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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글을 쓰고 나면 소진되어 다음에는 멈춰버리는 타성을 벗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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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세상 돌아가는 일이 그야말로 정신없이 전개되다보니 어떤 것을 쓰려고 하다가도 다른 문제에 빠져서 완결을 짓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다시 소소하게 지금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어가 보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여행자다. 두 딸과 계획없는 계획으로 주어진 시간을 스스로 채워나가야 하는. 그래서 여행이란 무엇일까라는 해본적 없는 게다가 명쾌한 답을 기대하기도 뭐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러면서 열흘 넘게 유유자적 즐기고 떠나온 우도에서 겪은 일들을 다시 곱씹어 보기로 한다. 결국 어떤 모토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게 되는데.
피델 카스트로가 59년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후 1차 독립전쟁의 실패를 떠올리면서 내뱉은 일성이다.
"이번 혁명은 현실이다!"
어떤 경구들은 일상과 맞물려 운때가 맞게 되면 적어도 십년 정도는 곱씹어 보게 된다. 20대 첫 배낭여행지였던 라틴아메리카, 그 중에서도 쿠바 아바나 공항에 내려 구시가지를 한나절 내내 걸어다니다 만났던 경구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다. 정확한 에스파냐어 문장으로는 떠올릴 수 없지만, 대략 이런 얘기였다.
"혁명의 잔은 피로 채워진다."
쿠바 혁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세 마르띠의 말로 그 때 당시에는 아바나 변두리 상점의 간판처럼 마주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점 간판처럼 여행자를 맞이하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홍보방식에 익숙한 내게 저런 혁명 선전 방식은 낯설기 그지 없었던 것으로 다가온다. 어쨌든 요즘 떠오르는 생각은 이번 여행은 일상이다!라고 외치고 싶다. 그리고 남한과 일본 사이의 총성없는 전쟁도 피만 흘리지 않을 뿐 혁명에 다름 아니다라고.
여행이란 말을 떠올려보면 유람 견문 기행이란 옛 말들도 떠오른다. 제주에 관해서는 제주풍토기란 저술도 있는데, 제주에 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조밥이요, 가장 두려운 것은 사갈(蛇蝎)이요, 가장 슬픈 것은 파도 소리다. 더구나 서울의 소식과 고향의 소식에 있어서는 이를 몽혼(夢魂)에나 부치는 외에 들을 길이 없다. 질병이 있을 때는 단지 스스로 손을 매어 죽기를 기다릴 뿐이요, 침약으로 치료할 방도는 없다. 이곳은 실로 통국의 죄지은 사람이 머무는 곳으로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죄 있는 사람을 이 땅에 추방하는 것은 깊이 적의함을 얻는 것이라 하겠다."
이 글의 저자는 선조의 손자이자 인조의 조카인 왕실 종친 이건으로 제주 정의현에서 8년의 유배생활을 보내고 난 뒤에 남긴 기록이다. 이보다 100년 정도 앞서 기묘사화로 1년 정도의 유배생활 끝에 사사된 김정이 남긴 제주풍토록에는 다음과 같이 제주가 묘사되어 있다.
