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생각은 나그네, 집착하지 않으면 깨끗해져 서울 구룡사 일요법회에서 자장율사와 원불사상 법문 모든 존재에는 자성 없어 나 아닌 대상 쫓아다니면 그 순간 자신은 '머슴' 돼 '그것에 그것이 없다' 는 것 깨달으면 지각만 남을 뿐 지난 3월29일 서울 구룡사 일요법회 법사로 나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스님은 자장율사와 원불사상을 주제로 법문했다. 이 자리에서 스님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정진한 자장율사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와 함께 자장율사가 문수보살로부터 전해 받은 게송인 '요지일체법자성무소유 여시해법성즉견노사나 (了知一切法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卽見盧舍那)' 를 통해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날 종범스님의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와 원불사상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당나라 유학 시절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서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낯선 스님이 나타나 게송을 일러주었는데 깨고 나니 범어로 된 게송이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를 때 한 스님이 나타나 그 뜻을 풀어주고 꿈에 나타난 이가 문수보살이라고 알려줬다. 이 때 범어를 해석해준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문수보살이다. 그럼 문수보살이라고 알려주신 분은 또 누구냐 하면 그 분도 문수보살이라는 것이다. 자장율사는 태백산 정암사에서 오랫동안 있었는데, 문수보살 친견하는 게 서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지행색을 한 이가 죽은 강아지를 들고 자장율사를 보러 왔다고 소리쳤다. 초라한 걸인이 나타나 소리치자 당황한 시자는 돌아가라고 내쫓았다. 만남을 거절당한 걸인이 돌아가기 전 죽은 강아지를 툭 치니 금사자로 변했다. 오색광명이 나타나고 걸인은 금사자를 타고 갔다. 자장율사가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넘어 쫓아가니까 아무도 없었다. 자장율사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자장율사의 문수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전해진다. 문수는 곧 비로자나불인데, 비로자나불이 지혜로 출현할 때 문수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은 노사나불이기도 하다. 이 분을 보현이라고 하는데,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너르게 나타난다고 해서 '산색문수안(山色文殊眼) 수성관음이(水聲觀音耳)' 라고도 한다. 산색이 문수의 눈이고 물소리가 관음의 귀라는 뜻이다. 지각이 없으면 물이 있을 수 없고, 소리가 있을 수 없다. 지각이 없는 손과 발이 있을 수 있나. 보고 듣고 움직이는 전부가 노사나, 비로자나불이다. 그런데 만날 땐 모른다. 꿈에서 게송을 가르쳐줬다면, 꿈속에서 만난 이가 문수다. 범어로 된 게송을 한자로 새겨준 이도 문수고, 문수라고 알려준 존재도 문수다. 가장 빈곤하고 천하고 가진 것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분도 문수였다. 그걸 알고 자장이라고 하는 것에서 진문수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수도 보이지 않고 자장도 보이지 않을 때 전문수(全文殊), 온전한 문수가 된다. 문수가 안보이니까 자장스님이 열반에 드신 것이다. 문수와 자장이 보이지 않을 때 무엇이 나타나나. 온전한 문수가 나타나는 것이다. 온전한 문수로 돌아가는 것, 그런 수행을 한 것이 자장스님의 문수신앙이다. 스님이 중국에서 문수보살에게 기도할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르쳐준 게송이 무엇이냐.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데 '요지일체법자성무소유 여시해법성즉견노사나 (了知一切法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卽見盧舍那)' 이다. 이 게송은 <80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에도 나온다. 