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5일 사순 제5주간 (화) 복음 묵상 (요한 8,21-30) (이근상 신부)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8-29)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뒤, 그제서야 그를 보고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그와 하느님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니, 십자가에 매달린 그를 보는 것이 모든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다.
슬픈 영화도, 공포 영화도 보기 힘든 연약한 이들에게 예수의 처참한 패배는 후루룩 건너뛰고싶은 재미없는 파트. 거길 후루룩 건너뛰고나면 다시 또 다시 돌아가야하는 쳇바퀴.
예수는 내내 소재파악이 힘든 떠돌이였는데, 결국 그의 주소는 십자가.
우리의 기도는 거기에 높게 매달린 이에게 보내는 편지. 장난처럼, 가볍게, 심드렁하게 게으른 말들은 참혹하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2522971667833950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8-29)
'붕뜨다'라는 표현이 있다.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인데, 몸이 붕뜰 때, 마음은 질정없이 붕뜰 수 밖에 없다. 땅에 발을 디딘다는 건, 의지할 바닥이 있다는 것이고, 어찌 움직여야 하는지 아는 세계 위에 있다는 것이며, 마음도 관계도 튼튼하다는 걸 뜻한다. 이에 반해 공중에 뜬 사태란,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 십자가는 그런 의미에서 손이나 발에 못이 박힌 아픔보다 디딜 땅을 잃은 자의 외로움이 더 진한 사태라고 여겨진다. 그에게서 버려졌으나 다른 이를 찾아갈, 한 발을 놓을 수 없는 상태.
예수님은 바로 그 때, 그가 누구인지 세상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는데, 세상만이 아니라 누구보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참으로 깨닫는 순간일 것이라 감히 짐작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들어 올린 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를 들어 올린 뒤'에서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없는 이들끼리 서로를 깨달으리라는 믿음. 곰곰이 담아두면 절로 자라는, 봄새순같은 위로.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2523420061122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