"겨울에도 덥다. 바람이 세어 병들기 쉽다. 비오는 날이 많아 물기가 많다. 가옥들은 초가가 많고 새끼로 얽어매었다. 집이 깊고 침침하다...이들이 귀신을 숭상하고 무당이 많다. 뱀을 신으로 받들고 있어, 뱀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들은 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관찬지리지로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도 물론 제주에 관한 기록이 있지만, 이들의 기록에 주목했던 이유는 유배라는 독특한 체험을 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득권에 조금이라도 몸담았던 이들에게 제주는 유람할 만한 여행지는 고사하고 유배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관찬지리지가 왕조의 세수확보를 위한 정보수집적 차원의 지극히 건조한 기록이라면 이들은 글자마다 체험이 서린 편견과 선입견이 그득그득하다. 여말선초의 극심한 혼란기에 이미 한천이나 김만희와 같은 두문동 출신이나 고려 유신들이 숱하게 제주에 유배되던 순간부터 제주는 반체제적 먹물들의 회한과 우수가 충적되는 공간이었다. 몽골의 원사에도 제주는 반란이나 화적질을 한 몽골귀족에게 내려지는 유배지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화산섬의 재가 켜켜이 쌓여 지리적 공간을 만들었다면 적어도 고려 이후 제주의 인문지리적 공간은 반체제와 탄압 억압을 상징하는 유배지로서 변화되고 있었다. 과연 반체제 먹물만이 일방적으로 인문지리 환경의 형성에 영향을 줬던 것인가는 곱씹어볼 문제다. 왜냐하면 고려 시대 내내 제주는 인민 저항의 기나긴 역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몽골 직할 점령기의 탐라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기나긴 사설을 풀어놓을 기회가 있기를)
여행가로서 내게 어떤 취미가 있다면, 발걸음 닿는 공간들에 대한 시간적 자취를 더듬는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다. 작년에 두 딸과 제주를 돌아볼 때는 육아에 지금보다 덜 익숙하기도 했지만, 아직 지리적으로 제주라는 공간이 주는 신기함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더듬어 볼 여유가 없었다. 올해는 여행이 일상처럼 다가오다 보니 매끼니를 세 식구가 도란도란 모여앉아 밥해먹고 치우고 빨래널고(여행자에게 세탁기가 없다면 반나절은 허비됐으리라!) 마실가듯 동네 나들이를 다녔다. 작년이라고 달랐을까마는 올해는 보다 현지화되었음을 느낀다. 어디 유명 관광지를 간다든가 맛집을 찾는 일은 거의 할 필요가 없었다. 인연이 닿아서인지 우도에서 묵었던 곳이 동네 정착민 회장이었던 분이라 블로그의 홈패인 공간에서 돌아다니는 표피적 정보보다는 훨씬 현실적이고 내밀한 얘기들을 쉴새없이 들을 수 있었다. 지역사회로 갈수록 인적네크워크의 중요성이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게 우도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우도 유일의 도서관에서 제주, 성산, 우도를 비롯한 각 지역 향토지 자료를 즐겨 보게 되다보니 앞서 얘기한 먹물들의 제주도 이전의 '탐라'와 만나게 됐다. 이름이야 탐라국이 신라 때부터 존재했었음을 제도교육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뭔가 기억에 남을만한 것들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사서 기록으로는 5세기 후반 백제 문주왕 때 탐라국 왕이 조공을 바쳐서 백제 관등체계를 하사받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여담이지만, 김부식이 진정 우리 역사에 해악을 끼친 것이 있다면, 왜곡된 역사서를 썼다는 것에 있지 않다. 어느 역사가든 그만의 편견과 선입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모든 역사가는 자신만의 역사서를 쓰게 마련이다. 삼국사기 저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한 해악은 자신이 사료로 활용한 삼국시대의 저술이나 그 이후의 사서들을 깡그리 소멸시켜 버린 것에 있다. 아마도 조선 후기에 안정복의 동사강목이든 최근에 위서가 아니라고 판정된 규원사화같은 김부식의 관점과 다른 고대사에 대한 저술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즉, 소위 정통 사서를 집필하는 이들이 참고할 만한 서적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절대적 위상에 이르게 되면서 여타의 다양한 사서전통은 민간이나 가전으로 심층에서 이어졌던 것이 아닐까? 왜란과 호란은 아마도 그런 심층의 흐름이 표층으로 올라오는 전복적 역사인식과 사료가 될 물적 사서들의 등장을 가능케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본다. 이미 김부식 이후 상무정신과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한 무신정권시절의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구삼국사라는 삼국시대의 사서들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난다. 고려 무신정권의 몰락과 몽골침략으로 인한 문약시대의 고려는 다시 김부식의 사대주의 사관으로 회귀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을 것이다.
조금 더 위로 거슬로 올라가 탐라의 창조 및 건국설화로 올라가보면 탐라는 시작부터 다양한 문화권들의 교섭과정에서 생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설문대할망이라는 탐라의 조물주는 여신으로서 태평양 연안의 폴리네시아나 필리핀을 아우르는 섬나라의 창조여신과 조응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더욱이 탐라의 건국설화는 소위 세 을나(이 명칭이 부여의 주요 지배부족을 뜻하는 단어와 같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양을나 고을나 부을나의 남성지배층과 탐라의 동쪽 일본에서 건너온 세 여신들과의 결혼을 통한 연맹체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어떤 견해에 따르면 예족 고구려 부여의 세 북방 혈통과 남방 섬문화의 융합을 탐라 건국의 실질로서 파악한다. 이 시기는 대략 서기전 3세기 때로 중국의 진한교체기이자 일본은 한반도에서 기원전 3세기 경 전파된 벼농사로 물적 토대의 증가로 야요이 문화가 들어섰을 때이다.
