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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도종환 시인 그리고 김명원 시인. 약속 장소인 옥천,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다. 이번 봄, 도종환 시인은 그곳에서‘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정지용 시인이 섬세하고 독특한 향토적 시어로 대상을 청신하게 묘사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면, 시인 도종환은 역사적 실천으로서의 사랑이 어떻게 개화하는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참된 인간적 미덕이 시의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증거한 시대적 시인이다.
■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충남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동인지《분단시대》1집에「고두미 마을에서」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신동엽창작상, 민족예술상, KBS 바른 언어상, 올해의 예술상(문학부문), 현대충북예술상(문학부문), 거창평화인권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또 2006년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동안 펴낸 시집으로『고두미 마을에서』(창작과비평사),『접시꽃 당신』(실천문학사),『접시꽃 당신Ⅱ-내가 사랑하는 당신』(실천문학사),『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제3문학사),『지금은 묻어둔 그리움』(푸른나무),『울타리꽃』(미래사),『당신은 누구십니까』(창작과비평사),『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한양출판),『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부드러운 직선』(창작과비평사),『하나의 과일이 익을 때까지』(샘터사),『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이름』(문학마을사),『다시 피는 꽃』(현대문학북스),『슬픔의 뿌리』(실천문학사),『해인으로 가는 길』(문학동네),『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랜덤하우스)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사계절출판사),『모과』(샘터사),『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사계절출판사),『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좋은생각) 등이 있으며 동화집으로는『바다유리』(현대문학북스),『나무야 안녕』(어린이나무생각)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 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등을 맡고 있다.
■ 김명원 시인
1959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박사이다. 1996년『詩文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와 『달빛 손가락』이 있고, 2002년 '노천명문학상'과 2007년 '성균문학상' , 2008년 제13회 '시와시학젊은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이며 웹진『시인광장』편집위원이다.
김명원의 시인탐방 3 부드러운 직선의 힘, 도종환 시인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09년 가을호(2009, Autumn) 도종환 시인은 단순한 유명세를 넘어 대중문학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극진한 그리움을 담은 그의 순정한 시집이 영화화되면서 1980년대『접시꽃 당신』으로 지고지순한 연정의 대상이 되었고, 1990년대『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에 실린 시들이 시낭송대회의 단골메뉴가 되어 암송시편의 대가가 되었으며, 2000년대 국정 교과서에 실린「어떤 마을」등을 읽지 않고는 정규 국어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시배달 작업을 하는 부지런한 그를 인터넷에서 매주 만났을 것이며, 시노래 모임 <나팔꽃>과 각종 티브이 등 영상 매체를 통해 시를 다각적으로 기획하고 유통하는 성실한 그의 모습과 마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론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어도 도종환 시는 심금을 울리는 시적 요소로 충만해 있고, 시가 양식이 된 적 없는 오지의 농부가 읽어도 눈시울을 적시는 시적 힘을 내장하고 있기에, 그의 시는 소위 인기가 있으며, 다분히 대중적이다. 현시대를 사는 독자라면 시는 몰라도 도종환 시는 알며, 시인은 몰라도 도종환은 안다. 도종환이 이 시대의 시를 풍미하고 포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시는 쉽게 읽힌다. 물론 쉽게 읽히는 시들이 어찌 다 좋겠는가. 소통만을 문제로 삼는다면 산문적 진술과 설명으로 전락한 시들이 넘쳐날 것이며, 쉬운 표현만을 근거로 삼는다면 시의 퇴보를 자청한 형국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시는 단순한 쉬움이 아니다. 