이 게송을 자장스님이 문수보살한테 받은 것이다. <한글대장경>에서는 이 게송의 뜻을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법의 본성을 알면 바로 노사나불을 보는 것이다" 라고 풀이했다. 불교의 근본을 말해주는 구절이라, 절에서 이 게송에 대한 법문을 계속 한다. 스님들이 이것을 전법게로 써주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이 게송을 자세히 보면,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는 것과 노사나불을 바로 본다는 것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말인 즉 일체법에 자성이 없는 걸 알면 바로 노사나불을 본다는 뜻이다.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는 말을 하나씩 살펴보면, 일체는 모든 것이고 법은 존재라는 의미다. 모든 존재에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성은 자기만의 성격을 말한다. 다른 데 아무데도 없는 자기만의 성질은 유일성, 하나밖에 없어야 하고 불변성, 변하지 않아야 한다. 또 하나가 주체성, 그것이 하려고 한다면 해내는 것이다. 유일성 불변성 주체성 세 가지 특성을 가져야만 자성이라고 한다. 어느 곳에도 유일한 것은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없고, 무엇을 한다고 하면 다 되는 주체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깨닫지 못해서 나 아닌 대상을 쫓아다닌다. 경계나 대상을 쫓아다니면 그 순간 내가 머슴이 되고 쫓아가는 대상이 주인이 된다.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냐" 고 말한다. 누가 애쓰라고 했나. 자청해서 애쓴 것이지. 이를 배각합진(背覺合塵)이라고 한다. 자기 깨달음, 본래의 앎을 마음을 등지고 보이는 대상만을 쫓아다닌다는 말이다. 반대로 멸진합각(滅塵合覺)이란 말도 있다. 왜 그렇게 쫓아갈까. 거기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줄 알고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꾸 합진을 하느냐. 자성이 없다는 걸 몰라서 그렇다. 경계에 왜 끌려가느냐 하면 자성이 없다는 걸 몰라서 그런다. 그것에 자성이 없다는 걸 알면 쫓아가지 않을 것이다. 멸진을 하면, 쫓아갈 대상이 없어지니까 자기에게 돌아온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것에 그것이 없다" 는 걸 명심하자. 하늘에 하늘이 없다. 땅에 땅이 없다. 땅에 자성이 없으니까. 죽는 데 죽는 게 없다. 죽는 게 별거 아니다. 숨 못 쉬면 죽는 것이다. 사는 데 사는 게 없다. 사는 게 별거 아니다. 숨 쉬면 사는 거다. 아무 것도 아니다. 삶에 집착해야 할 아무 이유도 없고, 죽음을 싫어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에 그것이 없다는 게 곧 인연법이다. 이걸 깨달아서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것이다. 그릇에 그릇이 없다. 사람에 사람이 없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나이 많고 눈썹 희다고 뭐라고 하는데 늙음에 늙음이 없다. 젊음에 젊음이 없다. 이게 일체법이고 연기법이다. 인연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것이다. 고정불변한 유일불변성이 없다. 그래서 하나도 내가 쫓아갈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뭐 하나 취하면 좋은 게 있는 줄 알고 쫓아가는데 그걸 경혹이라고 한다. 경계에 미혹하면 윤회하는 것이고, 경계에 미혹하지 않으면 멸진한다. 자성이 없는 줄 알고 안 쫓아가면 내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것에 그것이 없다." 그걸 알면 경혹하지 않는다. 그럼 나의 지각만 있다. 그것이 멸진합각이다. 그러면 생각만 있다. 생각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경계에서 온다. 봤던 것 들었던 것처럼 물질적인 감각이 없으면 생각은 없다. 생각은 나그네로, 전부 밖에서 온다. 생각이라는 것은 무조건 근원이 밖이다. 물질적인 대상을 보고 자라는 게 생각이라, 물질적인 대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조용하다. 먹이가 끊어져 활동할 에너지가 없다. 미워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면 생각이 조용해진다. 생각을 멈추면 윤회는 없다. 윤회는 생각이다. 생각은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경계가 자성이 없는 것을 아니까, 대상을 쫓는 생각이 멈춘다. 생각이 멈춰 가만히 보니 생각도 자성이 없다. 