한반도를 진한교체기의 북방 유목민의 흉노 대제국 형성기와 일본 문화의 초창기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탐라는 그 흐름이 만나는 곳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도 있다. 신채호의 사관을 빌리자면 흉노 시기 고조선은 부여 고구려 예맥으로 만주와 한반도에서 맥을 이어가고 있었던 때이다. 소위 교조사관들은 이 시기에 고조선이 유방의 한나라 망명객 위만이 세운 위만조선을 고조선과 연속선 상에서 파악하려 하지만, 사서의 기록을 빼고나면 지리적 위치에 대한 설왕설래는 여전한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서기 전 2-3세기 요동 만주 한반도 일본을 아우르는 교류사가 존재했음을 웅변하는 것이 바로 탐라의 건국설화 속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 탐라와 관련된 여담이 있다면, 7세기 중엽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 9층목탑에는 각 층마다 신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주변국가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탐라가 바로 4층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1층에서 3층까지에 일본, 당, 오월이 배분되었다는 것이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오월인데, 늘 한반도 주변의 역사를 육지나 대륙을 중심으로 보는 것에 어떤 균열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는 오월을 차지했던 남조가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아 신라의 위기의식은 이해할 만도 하고, 바다를 통한 침공이 고대에도 그리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었음은 탐라까지도 포함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목탑의 5층에 백제가 그 이후로는 전부 북방계인 말갈 거란 여진 예맥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이 목탑의 건축을 백제 장인 아비지가 맡았다는 점이다. 적국이긴 했어도 당시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술이 앞선 곳이 백제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튼 탐라는 7세기 삼국의 쟁탈전이 대단원을 향해가던 때에도 독립변수로서 등장할만큼 중요한 세력이었음이 분명하다.
내가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과는 무관하게 제도교육의 총아로 나날을 보내면서 버리지 못했던 꿈이 있었다면, 고고학자였다. 학창시절에는 트로이 발굴로 유명한 슐리히만이나 이집트 피라미드 발굴기를 접하면서 고고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키웠나갔다. 돌이켜보면, 서구 고고학이 갖는 제국주의성에 대한 인식은 희미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 인생의 역설은 학부시절에 수강했던 고고학 입문 강의로 막연한 동경은 뒤안길로 사라졌는데, 정작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에서 불현듯 그 옛날의 욕망이 되살아났다는 점이다.
인디아나존스같은 고고학자가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소재로 안방극장을 점령하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다. 낭만화된 고고학에 빠져 있던 내게 푸코의 고고학은 상층 먹물들이 만든 지식 체계 전반에 대한 의심을 본격적으로 해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고고학은 여행인지 모험인지 신나게 즐기면서 하는 영웅담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에 대한 근본적인 토대에 균열을 내보고 새로운 시간축을 잡아나가는 학문 전반에 대한 메타학문이다. 현재 한국의 고고학은 역사학자들에게 천시받고 역사학의 시녀로서 취급받는 터라 유물에 기초해 역사를 수정하기에는 미약한 환경에 놓여 있다. 그러니 청동기 유물연대가 서기 전 500년에서 3000년대에 걸쳐 있어 추정 한계오차가 웃음밖에 안나오는 딜레마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것일 게다.
첫째 딸 인희와 학교를 마치고 나들이로 종종 국립박물관의 선사시대 및 고대관을 방문하곤 하는데 그 때마다 듣게 되는 고고학적 연대는 내가 제도교육에서 배울 때와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유물적 근거가 나와도 늘상 먹물 역사학자들의 '그건 일부에 불과하니 대세에 지장이 없다'는 식으로 무시되면서도 연구는 지속된 절름발이 남한 고고학이 언제 굴레를 벗어날 지 의문이다. 남북의 고고학이 서로 마주할 때 쯤에서야 아마도 남한 고고학에 죽비가 내려질 때가 될 지도 모르겠다. 강단 사학계의 이병도마저 죽기 전에는 자신의 고대사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밝히고 떠났는데 지금 그 아류 후학들은 아직도 부여잡고 있으니 일본과의 건곤일척 승부는 기실 남한 내부의 투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것이다.