간소한 형식, 검박한 시어, 진솔한 비유, 명징한 메시지에다가 기층민들에 대한 배려를 지니고 있다. 자신이 쓰되 누가 읽을 것인가를 고려한다. 자발적인 겸손이 배어있기에 그의 시가 쉽게 읽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어렵게 남는다. 쉽게 다가왔지만 두고두고 독자들을 괴롭힌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묻게 하고, 어떻게 삶을 추구해 가야하는 지의 방법을 되묻는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공평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왜 힘들여 자신의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쉬운 가르침으로 어려운 가리킴을 일깨운다. 시인을 처음 만난 것은 2003년 경기도 군포시 시민회관에서였다. 나는 당시 군포문예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고, 봄 학기를 개강하면서 특강 강사로 시인을 초청한 것이었다. 잿빛 하늘이 엄청 낮아 금시라도 눈을 퍼부을 듯 어두웠던 2월 초, 강의 시간보다 삼십여 분 일찍 나타난 그는 복사꽃 뺨을 지닌 소년과도 같았다. 혈기 좋아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는 몸이 몹시 안 좋아 휴직 상태이며 보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였고, 이웃과 나누는 삶과 시에 대해 강의했고, 판화가 이철수와의 교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때 만들어진 시가「어떤 마을」임을 알려 주었다. 강의 후 뒷풀이 장소에서 나는 시인에게 보은에서 성장한 오장환에 대해 석사 논문을 썼음을 말하였고, 그는 그 후 논문을 보내달라고 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나선 도심은 이미 경이로운 눈발 속이었고, 지척도 구분 못하는 장엄한 흰 빛 속에서 시인을 배웅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내내 시인을 하얀 그림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정의의 편에 선 하얀빛,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워진 민족의 빛, 한과 설움을 넘어서려는 의지로 빛나는 하얀색은 내가 만난 시인들을 색채로 구분하려는 나의 못 된 기호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도종환 시인은 하얀 상징으로 나에게 부조리한 시대에 맞서 민중을 향한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 역할로 자리매김 되었다. 문단 생활을 하면서 어느 곳에 편입되는 것이 몹시도 불편했던 세월이 지나 제도권의 힘을 응시하게 되었던 작년 여름, 나는 ‘한국작가회의’에 명함을 들여 놓았다. 그 곳에서 사무총장으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도종환 시인을 다시금 만나게 되었고, 재회의 기쁨을 추억으로 각인하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요청한다.
2009년 7월 25일 토요일, 짙은 폭염 속, 옥천 장령산
장마 전선이 가까이에 있다. 철없던 시절, 무지막지한 장마가 와야 여름의 서주가 시작된다고 장마가 시작되면 검은 빗속을 뚫고 환호하던 때가 있었다. 아마도『현대한국문학전집』에 실렸던 손창섭의「비오는 날」을 읽고 감흥을 받아 우중충한 음울을 즐겼던 때인가 보다. 수재민의 비운과는 상관없이 독한 장마를 즐기듯 나의 정서가 최고였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며, 그만한 나이에 민중의 처소에서 상처를 위무하고 있었을 도종환 시인을 중첩시켜 본다.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름이 깊어 수렁을 이루고 있고, 진초록 산들이 하늘과의 경계를 허물며 타오른다. 한 시인의 무릇 깊은 사랑과 애환이 거기 다 와 담기듯 눈부시다. 약속 장소인 옥천, 정지용시인의 고향이다. 그리고 이번 봄, 도종환은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정지용 시인이 섬세하고 독특한 향토적 시어로 대상을 청신하게 묘사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면, 시인 도종환은 역사적 실천으로서의 사랑이 어떻게 개화하는지를 지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참된 인간적 미덕이 시의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증거한 시대적 시인이다. 두 사람 모두 독자적인 시세계로 끊임없이 아름다운 반향을 일으킨 시인들인 것이다. 도종환 시인은 7월 25일과 26일 양일간 한국작가회의 하계수련회를 치르느라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그래도 환한 미소로 맞아주는 기품은 그의 천품일 터이다. 문학 심포지엄과《내일을 여는 작가》신인상 수상식이 끝난 뒤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가 그토록 소중히 지켜내었던 역사를 불러낸다. 시대의 역사, 시문학의 역사, 사랑의 역사, 슬픔의 역사, 아픔의 역사, 그리고 도종환 개인의 역사. 견결하게 지켜 낸 역사의 파수꾼 도종환 시인이 바로 곁에 있다.