경계도 생각도 자성이 없음을 훤히 비춰보는 것 하나만 남는다. 이것을 '지각' 이라고 한다. 경계도 생각도 사라지면 지각 하나 온전히 남는 데 이것을 노사나라고 한다. 생각이 조용해지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훤히 보는 하나가 남는다. 생각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밑에 지각이 있다. 그런 생각이 조용하고, 경계가 조용하면 홀로 드러나는 지혜가 있다. 부처라고 하면 지혜를 깨닫는다고 해서 불신이라고 한다. 노사나불을 본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세상에 노사나불 하나뿐이다. 일체 존재하는 것은 법이다. 법인데 법에는 뭐가 있느냐 '지(智)' 가 있다. 지 없는 법은 없다. 그래서 '소견경(所見境)' 이다. 주체적 지가 없으면 대상적 사물은 없다. '소견경' 을 보려면 내가 보는 뭐가 있어야 한다. 중생은 내가 죽는다라고 하면 죽는다는 경계만 있다. 눈 감는다는 경계, 맥이 뛰지 않는다는 경계만 안다. 눈을 감는다는 것을 느끼는 뭔가가 있다. 느낌 없이 법이 존재할 수 없다. 안경을 산다고 가정하자. 이게 좋다고 느끼는 뭐가 있어야 좋다고 사지 않겠나. 그게 노사나불이다. 경계가 공함을 알 때 생각도 공해진다. 경계도 공해지고 생각도 공해지면 노사나불만 나타난다. 그 땐 경계도 생각도 같다. 경계도 공해지고 마음도 공해지면 하나의 존재만 남게 되고,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된다.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되면, 손을 움직이면 손이 내 마음이다. 죽는 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 없이 죽는 게 존재할 수 없지 않느냐. 내 마음 없이 고운 사람도, 미운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사도 나고, 보는 것도 나고, 지옥도 나고 극락도 나다. 이게 전부다 중생이 경계에만 미혹해서 여기와 저기가 천양지판으로 가는 데, 경계가 공한 줄 알면 경계를 쫓아가지 않는다. 뭔가 훔치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아무 것도 없으면 훔칠 마음이 안 나지 않겠냐. 중생이 미혹한 것은 여기 뭔가 있는 줄 알고 물질만 쫓아가고 집착하고 소유하려고 한다. 물질을 보는 내 생각은 물질을 쫓아가는 한 자꾸 더 복잡해진다. 물질과 사람이 아니면 생각이 복잡할 수 없다. 사람과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도인이 아니라도 생각이 조용하다. 얼굴이 깨끗하고 불만이 없다. 그러다 나중에 하나의 지혜만 드러나고,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자성이 없는 것인가. 운등치우(雲騰致雨) 노결위상(露結爲霜)이다. 구름이 올라가서 비가 되고, 이슬이 맺혀 서리가 내린다. 구름도 자성이 없고 이슬도 자성이 없고 서리도 자성이 없다. 이게 제법무상이다. 이 몸은 자성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 안 만났으면 없고, 먹고 자고 입지 않으면 몸이 없다. 운등치우 노결위상이 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여기 미혹해서 집착한다. 그러니 생각이 복잡하다. 잘 났니 못 났니 하는데 자성 없는 얼굴 못생기면 좀 어떤가. 어떤 것이 노사나불인가. 차를 달이고 향을 피우니 옛 맛이 더 새롭다. 나무아미타불 <CENTER><BR> <TABLE title=나무아미타불 cellSpacing=0> <TBODY> <TR> <TD> <TABLE style="HEIGHT: 965px; WIDTH: 850px" cellSpacing=10 cellPadding=25 width=965 align=center bgColor=#0d1e27 border=1 %> <TBODY> <TR> <TD style="FILTER: progid:DXImageTransform.Micros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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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FAMILY:><SPAN style="FONT-SIZE: 14pt; FONT-FAMILY: Batang,바탕,serif; COLOR: #00d8ff"> </SPAN><SPAN style="COLOR: skyblue">서울 구룡사 일요법회에서 자장율사와 원불사상 법문 모든 존재에는 자성 없어 나 아닌 대상 쫓아다니면 그 순간 자신은 '머슴' 돼 '그것에 그것이 없다' 는 것 깨달으면 지각만 남을 뿐</SPAN> <IMG border=10 src="http://www.ibulgyo.com/news/photo/201504/140407_85881_1314.jpg" height=400 widht="500"> 지난 3월29일 서울 구룡사 일요법회 법사로 나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스님은 자장율사와 원불사상을 주제로 법문했다. 