19세기 모험문학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쥘 베른의 80일 간의 세계일주를 떠올릴 때마다 과연 유희를 위한 여행이란 상품이 언제부터 가능했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산천경개 유람가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던 먹물들이 한반도 곳곳에 남겨놓은 문화재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스무 살 대학에 들어선 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남도여행을 떠나면서 만났던 보길도에서 유희로서의 여행은 돈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소박한 진실과 마주쳤다. 동천석실. 보길도 섬 중앙의 봉우리 중턱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였는데, 동행한 고등학교 동기와 삼복더위를 견디며 도착해서 내린 결론. 먹고 살 재물이 넘치지 않고서는 이 곳에 이런 호사를 누릴 정자를 만들 생각은 꿈에도 못했으리라! 제주 한라산을 가마타고 올라 감상에 젖어 시조를 읊조렸던 유배지의 먹물이나 탐관오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정비된 등산로와 온갖 구조 시스템이 되어 있어도 한라산 등반은 쉽지가 않은 터인데 수백년 전 먹물들의 짐을 등에 지고 거친 산길과 악천후 속에 가마꾼으로 나섰을 인민들의 고생이 상상이나 되겠는가! 여행기란 결국 먹고 살만한 재력이 없이는 언감생심 꿈에나 그려볼 취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세시대 여행기를 남겼던 아랍의 이븐 바투타나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와 같은 이들의 후일담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록의 욕망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불특정 다수의 독자와 교감을 이룰만큼 여행기 서적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담긴 중국담의 기상천외한 면모는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의도된 측면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우리에게도 견문록의 전통이 적잖으니, 둔황석굴에서 발견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담긴 동아시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해로와 초원로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은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불특정 다수의 인민대중이 관광소비의 고객으로 주조되기 이전까지 여행이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혜초든 폴로든 일과 공부를 빼놓고 순전히 놀기 위해 여행하는 계층이란 아일랜드의 지주였던 잉글랜드 토지귀족이나 독일의 융커들의 나들이 진시황의 제국순례에서나 가능할텐데 넓게 보면 이런 것들도 재력과 권력의 보존 유지 활동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대체 오늘날 여행이 산업이 되고 국가간 교역의 핵심적 지표인 관광수지로 계산되는 인간행동들의 발단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한일 경제 전쟁의 와중에 대일본 공략법의 하나로 일본여행 안가기 운동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것은 우연일까? 가까운 나라여서 일본의 재방문 횟수가 높은 걸까? 아니면 나처럼 일본여행을 꺼려하는 이들이 모르는 일본 소도시의 매력에 뭔가 비밀이 있는 걸까? 여행이 일과 교역 공부를 목표로 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파생유희에 불과했을 때 관광산업이란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김수영이 사랑에 빠졌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방문하던 시기에 무슨 관광수지에 대한 담론이 있었을까? 아시아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해 가던 일본에 처참하게 피폐해진 조선의 세기 말 부패 속에서 그녀가 본 것은 인민의 힘이었다. 그러니 풀잎에서 민초의 힘을 어떻게든 형상해 보고자 했던 김수영도 그녀에게 빠질 수 밖에 없었으리라.