■ 김명원: 한국작가회의 하계수련회는 잘 치르고 계신지요?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변경한 후, 첫 사무총장으로서 행사의 중심에서 일이 많으시지요? □ 도종환: 그렇죠. ‘민족’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수식 대신에, 보다 포괄적인 명칭 ‘한국작가회의’로 개칭한 후 우리 문학단체가 다시금 도약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는데요. 지금까지 견지해 온 문학정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창조적으로 쇄신하자는 거여서 첫 사무총장으로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명실상부하게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단체로 거듭나자는 의지를 표명해야 하기에 일들이 많고요. ‘한국작가회의’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모임이지요. 시대의 지성문인들로 침묵과 현실 도피를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던 한용운 선생과 이육사 선생의 뜻을 계승 발전 시켜 보자는 것이 작가회의의 취지예요. 그분들의 정신을 잘 이어받아 더 큰 일들을 해야 할 텐데요. ■ 김명원: ‘한국작가회의’의 사업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터인데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 도종환: 역시 작가들은 글로 승부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글을 열심히 쓰고 좋은 작품집을 내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원하는 일이 제일 중요한 사업이고요. 회원들 상호간의 유대와 소통 내지는 화합을 위한 행사를 도모하기도 하지요. 나아가서 북한작가를 포함하여 작가회의 산하에 있는 베트남, 인도, 미얀마, 몽골, 팔레스타인작가들과 문학적으로 연대하고 교류하는 일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 김명원: 해외 교류 사업은 흥미로운 일인데요. 한국이라는 지역적인 지평을 넘어서 세계와 함께하는 문학의 힘이 느껴집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실적물이 있는지 듣고 싶어지네요. □ 도종환: 작가회의뿐 아니라 민예총 회원들과 함께 베트남 후옌성 호아빈 초등학교에 8개 교실을 지어 주었어요. 예술인들이 그림을 팔고, 자선 공연을 하고, 저 역시 시집『해인으로 가는 길』의 인세 전액을 기부해서 만든 초등학교지요. 앞으로도 계속 교류하고 지원할 계획을 갖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과거 민족 문제가 절박한 문학적 과제였지만 이제 남북관계가 해빙되는 등 문학적 환경이 달라졌고, 제3세계와의 문학적 교류가 활발해지는 등 우리 문학의 영토가 남과 북을 넘어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확장되어야 하는 시점이에요. 한국 작가들의 관심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넓혀지고 있는 점, 참 고무적인 현상이지요. 이미 세계가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가고 있는데 문학만 제 문화를 고집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여러 나라의 다각적인 현실에 문학을 통해 도와주고, 교류하고, 지원하는 일은 인권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학의 영토를 넓히면서 새로운 문학적 비상을 갖는 일이기도 하지요.
문학의 출발지로부터 되돌아오다
■ 김명원: 이젠 선생님과 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선생님 문학의 출발지는 어디인가요? □ 도종환: 저의 문학은 가난과 외로움에서 출발했어요. 평화롭던 날들은 중학교를 입학할 즈음해서 끝났지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고향을 떠나면서 우리 가족은 해체되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외가에 맡겨졌고 앞 못 보는 할아버지는 고모네 집에 고단한 육신을 의탁해야 했으며, 어머니 아버지는 강원도로 떠나셨지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혼자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방학 때가 되면 편지봉투에 쓰여 있는 주소를 들고 부모님을 찾아 다녔어요. 부모님이 계시는 곳을 찾아 고등학교 진학을 했지만 거기서도 정착 할 수 없었던 아버지께서 또 경기도로 떠나시면서 저 혼자 객지에 남겨지게 되었고요. 자주 양식이 떨어졌고, 참고서 한 권을 살 수 없는 형편이었고, 낯선 도시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습니다. 그 후, 가난했기 때문에 포기했던 대학을 돈 제일 안 들어가는 대학, 돈 제일 안 드는 학과를 선택하여 시험이나 한 번 쳐 보라는 친척들의 권유로 사범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겉돌 수밖에 없었어요. 월세 이천 원짜리 단칸방에서 살았고, 사 년 내내 구들장 위에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냉방에서 잠을 자며 대학을 다녔거든요. 살아 있다는 것은 오히려 절망스러운 일이었어요. 도시락 대신 소주병을 싸들고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 고모네 목욕탕에서 막일을 하는 어머니, 정신지체 장애아인 여동생, 음성 나환자인 삼촌, 둘러보아도 사방팔방 절망 아닌 것이 없었으니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사치스럽게 무슨 대학을 다닌단 말인가, 회의가 들었지요. 남들과 잘 어울리기 싫어했고, 자폐증이나 대인기피증 비슷한 걸 앓았던 거 같아요. 저는 제 깊은 좌절감 속으로만 침잠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문학을 만났지요. 문학을 이야기하고 철학을 거론하는 자리에서만 눈빛이 반짝거렸어요. 사르트르와 까뮈, 키에르케고르와 고흐와 이중섭과 장용학, 손창섭과 고은, 최인훈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이야기할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실존주의의 치열한 여름과 퇴폐적 낭만주의의 황폐한 가을, 그리고 지독히도 남루한 겨울이 몇 번을 찾아왔다가 저를 쓰러뜨려 놓고 지나갔어요. 그러던 중, 대학교 4학년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지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퇴폐적 낭만과 개인적 절망을 폐기하고 선생님 시에 만만하지 않은 현실 의식이 삽입되던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 도종환: 음울한 페시미즘과 낭만적 문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엉뚱한 데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였어요. 그때 저는 대학원 재학중 입대하였던 27세의 군인였고, 광주근교의 여천에서 군생활을 하다 진압군으로 차출되었지요. 5월 어느 날, 여수와 순천 사이의 17번 국도에 내려놓더니, 삼중으로 처져있는 바리케이크 뒤에서 광주에서 지방으로 가는 시민군 무장차량을 차단하라고 명령하더라고요. 그런데 대대집결해서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에 광주가 집이었던 군인 두 명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어요. 동네 사람들에게 총을 쏠 수 있겠냐는 말이었는데, 그 말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저 사람들은 집이 광주라서 저렇게 고민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총을 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고갯마루 언덕 양쪽에 호를 파고 대치한 채 뜬눈으로 새우던 봄밤이었지요. 저는 M16 소총의 탄창을 몰래 빼서 맨 위의 실탄을 거꾸로 장전해 놓았어요.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게 해 놓으면서 후환이 몹시 두려웠지만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을 향해서 총을 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리고는 군복 윗주머니에 들어 있는 군용수첩에다 시를 썼어요. 그때까지 썼던 100여 편 가까운 시들을 다 버리게 하는 시였고, 그것이「사격명령」이라는 시지요.
