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향토사 탐방 - 청기면 기포리와 회곡고택
- 유학과 문풍을 일으킨 회곡 권춘란과 기포리마을 -
1.갯마을이 합쳐져 이룬 마을, 기포리(基浦里)
기포리는 본래 영양군 청이면(靑二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에 이르러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골개머리 · 멧개울 · 안맷개울 · 탑생이 · 옥생이 · 포두 등을 합하여
기포리라고 부르게 된 것이 기포리란 이름의 시작이다. 이 동네는 마을 북쪽으로 재를 넘으면 당리(唐里)가
나오고, 마을의 앞뒤가 산으로 꽉 막혀서 비교적으로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은 편이다.
산 아래로 청기천을 따라 이어진 밭들이 마을 안의 경지 대부분을 차지하며, 마을은 청기천을 굽어보는 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회곡고택이 있는 맷개울 · 메깔 · 기포(幾浦)는 마을 앞을 흐르는 청기천이 한줄기가 한곳으로 흐르지 않고
여러 줄기로 흘러내려 그 모양새가 마치 부챗살이었기 때문에 지명을 몇 개울로 불렀다가 오늘날에는 메깔로
부르게 되었다. 맷깔의 안쪽 골짜기에 위치한다 하여 불리게 된 안맷개울 또는 내기포(內幾浦) 마을은 지금은
안맷깔보다는 골매깔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청기천이 기포리의 마지막 골짜기를 지나가는 곳에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일명 골갯머리
혹은 내포두(內浦頭)라고 불리는 마을이다. 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산촌마을이다.
옛날에 탑이 있다고 하여 탑생이 또는 탑산(塔山)이라고 불리는 마을은 지금은 탑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옛날에는 이 곳에 탑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옥생이 혹은 옥산(玉山)이라고 불리는 마을은 경주의 토함산
저리가라 할 정도의 옥을 생산하였는데 이 옥으로 구슬도 만들고 피리도 만들었다 한다.
2.안동권씨 회곡 권춘란(權春蘭, 1539~1617)
자는 언회(彦晦)이고, 호는 회곡(晦谷)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신라 말기에 왕건을 도와 고창(지금의 안동시)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우고 태사(지금의
부총리에 해당) 권행(權幸)의 후예이다. 그의 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통예원좌통예(通禮院左通禮) 행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 추증된 권모(權模)이고,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된 권석충(權錫忠)이다.
권춘란은 1539년(중종34)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서 권석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고결한 인품을 숭상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위사람들이 장래에 그가 크게
빛날 것으로 기대했다. 어린 나이에 감히 할 수 없는 주역(周易) 공부에 관심을 보여 틈만 나면 주역의 괘효
(卦爻)를 본따서 그렸다. 한번은 이런 그의 행동을 부친이 보고는 “이것은 대인(大人)이 배우는 것이어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권춘란은 오히려“저는 항상 대인의 뜻을
사모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부친이 학문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구봉령(具鳳齡)에게 그를 보내는 계기
가 되었다.
본격적인 배움의 길에 나선 권춘란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새벽 일찍 서당 앞에 가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으니, 배움에 대한 열정이 한결같았다. 그리하여 수업의 진도 또한, 남보다 빨랐으며,스승인 구봉령
에게 배운 뒤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미 구봉령을 통하여 선생의 총명과 인품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황은 찾아온 선생을 위해 윗자리를 피하면서 매우 정중히 대하였다고 한다.
권춘란은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동찰방, 정언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아갔다. 비록 관직생활을 짧게 하였지만, 공직에 나아가면 그는 언제나 민심을 살펴 불쌍한 백성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군수 시절에 백성들이 미신을 좋아해서 음사(淫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는 단호히 철폐령을 내려 영주의 해괴한 풍속을 없앴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관직생활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다. 다만, 오직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는 데에만 뜻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말년에 회곡고택에서 지낼 때 안동에 이름난 선비인 류성룡(柳成龍)과 의문
나는 점을 편지로 주고받기를 좋아하였다.