버드 비숍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
있는 한 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女史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는 進步主義者와
社會主義者는 네에미 씹이다. 統一도 中立도 개좆이다
隱密도 深奧도 學究도 體面도 因習도 治安局
으로 가라. 東洋拓殖會社, 日本領事館, 大韓民國官吏
이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쟁이,
이 無數한 反動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第三人道橋의 물 속에 박은 鐵筋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怪奇映畵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想像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 거대한 뿌리
나는 김수영이 비숍에게 느낀 공감을 박태원의 천변풍경에 나온 빨래터의 아낙들에서 느꼈는데, 그네들이 나의 어린시절 외갓댁 빨래터의 외숙모 이모들과 진배없기 때문이었다. 비숍여사는 영국왕립지질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으로 조선에 4차례 방문해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그 속에는 행간 사이마다 탐관오리들과 친일파들의 만행뿐만 아니라 조선 인민에 거는 기대와 인간애가 담겨 있다. 여행기가 이 정도 수준에 이르려면 어지간한 내공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 외에 비슷한 시기 조선 방문 후 기록을 남긴 러일전쟁 종군기자 잭 런던의 글도 읽어봤지만 일제의 한반도 병탄 야욕에 대한 치밀한 분석보다는 인상비평에 그쳐 있었다. 무엇보다 조선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한 게 없었다고 보인다. 그도 그럴것이 종군기자로서 일제는 런던에게 아무런 자유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통제 또 통제의 그물에 놓인 종군기자란 얼마나 허망한가! 관찰자가 대상 가까이에 다가가지 못할 때 그것은 그저 상상이나 감상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블로그나 온라인 동호회를 통해 여행정보를 얻고 전세계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우리 시대 여행가들은 옛날보다 대상에 물리적으로 더 가까이 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글 생존 예능 프로그램에서 우리로 치면 천연기념물에 해당하는 타국의 보호생물을 채취해 요리해 먹는 놀라운(?) 생존기술을 보여줄 정도이니.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어느 지역에 가서 무엇을 보고 어디에 묵고 뭘 먹고 지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터치 하나면 금세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일본에 재방문하면서 우리는 일본에 대해 진정 더 가까이 다가갔을까? 혐한시위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벌써 아베 정권6년 동안 줄기차게 있었고, 일본의 극우 선동은 도를 넘어가고 있었는데도 소도시 여행의 재미는 여전할 수 있었던 이 모순. 만일 아베가 지금처럼 극단적인 적대행위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은밀하게 남한 관광객의 순진한 마음을 이용해 먹기로 했다면, 이 싸움은 보나마나 한 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관광이 무기가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진정 여행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제주에 도착한 지 오늘로 보름이 넘었다. 지인의 아들까지 포함해 삼남매를 데리고 서귀포 인근에서 나날을 보낸지도 사흘. 아마 이렇게 일상같은 여행을 하다보니 계속 어떤 걸그적거리는 느낌이 배어 나온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언제부터 제주가 뭍사람들의 여행지로서 등장했는지 말이다. 우도에 있을 때 본 향토지에 따르면, 참치류의 생선 중에 저립이라는 종류가 있는데 작은 놈은 깨저립이라고도 한다. 큰 놈은 크기가 거의 1미터에 가깝기도 하고 왠만한 참치 저리가라 수준을 자랑하는데, 80년대던가 삼성의 이병철이 이 물고기 잡는 맛에 제주에 전용어선을 마련했다고도 한다. 저립을 잡으면 서울 가서 한 껏 자랑도 했을 만도 한 것이 전통방식으로 잡는 저립잡이는 바다 낚시에서도 하늘에 별따기였다고 한다. 여행은 결국 신기하고 진기하고 낯선 것들에 끌리는 인간의 호기심에서 그 묘미가 찾아지는데, 왜 하필 이국 땅에서 그것을 찾는 문화와 산업이 발전하는 것일까? 일상 근처의 익숙한 것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낯선 느낌들을 발견하려면 선승에 가까운 면벽수도를 거쳐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주말 토요일 삼남매와 느즈막히 저녁을 고깃집에서 해결하고 호젓하게 제주 밤마실을 다녀왔다. 한강변을 지척에 둔 망원동에 있을 때는 밤마실 산책은 주로 한강변을 따라 거닐었다. 동네를 걷는다는 것이 서울에서는 대문 앞까지 들어선 이면도로가 벌써부터 쉽지 않음을 예감케 한다. 이미 인간보다 우선순위가 차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골목과 골목이 마주치는 어느 교차로든 언제 어느 때든 자동차가 튀어나올 지 모르는 곳을 호젓하게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강변으로 도피할 수 밖에. 그런데 오늘 현지에서 나고 자란 소년을 따라서 솜반천이라 불리는 현지인들의 피서계곡으로 가는 길을 마실삼아 갔다왔다. 가는 길이 인도가 잘 정비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아스팔트 길 양 옆의 노란선 바깥으로 걸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이 곳에는 9시 이후 차가 잘 다니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도로변 길가에 귤나무가 줄지어 서 있어 지금은 초록빛 청귤이 주렁주렁 매달리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품종이 무엇인지는 앞으로 알아내볼 만한 주제다. 길가에서도 굳건하게 자라는 종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빠를 닮아서 신과일인 레몬과 청귤 라임류를 즐겨 먹는 두 딸은 청귤을 보자마자 따달라고 아우성이다. 양손에 하나씩 삼남매가 일렬로 들고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미 앞에 늘어선 새끼들 모습이다. 가로수로 귤나무라니! 제주인들에게야 무에 이상할 것도 없으련만 뭍에서 온 서울 촌놈들에게 이보다 더 인상적인 밤마실 풍경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끝으로 귤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내 어렸을 적 겨울 과일로 먹곤했던 밀감은 귀하디 귀한 것이었다. 그러니 제주는 밀감의 땅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봐도 고려 시대부터 아니 백제에도 진상된 탐라 귤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사실 제주 귤산업의 태동은 일제 강점기에 비롯된 것이다.