사격명령이 떨어지던 날 탄창 속의 M16 A1 신형 탄알처럼 징발된 민간차량에 가지런히 탑승되어 비포장도로를 달려갔다 정갈한 저녁 바람은 예년처럼 보리수염을 쓸어가고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은 우리 앞에 인도지나의 풍문으로 듣던 안개가 호남평야를 기어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몰래 탄창 제1번 실탄을 거꾸로 장전하는 짧은 순간 가장 깊은 밤의 이슬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정중부의 다듬어진 칼과 보현원의 차디찬 화강암에 이마를 부딪고 쓰러진 그 흔한 죽음의 기록도 없는 한 야사의 문신들을 만났다 17번 국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 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 피 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 부대끼는 밤 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이제 내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역사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구름 그림자에 눌리운 이 깜깜한 오월의 국도 위에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지 당신도 헤아리고 있는가 -「사격명령」 전문
「사격명령」이란 시를 쓴 후, 개인적인 절망에서 역사와 사회 인식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광주의 체험은 나 한 사람의 알량한 양심을 지킨 것으로 끝나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이었고,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나 갚아야 할 부채로 남아 있게 되었어요. 그렇게 역사를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시대의 고통과 함께 괴로워하면서 저의 문학은 현실 쪽으로 나아갔지요. 그로부터 꼭 이십 년이 지난 날, 이창동 감독의 영화《박하사탕》중에 나오는 광주시민혁명 장면을 보다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눈물은 극장을 나와 길을 걸어가면서도 멈추지 않았어요. ■ 김명원: 첫 시집『고두미 마을에서』출간 무렵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 도종환: 제대 후 문단에 나올 무렵, 발표지면이 없었어요.《창비》와《문지》는 폐간되고 신문과 방송도 마구잡이로 통폐합될 때였으니까요. 우리가 발표할 지면을 스스로 만들자는 생각이 들면서, 배창환, 김용락, 김창규 시인등과 함께《분단시대》라는 동인지를 만들었어요.《오월시》,《삶의 문학》,《시와 경제》,《자유시》등의 동인지와《실천문학》같은 무크지가 문단의 돌파구를 만들어 나가던 무렵이었지요.《창비》에서 첫 시집『고두미 마을에서』를 낸 것도 그 무렵이었고요. 결혼 이년 반 만에 아내와 사별한 것도 비슷한 팔 십 년대 중반이었네요. 절망은 내가 저를 떠났다고 저도 나를 떠난 건 아니었어요. 많이 힘들었고 많이 아팠으니까요. 그 어려운 시기에 실의와 좌절의 늪에서 나를 건져내준 것은 시였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빈 하늘을 향해 소리칠 때마다 시가 대답을 해 주었으니까요. 제 외로움, 제 그리움, 제 슬픔을 시가 어루만져 주었어요. 그 당시 아내가 입원해 있던 원자력병원 암병동 날바닥에 앉아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암 환자들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과 맞서 싸우는데,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암병동」이란 시를 썼어요. 이 시는 제 삶의 좌우명이 되었고요.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 뿐일 때도 우리들은 온몸을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
참답게 산다는 것은 참답게 싸우는 것 빼앗기지 않고 되찾겠다는 것
생명과 양심과 믿음을 이야기 할 때도 그러하고 정의와 자유와 진실을 이야기 할 때도 그러하니 밀물처럼 달려오는 죽음의 말 발굽소리와 위압의 츱츱한 칼바람에 맞서 끝끝내 물러서지 않는 것도 우리들의 싸움이 지켜야 하는 싸움이기 때문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싸우는 싸움이기 때문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살아있고 살아 있어야 함으로 우리가 싸우는 때문 참답게 싸우는 것이 참답게 산다는 것이기 때문
희망을 가진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앞길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일 때도 우리들은 암흑과 싸우거늘 빛이 보이는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새벽을 믿는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암병동」전문
■ 김명원: 시「암병동」은 선생님 두 번째 시집『접시꽃 당신』제1부에 실린 대표시지요. 선생님을 일약 시인 스타로 만들었던 시집『접시꽃 당신』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내를 위암으로 떠나보내고 난 후의 심경을 진솔하게 펼쳐 보이신 순정성에 독자들이 더욱 아파했던 것은 사실이고요. 그 당시가 32세셨지요? □ 도종환: 30대 초니까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시절였어요.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죽음은 한참 뒤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때인데 갑자기 맞닥뜨린 죽음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랐지요. 제가 시에 쓴 표현을 빌자면 “길을 걸어가다 갑자기 담벼락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걸 손으로 떠받치고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손을 떼면 내가 깔려죽고, 담을 밀면 저쪽으로 담이 다 무너져버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과 갑자기 만나게 되면서 감당이 전혀 안 되었지요. 그 상황을 추스르게 해준 것이 시예요. 무엇에겐가 기대고 헤쳐 나올 수 있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다행스럽지만 또 한편에서는 어떻게 그 절박한 상황에서 시만 쓰고 앉아 있느냐고 비판받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아픔에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사회의 아픔이든 민족의 아픔이든 개인의 아픔이든 시인은 그 아픔에 정직해야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개인의 아픔에도 정직해야 한다면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정직한 자세인가를 고민했죠. 시집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만 후회나 뉘우침이 대부분의 정조지요. 그러나 앞서 간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을 기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남겨 진 나와 내 가족들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죽음을 통해 알게 된 생명에 대한 겸허와 감사 등이 시가 되었고, 그 진실을 독자들이 공감해 준 것이겠지요. ■ 김명원: 그런데『접시꽃 당신』이 시집으로 출간되기 전에 유명세만큼이나 필화 사건을 겪는 고초를 감당하게 되셨는데요. □ 도종환: 동인지《분단시대》에 발표한 작품들이 조사를 받는 일이 생겼어요. 장학사가 「접시꽃 당신」,「암 병동」을 비롯한 5편의 시 구절에 빨간 사인펜으로 밑줄을 그어가지고는 이것이 의미하는 속뜻이 무엇이냐면서 조사를 벌이더라고요. 그 일로 좌천당했어요. 벽지에 있는 시골 학교로 쫓겨 가게 되었지요. 당시 저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딸을 낳고 넉 달 만에 아내와 사별하게 되었는데, 어린 아이 둘을 두고 벽지로 쫓겨 가는 심정이 어떠했겠어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때 저를 버틸 수 있게 하는 건 역시 시라는 생각에 전적으로 매달렸지요. 그런 시들을 김사인 시인이 읽고는 시집으로 내자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안 된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개인적인 일로 시집을 내느냐”고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그럼 언제까지 시만 쓰고 있을 거냐, 빨리 마음을 정해라. 정리하는 의미에서라도 시집을 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집을 내게 되었던 것이지요.