이 자리에서 스님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정진한 자장율사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와 함께 자장율사가 문수보살로부터 전해 받은 게송인 '요지일체법자성무소유 여시해법성즉견노사나 (了知一切法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卽見盧舍那)' 를 통해 자성이 없다는 것을 깨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날 종범스님의 법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와 원불사상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당나라 유학 시절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서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낯선 스님이 나타나 게송을 일러주었는데 깨고 나니 범어로 된 게송이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를 때 한 스님이 나타나 그 뜻을 풀어주고 꿈에 나타난 이가 문수보살이라고 알려줬다. 이 때 범어를 해석해준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문수보살이다. 그럼 문수보살이라고 알려주신 분은 또 누구냐 하면 그 분도 문수보살이라는 것이다. 자장율사는 태백산 정암사에서 오랫동안 있었는데, 문수보살 친견하는 게 서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지행색을 한 이가 죽은 강아지를 들고 자장율사를 보러 왔다고 소리쳤다. 초라한 걸인이 나타나 소리치자 당황한 시자는 돌아가라고 내쫓았다. 만남을 거절당한 걸인이 돌아가기 전 죽은 강아지를 툭 치니 금사자로 변했다. 오색광명이 나타나고 걸인은 금사자를 타고 갔다. 자장율사가 그 얘기를 듣고 고개를 넘어 쫓아가니까 아무도 없었다. 자장율사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 자장율사의 문수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전해진다. 문수는 곧 비로자나불인데, 비로자나불이 지혜로 출현할 때 문수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은 노사나불이기도 하다. 이 분을 보현이라고 하는데,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너르게 나타난다고 해서 '산색문수안(山色文殊眼) 수성관음이(水聲觀音耳)' 라고도 한다. 산색이 문수의 눈이고 물소리가 관음의 귀라는 뜻이다. 지각이 없으면 물이 있을 수 없고, 소리가 있을 수 없다. 지각이 없는 손과 발이 있을 수 있나. 보고 듣고 움직이는 전부가 노사나, 비로자나불이다. 그런데 만날 땐 모른다. 꿈에서 게송을 가르쳐줬다면, 꿈속에서 만난 이가 문수다. 범어로 된 게송을 한자로 새겨준 이도 문수고, 문수라고 알려준 존재도 문수다. 가장 빈곤하고 천하고 가진 것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분도 문수였다. 그걸 알고 자장이라고 하는 것에서 진문수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수도 보이지 않고 자장도 보이지 않을 때 전문수(全文殊), 온전한 문수가 된다. 문수가 안보이니까 자장스님이 열반에 드신 것이다. 문수와 자장이 보이지 않을 때 무엇이 나타나나. 온전한 문수가 나타나는 것이다. 온전한 문수로 돌아가는 것, 그런 수행을 한 것이 자장스님의 문수신앙이다. 스님이 중국에서 문수보살에게 기도할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르쳐준 게송이 무엇이냐.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데 '요지일체법자성무소유 여시해법성즉견노사나 (了知一切法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卽見盧舍那)' 이다. 이 게송은 <80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에도 나온다. 이 게송을 자장스님이 문수보살한테 받은 것이다. <한글대장경>에서는 이 게송의 뜻을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법의 본성을 알면 바로 노사나불을 보는 것이다" 라고 풀이했다. 불교의 근본을 말해주는 구절이라, 절에서 이 게송에 대한 법문을 계속 한다. 