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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50 甄萱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㪍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 六白餘秊, 揔章中唐髙宗, 以新羅之請, 遣将軍蘇定方, 以舩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圡, 歷黄山至泗泚, 與唐兵合攻, 百濟㓕之. 今子敢不立都扵完山, 以雪義慈宿憤乎.”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州)의 백성들이 환영하고 고마움을 표하였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과 변한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黃山)을 거쳐 사비(泗沘)에 이르러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삼국유사 後百濟 甄萱
三國史本傳云, “甄萱尚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 後以甄為氏. 父阿慈个以農自活, 光啓中㨿沙弗城 今尚州自稱将軍. 有四子皆知名扵世. 萱號傑出多智略.” 李碑家記云, “真興大王妃思刀謚曰白𪀚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珎干善品之子角干酌珎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是為阿慈个也. 慈之弟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尚父萱, 二子将軍能哀, 三子将軍龍盖, 四子寳盖, 五子将軍小盖, 一女大主刀金.”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는 “견훤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함통(咸通)8년 정해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个)는 농사지어 생활했는데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산주(尙州)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고 일컬었다.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중에 견훤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이비가기(李碑家記)≫에는 “진흥대왕의 왕비 사도(思刀)의 시호는 백융부인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尙父) 훤(萱)이요, 둘째 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蓋)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蓋)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蓋)이며, 딸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라고 하였다.
先遣太子及㱏将軍述希領歩騎十万趣天安府, 秋九月太祖率三軍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隔一利川相對, 王師背艮向坤而陳. 太祖與萱觀兵, 忽白雲狀如劒戟起我師向彼行焉. 乃皷行而進, 百濟将軍孝奉·徳述·哀述·明吉等望兵勢大而整, 弃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問将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在中軍.” 太祖命将軍公萱等三軍齊進挾撃, 百濟軍潰北. 至黃山炭峴, 神劒與二弟将軍冨逹·能奐等四十餘人生降. 太祖受降, 餘皆勞之許令與妻子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囚大王立其子者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僣位為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 甄萱憂懣發疽數日卒扵黄山佛舎,
먼저 태자 무(武)와 장군 술희(述希)에게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10만을 거느려 천안부(天安府)로 나가게 하고, 가을 9월(936년)에 태조는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하여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격해 나가니 신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다. 갑오일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니 고려 군사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군대를 사열하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흰 구름이 일어나 적군을 향해갔다. 이에 북을 치고 나아가니 후백제의 장군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은 고려 군사의 형세가 크고 정돈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 앞에 나와 항복했다. 태조는 이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말하기를, “원수(元帥)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는 장군 공훤(公萱)등에게 명하여 삼군을 일시에 진군시켜 협격(挾擊)하니 백제군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黃山) 탄현(炭峴)에 이르자 신검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 태조는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妻子)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도록 허락했다. 태조가 능환(能奐)에게 묻기를, “처음에 양검 등과 비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은 네 꾀이니, 신하된 의리(義理)로서 의당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하니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그를 목베어 죽이게 하였다. 신검이 참람되이 왕위를 빼앗은 것은 남의 위협으로,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 항복하여 죄를 빌므로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하였다. 견훤은 분하게 여겨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黃山)의 불당에서 죽으니 때는 9월 8일(936년)이고 나이는 70이었다.
기록상으로는 한반도 남부의 마지막 백제지와 관련이 있으나, 황산 탄현이 견훤의 활동지를 찾는 키워드이다. 이중재 같은 이는 고금지명대사전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황당스럽게 익도를 감숙성으로 보고 있고 이를 퍼트리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