삶의 지난한 파고 - 해직, 투옥, 복직, 투병, 칩거
■ 김명원: 누구에게나 생의 부침이 있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상당하셨지요. 아내와의 사별 후 좌천뿐 아니라 전교조 활동 때문에 해직되고 투옥되셨지요. 그리고 10년 만에 복직하시는 기간 동안 만만치 않은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요. □ 도종환: 저의 첫 교사직은 1977년 옥천 청산고등학교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1989년 청주 중앙중학교 재직 시절, 전교조 충북지부장을 맡았다가 해직되기에 이르고요. 그후 10년간이나 강압적으로 교육 현장을 떠나 있어야 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었습니다. 복직을 위해 단식을 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했고 투옥되기도 했지요. 투옥된 것은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이었는데요. 재판장에서 검사가 저에게 집단행동을 한 사실이 있냐고 물었어요. 질문 내용은 “무슨 무슨 교회에서 교사 20여명을 모아놓고 인사말을 한 적이 있느냐”, “무슨 무슨 단체의 사무실에서 결성식을 하면서 박수를 친 적이 있느냐”는 등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네, 인사말을 한 적도 있고, 박수를 치면서 집단행동을 한 적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방청석에서 박장대소를 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지요. 그때는 주먹구구식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던 시절였으니 어떤 구실로라도 교도소에 가라면 가야했지요.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전문
「담쟁이」는 그즈음 참 어려운 시기에 쓴 시입니다. 참담했던 그 시절, 우연히 길을 가다가 담쟁이를 보게 되었지요. 산도 숲도 많은 지구 대지에서 하필이면 흙 한줌 물 한 방울 없는 벽에 사는 담쟁이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가느다란 실뿌리를 내서 벽을 붙들고 수천 개의 이파리들이 손에 손을 잡고 한 발짝씩 나아가는 모습, 서늘했어요. 그들의 침착한 태도, 조급해하지 않는 마음, 자신에 대한 믿음이 담쟁이한테서 발견되었고, 이것을 우리들도 가져야 하는 덕목으로 환치시키려 시를 쓰게 된 것이지요. 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희망을 형상화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 김명원: 저도 어려운 일과 만날 때마다 희망을 가지려 읽었던 시 중 하나가「담쟁이」예요. 선생님 시의 산실이 이토록 절절한 아픔의 현장이었던 셈이네요. 그 후 복직은 어떻게 이루어지셨나요? □ 도종환: 수많은 이들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전교조가 합법단체로 인정받은 지 10년만인 1998년에 덕산중학교로 복직이 되었어요. 우린 왜 10년을 강산이 변하는 한 묶음의 시간 단위로 규정하잖아요. 딱 십년 만에 학교로 돌아가 보니, 놀랍게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더라고요. 교사가 새로 학교에 발령 받아 가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부임사를 하잖아요. 저를 소개하려고 교장선생님이 단상에 올라가시니까 주무부장 선생님이 학생대표에게 “대대장!”이라고 외치시대요. 그랬더니 학생대표가 “교장선생님께 경례!”라고 하고 학생들은 모두 거수경례로 “충효!”라고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시골 중학교의 조그만 아이들이 군대식으로 인사 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얘들아, 손을 내리고 우리 다 같이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자”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제 식대로 인사를 못하는 거예요. 그런 인사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서너 번을 되풀이해서 권유하는 동안 다른 선생님들이 얼마나 긴장했겠어요. 