스님들이 이것을 전법게로 써주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IMG border=10 src="http://www.ibulgyo.com/news/photo/201504/140407_85882_1314.jpg" height=400 widht="500"> 이 게송을 자세히 보면,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는 것과 노사나불을 바로 본다는 것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말인 즉 일체법에 자성이 없는 걸 알면 바로 노사나불을 본다는 뜻이다. 일체법에 자성이 없다는 말을 하나씩 살펴보면, 일체는 모든 것이고 법은 존재라는 의미다. 모든 존재에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성은 자기만의 성격을 말한다. 다른 데 아무데도 없는 자기만의 성질은 유일성, 하나밖에 없어야 하고 불변성, 변하지 않아야 한다. 또 하나가 주체성, 그것이 하려고 한다면 해내는 것이다. 유일성 불변성 주체성 세 가지 특성을 가져야만 자성이라고 한다. 어느 곳에도 유일한 것은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없고, 무엇을 한다고 하면 다 되는 주체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깨닫지 못해서 나 아닌 대상을 쫓아다닌다. 경계나 대상을 쫓아다니면 그 순간 내가 머슴이 되고 쫓아가는 대상이 주인이 된다.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느냐" 고 말한다. 누가 애쓰라고 했나. 자청해서 애쓴 것이지. 이를 배각합진(背覺合塵)이라고 한다. 자기 깨달음, 본래의 앎을 마음을 등지고 보이는 대상만을 쫓아다닌다는 말이다. 반대로 멸진합각(滅塵合覺)이란 말도 있다. 왜 그렇게 쫓아갈까. 거기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줄 알고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꾸 합진을 하느냐. 자성이 없다는 걸 몰라서 그렇다. 경계에 왜 끌려가느냐 하면 자성이 없다는 걸 몰라서 그런다. 그것에 자성이 없다는 걸 알면 쫓아가지 않을 것이다. 멸진을 하면, 쫓아갈 대상이 없어지니까 자기에게 돌아온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그것에 그것이 없다" 는 걸 명심하자. 하늘에 하늘이 없다. 땅에 땅이 없다. 땅에 자성이 없으니까. 죽는 데 죽는 게 없다. 죽는 게 별거 아니다. 숨 못 쉬면 죽는 것이다. 사는 데 사는 게 없다. 사는 게 별거 아니다. 숨 쉬면 사는 거다. 아무 것도 아니다. 삶에 집착해야 할 아무 이유도 없고, 죽음을 싫어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에 그것이 없다는 게 곧 인연법이다. 이걸 깨달아서 부처님께서 해탈하신 것이다. 그릇에 그릇이 없다. 사람에 사람이 없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나이 많고 눈썹 희다고 뭐라고 하는데 늙음에 늙음이 없다. 젊음에 젊음이 없다. 이게 일체법이고 연기법이다. 인연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자성이 없는 것이다. 고정불변한 유일불변성이 없다. 그래서 하나도 내가 쫓아갈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뭐 하나 취하면 좋은 게 있는 줄 알고 쫓아가는데 그걸 경혹이라고 한다. 경계에 미혹하면 윤회하는 것이고, 경계에 미혹하지 않으면 멸진한다. 자성이 없는 줄 알고 안 쫓아가면 내 마음으로 돌아온다. "그것에 그것이 없다." 그걸 알면 경혹하지 않는다. 그럼 나의 지각만 있다. 그것이 멸진합각이다. 그러면 생각만 있다. 생각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경계에서 온다. 봤던 것 들었던 것처럼 물질적인 감각이 없으면 생각은 없다. 생각은 나그네로, 전부 밖에서 온다. 생각이라는 것은 무조건 근원이 밖이다. 물질적인 대상을 보고 자라는 게 생각이라, 물질적인 대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조용하다. 먹이가 끊어져 활동할 에너지가 없다. 미워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면 생각이 조용해진다. 생각을 멈추면 윤회는 없다. 윤회는 생각이다. 생각은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경계가 자성이 없는 것을 아니까, 대상을 쫓는 생각이 멈춘다. 생각이 멈춰 가만히 보니 생각도 자성이 없다. 경계도 생각도 자성이 없음을 훤히 비춰보는 것 하나만 남는다. 이것을 '지각' 이라고 한다. 경계도 생각도 사라지면 지각 하나 온전히 남는 데 이것을 노사나라고 한다. 생각이 조용해지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훤히 보는 하나가 남는다. 