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통일/역사=플러스코리아 심제] <고려사>를 살펴보면, 불교국가 고려는 1년에 한 번씩 승려들을 궁중의 회경전에 모아놓고 공양을 드리는 의식을 거행했다고 나온다. 이 전통은 태조왕건시대 부터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기 전에는 회경전에서, 소실 후 새로 짓고 나서는 대관전에서 어김없이 공양은 거행되었다.
그런데 고려사 기록에는 매년 정월, 빠짐없이 3만명의 승려를 한꺼번에 회경전에 모아 공양을 거행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격구장으로 쓰였다고 나온다. 고려 의종은 격구를 특히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였고, 특히 무신을 홀대하다 결국 정중부의 ‘무신의 난’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한다.
아래는 일제식민시대에 일본인들이 조사하여 작성한 <조선고적도보> 에 기록된 개성궁궐터중에 제일 크고 화려했다는 회경전에 대한 기록이다.
[만월대는 거의 고려 전기간 동안 왕궁이 자리잡고 있었던 유적이다. 원래 이 궁궐 안에 <망월대>라고 하는 궁전이 있었는데 후세 이 궁궐 전체를 만월대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 기슭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고려 황궁은 궁성과 황성을 합하여 125만㎡, 궁성만 약 39만㎡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만월대의 특징은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 경사면면에 건물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여러 개의 건물들이 하나의 건축 군으로 묶어지고 건물들의 지붕이 층층으로 나타나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한 것이다. 황궁에는 황성의 정문인 동쪽의 광화문과 궁성의 정문인 남쪽의 숭평문, 그 뒤에 연이어 세운 신봉문, 창합문 등 많은 문이 있었다. 정면 7간(27.24m), 측면 4간(11.12m)으로 된 신봉문터에는 지금도 3개의 문길을 가진 2층 문루의 장엄하고 화려하였던 옛모습을 상상케 하는 커다란 주춧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만월대의 중심 축대 위에는 회경전, 장화전, 원덕전과 그밖의 건물들이 규모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맨 앞 회경전의 축대 정면에는 높이 7.8m되는 커다란 돌계단이 놓여 있다. 만월대의 기본정전의 회경전터는 동서 약 60m, 남북 약 100m의 네모난 회랑으로 둘러막혀 있다. 황성의 성벽은 후삼국때 태봉국이 쌓았던 발어참성 성벽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그 안을 따로 가로막아 궁성 성벽으로 삼았다.
만월대에서는 기와와 벽돌, 치미, 괴면, 기둥밑장식 등 적지 않은 유물들이 나왔다. 유물들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것을 계승한 점들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괴면과 기둥밑 장식은 발해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고려 왕궁의 만월대는 고려시기 궁성제도와 건축기술의 발전된 높이와 함께 왕궁의 규모와 배치, 건물들의 평면구조와 건축 부재 등을 통하여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 자료출처 (조선유적유물도감)]
▲ 고려 궁궐 만월대 포함 회경전터 항공사진(위키맵피아) © 심제 |
|
이를 근거로 필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회경전 터 넓이- 넓이 60m x 길이100m (1801평)
2. 회경전 건물터 넓이-회경전 본전터의 기단 평면은 고구려시대 이래 이어져 온 전통형식
정면 9칸(39.35m), 측면 4칸(16.86m)- (총 200평)
3. 회경전에서 사용가능 앞뜰 면적(추정)- 항공사진상 건물이 들어앉은 위치와 앞뜰의 넓이는 대략 회경전터 넓이(60m)벽에서 통로 각 5m씩(총10m)을 빼고 전각앞에서 문앞 까지 대략 길이 60m=넓이 50m x 길이60m (약 910평)
4.승려1인 평균 1㎡ ( 앉아서 공양받을때 사방통로 포함)차지 3만명의 경우는 30,000㎡ (약9,000평)
따라서 지금의 개성에서 남북이 공동조사하였다는 회경전 전각터는 겨우 1000여평 정도로, 이는 3만명의 승려를 한꺼번에 모시고 공양 할 수 없으며 그 터에서 했다면 열흘동안 계속 거행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고려사 아무데도 없다.
또한 1천평의 넓이의 회경전 앞뜰을 격구장으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넓이이다. 달리는 말이 급회전을 하려해도 직경 7미터는 필요하다. 현대의 마장 마술 경기장도 넓이 20m x 60m가 필요하다. 그런데 가속에 급정지에 회전 그리고 주행을 하려면 최소한 가로 세로 150미터 이상의 넓이는 되어야 할 것이다. 못 믿겠다면 현재까지 남아있는 아랍의 중세 폴로(Polo -격구)경기장을 가서 재어보라 !
어찌된 일인가?
고려사의 태조서 부터 역대 왕까지의 공양기록이 거짓인가? 아니면 현 개성의 회경전터가 거짓인가?
대한민국의 사학자들, 특히 강단사학자들은 밝혀라 역사의 진실을....
*각주: 필자를 대륙고려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고려는 분명히 한반도와 대륙을 같이 경영했던 국가로 판단한다. 왜냐하면 고려는 통일 신라의 땅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본인은 고려왕건이 사천성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신빙성이 없기 때문이다.
왕건은 한주사람이고 한주는 바로 평주이며 지금의 하북 평산이다. 평산은 바로 산서성 이현과 정형부근이며 그는 후당시기 그 지역인 진주절도사 지냈으며 요사에는 정해군절도사라고 분명히 나온다. 그래서 그가 평양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한주를 고금지명대사전으로 찾으면 바로 사천성으로 나오기에 그가 사천성 사람이고 전촉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선사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조선이 한반도에 없었고 대륙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불성설이다. 조선은 한반도와 하북과 산동 일부를 임내 지역이라 하여 같이 경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