문제교사가 우리 학교에 왔다 싶어서요. 변한 건 아이들이었어요. 아이들의 감수성과 생각, 태도와 행동 등이 너무 많이 변해서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제 딴에는 십년 동안 교실 밖에서도 교육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많이 준비했었거든요. 특히 수업 대안을 마련하는 프로그램을 아이들에게 적용하고 싶었는데, 처음 6개월 동안 계속 실패를 반복했어요. 아이들에게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요. 실패를 거듭하자 절망감이 들면서 학교를 그만 둘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그러다가 이제 아이들과의 전쟁은 그만두고 차라리 연애를 하자고 생각을 바꿨지요. 의욕만 앞서면 아무것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과 만나는 일부터 출발하자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제가 개발한 이론적인 프로그램을 다 버리고 아이들과 친해지는 일부터 시작했지요. 이후 제가 재직하였던 5년 동안 많은 성과가 있었고, 아이들이 다시금 활기를 찾는 모습을 보자 보람과 기쁨이 넘쳤어요. 그리고 월요일 아침 조회 때마다 동료교사와 제자들을 위해 시 한 편씩을 읽어줬고요. 어떨 때는 아이들이 큰 종이에 시를 옮겨 적기도 하고 댓글을 달며 소감을 쓰기도 했지요. 이런 작은 성과들이 모여 학생들에게도 변화가 생겼고, 나중엔 그 학교가 ‘신나는 학교 상’을 받고, 다른 학교에도 소개될 정도였죠. ■ 김명원: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병으로 다시금 학교를 사직하게 되셨지요. □ 도종환: 전 그런 병명을 처음 들어봤어요. 어느 날 쓰러지게 되어서 병원에 갔더니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병이라는 거예요. 신경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 이상이 되면 쓰러지게 되는데, 제가 신경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하게 몸을 혹사시켰다는 것이었지요. 문제는 쓰러지고 난 뒤부터는 면역력이 떨어져서 잔병에 걸리면 잘 낫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약을 먹고 병원을 다녀도 그로 인해 생긴 다른 질환들이 낫질 않아요. 하는 수없이 어렵게 복직한 학교를 그만두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 시작했지요. 바로 산방에서의 생활였어요. ■ 김명원: 산방이 충북 보은군 내북면 속리산에 있는 ‘구구산방’이라는 곳이지요? □ 도종환: 네, 거북 구(龜)자를 써서 집 이름을 ‘구구산방(龜龜山房)’이라고 붙였어요. 미술 하는 후배가 새겨준 건데, 거북이처럼 오래 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지만 저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요. 우리가 토끼처럼 빠르게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심신에 병이 들거든요. 산 속에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신문도 없이, 오로지 새 소리와 바람 소리만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았어요. 그러니 자연히 몸의 속도가 자연의 속도에 맞춰지더라구요. 먹는 것도 채식 위주로 바뀌고, 일과 사람을 끊고 나니 제 생활 자체가 자연의 일부가 되었지요. 또한 집이 황토라서 은근한 치유의 힘도 있는데, 겨울엔 춥고 힘들었어요. 잘 얼고, 펌프가 터져 물이 끊기곤 했으니까요. 그래도 산 속에선 제 형편이 제일 낫지요. 고라니, 다람쥐, 멧돼지, 산토끼 그 애들은 추운 계절에 어떻게 먹고 지낼까 생각하면 걱정이 되요. 동물들이 겨울 나는 거 생각하면, 물 좀 안 나오고 보일러 안 켜진다고 해서 힘들어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동물들은 겨울 나기가 참으로 어려워서, 저는 겨울만 되면 산에 채소를 뿌려놓아 그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고, 계곡물을 도끼로 깨어서 먹을 물을 마련해주곤 하지요.
