이 하는 일은 사람을 가로채는 일이었습니다.
다윗 왕에게 송사 하러 가는 사람을 불러 세워서 말합니다.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아버지를 모함하면서 자신이 재판관의 역할을 하는데, 이 일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훔치니라.”(삼하 15:6)
그의 망나니짓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더 큰 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사 년 만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훔친 지 사 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 왕에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삼하 15:7)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거짓말로 왕의 허락을 받고 헤브론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역을 일으킵니다.
압살롬은 정말 집요한 복수의 사람입니다.
암논을 죽이기 위해 2년,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2년, 자신을 외면한 아버지를 반역하기
위해 4년을 준비하였습니다.
반역의 근거지로 헤브론을 택한 것도 그의 주도면밀함을 드러냅니다.
헤브론은 원래 이스라엘 수도로 종교와 정치의 중심인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고 사람들은 떠나고 장사는 안 되고 땅값도
떨어졌습니다.
당연히 헤브론 사람들은 다윗에게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곳에서 반역을 일으키자 헤브론 사람들은 옛 영화를 회복할 수 있다며 환호하였습니다.
이렇듯이 압살롬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힘과 지위와 머리를 사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봅시다.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언제나 압살롬과 비교하며 받은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자녀들을 챙겨주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들의 지구 여행에 충분한 것을 당연히 잘 챙겨주셨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찾으셔야 합니다.
정균승 교수가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을 썼습니다.
“천직,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이라는 책에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절실한 질문이다.”라고 말하면서, 꿈으로
밥을 짓고 놀이가 곧 직업이 되며 일과 삶이 행복하게 어우러지도록 하라고 역설합니다.
제가 늘 하던 말입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은퇴는 retire, 이제부터 놀고 쉬는 것이 아니라 타이어를 새로 갈아 끼우는 시기, 새로운
이륙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둘째, 그 하나님의 선물로 누구와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십니까?
거의 대부분을 오직 내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종교생활도 모두 내가 복 받기 위해서 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모두 복 많이 받아 행복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잊는다면 모든 열심은 헛된 몸부림이 되어버립니다.
이 헛된 몸부림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래로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가인의 행태를 살펴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1-12)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나를 이 지면에서 쫓아내시온즉 (중략)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3-14)고 말합니다.
가인은 자신이 지은 죄는 잊고 자신이 받을 벌의 무거움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가인에게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면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고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가인은 그 표를 달고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으로 갑니다.
에덴 동편 놋 땅은 지리적 개념이 아닙니다.
에덴이 어떤 지역이 아니라 ‘생명, 기쁨’인 것처럼, 놋은 ‘유리, 방황’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면 누구나 올바른 방향을 모른 채 그 삶은 방황으로 점철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삶이 창세기 4장 1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으로 명명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참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을 쌓거나 점령을 하면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갈렙이 ‘기럇 아르바’ 성을 점령하고 그 이름을 ‘헤브론’이라 명명합니다.
‘기럇 아르바’는 아르바란 사람의 성이란 뜻이며
헤브론은 ‘연합하다’는 뜻으로,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교회를 자신의 왕국으로 삼고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교인들이 모였더라도
그 교회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 내건 바벨탑에 불과합니다.
‘바벨’은 ‘혼란’이란 뜻입니다.
목사의 이름을 높이 내걸수록 교회의 혼란은 커집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아무리 강화하려 해도
잘 되지 않고, 강화했어도 마침내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배우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화시켜주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후예인 아발은 가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
(음악가)의 조상이 되고, 두발가인은 대장장이의 조상이 됩니다.
이런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그들은 나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예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인 라멕이 외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로다.”(창 5:23-24)
가인의 후예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복수와 복수심의 증폭입니다.
가인은 칠 배를 갚았다면 라멕의 복수심은 끝없이 증폭되어 열한 배를 갚겠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요압이 자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고 그의 밭에 불을 질러버립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왕위를 빼앗고 아버지를 죽이려 합니다.
자신의 죄를 생각지 아니하고 복수심만 키운 결과입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기고 군림하기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경쟁의 마음은 교만과 억울함, 도취와 복수심만 증폭시킵니다.
배워서 남 줘야 합니다.
그렇게 사노라면 하나님께서 자연히 높여주십니다.
그 많은 것을 받았던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무엘하 18장 9절의 기록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사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훗날 압살롬이 전쟁에서 패하여 쫓기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그가 가장 뽐냈던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그만 상수리나무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탔던 노새는 달아나고 압살롬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말았습니다.
뒤이어 달려온 요압이 던진 창이 그의 심장을 관통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 24:19-20)
정말 그렇습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등불은 맥없이 꺼져 버렸고, 영혼은 영원한 암흑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잘난 척하면서 폼만 잡으면 “꼴값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빛나는 외모?
나의 집안과 학벌과 부입니까?
나는 무엇 때문에 무기력하고 좌절합니까?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답게 “꼴의 값”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화여대를 다니던 예쁜 이지선 양은
대낮부터 술에 만취한 사람이 몰던 자동차에 들이받혀 화재가 나고, 온몸이 3도 화상을
입는 흉측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쓴 글입니다.
“저는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을 쓰면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1인 10역을 해내는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고 글을 쓰면서는 엄지손가락을 온전히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막대기 같아져 버린 오른팔을
쓰면서 왜 하나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깨달았습니다.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절뚝 걸으면서는 장애인들이 걷는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피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한 계획 아래 만드셨는지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 어떤 삶도 죽는 게 낫다라는 판단은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아무런 희망 없이 길 위에 고꾸라져 잠을 청하는 노숙자도, 이름 모를 들풀도, 하나님이
생명을 허락하신 이상 그의 생명은 충분히 귀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삶입니다.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네......” 이러고도 삽니다.
이런 몸이라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품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몸이라도 사랑하고 써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드리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 보스톤대학에서 재활상담 공부를 마치고 장애인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어떤 삶이라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릴 때 하나님은 사용하시고 마침내 이루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