권춘란의 효행과 우의가 아주 깊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계실 때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달여 드려
한 달 만에 낫게 하였고, 스승인 구봉령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달려가 간병하기를 부모 모시듯
하였다. 또한,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상일에 나서기를 싫어하였지만,선생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돕는 한편 의병장 김윤명(金允命) 휘하에 들어가 맞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개국공신
(開國功臣)의 집안, 안동권씨.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權幸)의 본래 성(姓)은 경주 김씨이다.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가 대치하고 있던 시대인 서기 930년(경순왕4) 왕건의 이끄는 고려군이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고창군(高昌郡: 지금의 안동)에서 대치하자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려군을 도와 후백제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여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권행에게 권씨(權氏) 성을 내린 것에서
안동 권씨가 시작되었다.
안동권씨는 10세(世)를 전후하여 크게 15파로 갈라진다. 그중에서도 추밀원부사공파(樞密院副使公派:
權守平)와 복야공파(僕射公派: 權守洪), 인가파(仁可派), 좌윤공파(佐尹公派: 權至正)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권춘란은 이러한 집안에서 권행의 24세손으로 태어났다.
- 관련유물회곡고택으로 들어오는 길에 있는 사당에 회곡선생문집(晦谷先生文集), 장곡선생유서통
(藏谷先生諭書筒)과 교지(敎旨), 옥관연(玉冠硯), 옥관자(玉冠子), 관인(官印), 호패(號牌), 공신록(功臣錄),
행장기(行狀記) 등 가문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유세통[유서통(諭書筒)]'유세통'은 '유서통(諭書筒)'에서 온 말로, 유서통은 옛날에 임금이 고관(高官)들
에게 중대한 어명(御命)을 내릴 때에 어명을 적은 지령서를 유서(諭書)라고 하였으며, 그 '유서(諭書)를
담은 대나무 통'을 일러서 '유서통(諭書筒)'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유서통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공문서
(公文書)이기 때문에 엄중한 보호가 필요했다.이에 나라에서는 이 유서통을 메고 가는 자(者)에게 만약
길을 가로막거나 시비를 걸거나 방해를 하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강력한 법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니, 신분이 높지 않던 전령(傳令)들은 이 유서통을 메고 가면서 평소에 천한 신분으로
말미암아 푸대접을 받았던 양반 권력층에 대해서 한 풀이라도 하듯이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 거들먹거려도
감히 그 누구도 대항하며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따라서 유서통을 멘 전령들은 주막(酒幕)이나 관아(官衙), 심지어는 양반들에게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행패를 부리곤 하였다.그 이후로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행패를 부리는 자를 일러서 "무슨 '유세통'을 짊어
졌냐"고 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유세를 부린다'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3.회곡고택(晦谷古宅)
명 칭 : 회곡고택(晦谷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 261
건 축 주 : 권춘란(權春蘭, 1539~1617)
건축시기 : 1592년(추정)
이건시기 : 1738년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9호, 1988.09.22 지정
- 건축 이야기
회곡고택은 권춘란에게 맏아들을 입양한 동생 권춘계(權春桂)가 임진왜란 직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뒤에 권춘란이 만년에 살던 곳이다. 이후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이 있는 영양으로 입향하였다고 하나 고택이
옮겨온 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다만, 사당은 원래 정침의 우측에 있었던 것을 1738년(영조14)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기록이 사당의 상량목에 남아 있다.
- 건축 특징회곡고택은 정침에 있는 안방에서 외여닫이문으로 윗방을 통해야만 안대청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이채롭다.
사당이 고택의 앞에 배치되어 있어 일반적인 종택? 고택의 사당 배치구조와는 다르며, 또한, 사당의 전면에
퇴칸을 둔 구조는 경북북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라고 하겠다.-건축 구성회곡고택은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5칸, 측면5칸 규모의 ㅁ자형 맞배지붕 건물이다.
산기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서 돌로 기단을 쌓아 바닥을 평평하게 하였다. 대문의
좌측에는 외양간과 부엌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공간을 배치하였는데, 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이루어
져 있다. 사랑마루 뒤에는 중방 1칸을 연접시켰고, 안채는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윗방과 건너방을
두었고, 윗방의 전면에는 안방과 부엌을 연접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건너방의 전면에는 고방
과 통래칸이 사랑채 뒤쪽의 중방과 연접되면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사당은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기와 건물이다.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토석담장을 두르고, 전면에 사주문을 세워 사당으로 출입케
하였다. 세 칸을 모두 통하게 하여 장마루를 깔았고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