내가 먹을 한 그릇의 밥을 내 손으로 지어먹으며 나는 새로운 삶에 눈 뜨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검소하고 간결한 삶이 찾아왔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내 손으로 만들어 먹으면서 낭비하지 않고 소박하게 사는 삶의 기쁨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던 자신이 서서히 해체되고 새롭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욕망에 멱살을 잡혀 끌려 다니던 자아가 조금씩 지워지고 작업복 바지 하나로도 편안한 새로운 자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삶의 주체가 바뀌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일부
■ 김명원: ‘구구산방’에서 칩거하시면서 쓰신 시들을 묶은 시집이『해인으로 가는 길』이지요? 이 시집에 남다른 감회가 있으실 거 같아요. □ 도종환: 시집『해인으로 가는 길』은 두 개의 불교용어를 가지고 풀어나가고 있어요. 하나는 ‘해인(海印)’이고, 하나는 ‘화엄(華嚴)’이에요. 몸이 아파 산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어떨 때는 정신적으로 답답하기도 했어요.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왜 적막하고 외롭기 짝이 없는 이런 곳에 와있어야 하는가 라며 속상하기도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일부러 이런 시간을 주시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더라고요. 풍랑이 가라앉아 고요해진 상태를 해인이라고 하지요.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상태가 해인의 상태로 가는 것일 테고요. 그러면 지금까지 내 삶은 무엇인가. 대동 세상 - 조화와 화평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나는 지금 화엄의 세상을 버린 것인가, 고민했지요. 그런데 어떤 큰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대요. 해인은 화엄으로 가기 직전의 상황이라고요. 혼자 고요하게 성찰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시간이 결국 우리가 꿈꾸고자 했던 세상으로 가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말씀이셨지요. 스코트 니어링은 산 속에서의 생활로 자본주의 사회의 황폐함, 불안함과 조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잖아요. 니어링은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매일같이 읽고 쓰고 가르쳤고, 균형 잡힌 인격을 갖출 수 있었거든요. 이렇듯 지금의 제 모습은 우리가 함께 추구하고자 했던 공동선,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데에 보탬이 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왔고, 이런 깨달음이 시로서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으로 하는 길에 물소리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 소리 바람 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다 지난 몇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 애초에 해인에서 출발하였으니 돌아가는 길이 낯설지는 않다 해인에서 거두어주시어 풍랑이 가라앉고 경계에 걸리지 않아 무장무애하게 되면 다시 화엄의 숲으로 올 것이다 그땐 화엄과 해인이 지척일 것이다 아니 본래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 가라앉고 가라앉아 거기 미래의 나까지 바닷물에 다 비친 다음에야 화엄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해인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지친 육신을 바랑 옆에 내려놓고 바다의 그림자가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워 있다 지금은 바닥이 다 드러난 물줄기처럼 삭막해져 있지만 언젠가 해인의 고요한 암자 곁을 흘러 화엄의 바다에 드는 날이 있으리라 그날을 생각하며 천천히 천천히 해인으로 간다 -「해인으로 가는 길」전문