생각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그 밑에 지각이 있다. 그런 생각이 조용하고, 경계가 조용하면 홀로 드러나는 지혜가 있다. 부처라고 하면 지혜를 깨닫는다고 해서 불신이라고 한다. 노사나불을 본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세상에 노사나불 하나뿐이다. 일체 존재하는 것은 법이다. 법인데 법에는 뭐가 있느냐 '지(智)' 가 있다. 지 없는 법은 없다. 그래서 '소견경(所見境)' 이다. 주체적 지가 없으면 대상적 사물은 없다. '소견경' 을 보려면 내가 보는 뭐가 있어야 한다. 중생은 내가 죽는다라고 하면 죽는다는 경계만 있다. 눈 감는다는 경계, 맥이 뛰지 않는다는 경계만 안다. 눈을 감는다는 것을 느끼는 뭔가가 있다. 느낌 없이 법이 존재할 수 없다. 안경을 산다고 가정하자. 이게 좋다고 느끼는 뭐가 있어야 좋다고 사지 않겠나. 그게 노사나불이다. 경계가 공함을 알 때 생각도 공해진다. 경계도 공해지고 생각도 공해지면 노사나불만 나타난다. 그 땐 경계도 생각도 같다. 경계도 공해지고 마음도 공해지면 하나의 존재만 남게 되고,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된다.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되면, 손을 움직이면 손이 내 마음이다. 죽는 게 내 마음이다. 내 마음 없이 죽는 게 존재할 수 없지 않느냐. 내 마음 없이 고운 사람도, 미운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사도 나고, 보는 것도 나고, 지옥도 나고 극락도 나다. 이게 전부다 중생이 경계에만 미혹해서 여기와 저기가 천양지판으로 가는 데, 경계가 공한 줄 알면 경계를 쫓아가지 않는다. 뭔가 훔치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아무 것도 없으면 훔칠 마음이 안 나지 않겠냐. 중생이 미혹한 것은 여기 뭔가 있는 줄 알고 물질만 쫓아가고 집착하고 소유하려고 한다. 물질을 보는 내 생각은 물질을 쫓아가는 한 자꾸 더 복잡해진다. 물질과 사람이 아니면 생각이 복잡할 수 없다. 사람과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도인이 아니라도 생각이 조용하다. 얼굴이 깨끗하고 불만이 없다. 그러다 나중에 하나의 지혜만 드러나고,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자성이 없는 것인가. 운등치우(雲騰致雨) 노결위상(露結爲霜)이다. 구름이 올라가서 비가 되고, 이슬이 맺혀 서리가 내린다. 구름도 자성이 없고 이슬도 자성이 없고 서리도 자성이 없다. 이게 제법무상이다. 이 몸은 자성이 없다. 어머니 아버지 안 만났으면 없고, 먹고 자고 입지 않으면 몸이 없다. 운등치우 노결위상이 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여기 미혹해서 집착한다. 그러니 생각이 복잡하다. 잘 났니 못 났니 하는데 자성 없는 얼굴 못생기면 좀 어떤가. 어떤 것이 노사나불인가. 차를 달이고 향을 피우니 옛 맛이 더 새롭다. 나무아미타불 <SPAN style="COLOR: #ffbb00">[서울 구룡사 일요법회 (2015.3.29) 종범스님 법문 (불교신문) / 편집 선재 나무아미타불] </SPAN> </SPAN></FONT></B><A href="http://cafe.daum.net/mujuseonwon/" target=_blank><IMG border=10 alt="마음의 고향 무주선원無住禪苑" src="http://cfile252.uf.daum.net/image/210FF2385437B98C2303E9" height=170 widht="270"></A> <FONT color=#ffffff><IMG border=0 src="http://pds43.cafe.daum.net/image/9/cafe/2008/06/25/13/35/4861caf46517d"></FONT><B><FONT color=brown size=2 face=바탕체><SPAN style="FONT-SIZE: 14pt"><FONT color=#ffe400>《무주선원無住禪苑》부처님 정법 도량 나무아미타불</FONT> </B></FONT></SPAN></P><FONT color=brown size=2 face=바탕체><SPAN style="FONT-SIZE: 14pt"></FONT></PRE></CENTER> <DIV></DIV></SPAN></SPAN></SPAN></TD></TR></TBODY></TR></TBODY></TABLE></P></TD></TR></TBODY></TABLE></TD></TR></TBODY></TABLE></CENTER> [법문 출처 - 서울 구룡사 일요법회 (2015.3.29) 종범스님 법문 (불교신문) / 편집 선재] 《무주선원無住禪苑》부처님 정법도량 나무아미타불
출처: 아미타불과 함께하는 마음의 고향 무주선원 원문보기 글쓴이: 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