이런 사유로 쓰여 진 산 속의 시들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게 되었고, 이 시편들이 묶여 시집으로 만들어졌으니 더욱 애착이 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 시집의 판매 인세는 모두 베트남 평화학교 건립을 위해 사용되었고요. 아직도 베트남에는 학교가 없어서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를 못 하고 있어요. 우리는 베트남에 진 빚이 있잖아요. 그래서 뭘 도와줄까 생각하다가 거들게 되었어요. 개교 이후에는 해마다 학교에 컴퓨터를 사서 보낸다거나 학용품을 지원하고 있고요. 학교 후원을 통해 그 학교에 우리 문화를 심을 수도 있고, 학생들을 불러서 도와줄 수도 있고, 이렇듯 문화교류센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좋은 인연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어요. ■ 김명원: 큰 일을 하시려면 건강이 우선되어야 하실 텐데 요즘 건강은 어떠신가요? □ 도종환: 염려해 주신 덕분에 좋아졌답니다. ■ 김명원: 선생님께서 문단뿐 아니라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일들에 주력하시는 모습, 아름답습니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적이 있지요? 우리나라 추녀의 미학요. 부챗살처럼 퍼지는 추녀의 아름다움과 곡선의 미학은 휘어진 나무가 아니라 곧게 다듬은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선생님이야말로 선생님 시집 제목처럼 부드러운 직선의 힘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원칙을 지켜가면서도 유연한 삶의 자세, 역사의 질곡 속에서 강인하게 대처하면서도 서정으로 기율된 시를 쓰는 시인이시니 말입니다. 대립되는 두 가지의 세계를 넘어서서 공존이 가능함을 증거하고, 타협이 아니라 통합으로 밀고 나가셨으니까요. 저로서는 경탄할 수밖에요. 행사 중에 어려운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에 다시 뵈올 때까지 더욱 건승하시기를 마음 다하여 기원 드릴 게요.
‘뇌쇄’라는 단어를 써야 할 때가 있다. 격정적인 에너지를 내장함으로써 다소 부정성을 함의하고 있는 이 단어는 실상 최고의 극찬을 해야 할 때 떠오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비가 나리는 장령산을 배경으로 도종환 시인과 기념사진을 찍으려 나란히 섰을 때 나는 왜 이 단어밖에는 시인을 표현할 길이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을까. 평생을 따스하고 정감 어린 시어로 독자들에게 위로와 위무가 되었을 찬찬한 이 분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뇌쇄적이라는 단어! 시인을 만나고 나서 이틀이 지난 후 시인 탐방 원고를 쓰려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을 무렵에야 나는 비로소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랬었구나. 미소 때문이었구나. 숱한 시련의 세월 속에서도 오로지 시라는 외길을 향한 그의 올곧은 미소,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절망적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바치는 선교사와 같은 미소, 반목이 있는 곳에 화해와 평화를 부르는 미소,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사랑스러운 미소, 무섭도록 깊은 미소, 그 때문이었구나. 나는 가슴을 친다. 도종환 시인이 이끌고 온 세계에 어디 시만 있으랴. 그의 세계에는 민주의 깃발을 휘두르며 투쟁한 함성이 있고,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길을 들어 선 용기가 있고, 이웃의 삶을 아프게 공감하며 희망을 전파한 노래가 있고, 제 나라를 넘어 선 이타의 관점이 있고, 욕망을 떠나 피속으로 감으로써 오히려 세속을 돌아보게 하는 관조가 있을 터, 부드럽지만 강인하게 살아내야 했을 염담(恬淡)한 세월이 있었을 것이다. 그를 써야 하는 나의 역량이 너무도 부끄러워짐을 느낀다. 함부로 살 수 없는 공인으로서 얼마나 땀 흘리며 살아내었던 젊음였을까.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서의 계획을 묻자 그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역할이라고 대답하였다. 시인으로서의 계획을 묻자 웃으면서 짧게, 쉬고 싶다고 했다. 얼마나 애쓰며 힘겹게 살아왔으면 그런 대답을 했을까. 그것은 그의 혼신을 다한 열정을 반증하는 것이었으리라. 나는 가방 안에서 시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준비해 온 손수건을 꺼내 전한다. 그의 땀 배인 날들을 잘 닦듯 헤아리고 싶어서 준비한 것이다. 그는 금세 상자 안의 물건이 손수건인지 안다는 듯 아침마다 반드시 챙기는 물건이 손수건이라고 나의 작은 마음에 답례해 준다. 시인과 헤어지는 장령산 휴양림 마당으로 장맛비가 축축이 내리고, 젖는 음영 속으로 여름 저녁이 고인다. 뒤돌아보자 손을 흔드는 도종환 시인이 부드러운 직선의 빗줄기 속으로 투명하게 감겨든다. ■
웹진 시인광장【Webzine Poetsplaza】2009년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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