지금이야 한라봉 천혜향 하귤 청귤이 뭍사람에게도 익숙할만큼 다양한 귤상품이 생산되고 있지만, 사실 제주의 귤이 대학나무 즉, 자식들 대학을 보낼 수 있을만큼 상품작물로 탄생한 것은 온주밀감이라는 일본 품종이 이식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1911년 당시 제주의 프랑스 신부가 일본의 동료 신부를 통해 묘목을 이식하면서 제주 온주밀감의 식재가 시작되었고 60년대에는 제주출신 재일교포들이 제주 친인척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온주 밀감 묘목을 보내면서 본격적인 단작농업화의 길을 가게 된다. 밀감 일본식 미깡이라고 불리던 상품이 바로 80년대 이후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제주산 밀감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문제는 생태계 교란 생물인 베스나 황소 개구리처럼 단일품종으로 제주 귤의 생산이 획일화되면서 다양한 귤품종이 멸종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마치 세계 바나나 시장이 한 종류의 바나나로 일원화됨으로써 단 한 개의 바나나 전염병에 전세계 바나나 시장이 널뛰기 하듯이. 생명의 다양성을 인간의 편익에 맞춰 함부러 재단할 경우의 폐해는 먼 훗날 돌이킬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한라봉이나 천혜향과 같은 품종들은 그런 단일 품종 재배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서 연구된 것이다. 물론 수입산 오렌지에 맞서기 위한 고부가가치 상품작물 재배라는 경제적 욕망도 무시못할 것이다.
조선 정조 시해 사건으로 유배 온 먹물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11종의 제주 토종 귤이 언급된다. 요즘 마트에 넘쳐나는 수입 오렌지의 저가 공세에 온주밀감이 사라진지 언제인지 기억도 안날 정도다. 한 때 대학나무라 불렸던 위상은 온데 간데 없이 단작농업의 슬픈 역사로 사라진 것이다. 마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 반짝 떴다가 수입산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진 제주 바나나처럼. 그래서 요즘엔 다양한 품종으로 제주 귤문화의 보존 차원에서 보려는 조금 거시적인 전략이 마련됐다고 하는데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제주 귤의 소비 역사는 제주도가 어떻게 천작지옥이라 불린 유배지에서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닌 한반도의 여행지로 바뀌어 갔는가와 묘하게 조응하는 지점이 있다. 귤은 본래 뭍에 보내는 진상품이었지 일반 인민을 위한 소비재가 아니었다. 18세기 제주목사 이형상이 남긴 탐라순력도의 귤림풍악에는 제주 귤의 철저한 수탈의 기록이 세세히 적혀 있다. 상품이 아닌 세금으로서의 귤이 자본주의 시대에 제주를 대표하는 상품이 되는 과정. 정치적 반대파를 교정하기 위한 위리안치 유배지의 최적지가 지질과 생물종의 진기함으로 가득한 최고의 관광지로 변모되는 과정.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들이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이런 역사적 흔적들을 더듬는 과정에 빠져본다면 소비로서의 여행이 아닌 삶의 또 다른 양상으로서의 여행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게 이번 제주 여행은 단지 휴양이나 일상도피를 넘어 뭍사람의 역사인식을 넘는 해양교류사로서 제주를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될 것 같다. 아울러 여행이란 무엇일까라는 답없는 그러나 그외 다양한 고민거리를 생산하는 화두와 마주하게 됐다. 작금의 한일전쟁이 제주라는 공간과 상호연상되어 떠오른다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여행도 국가간 무기가 될 수 있는 시대. 제주의 변모는 우리 시대 여행의 심층을 파고드는 열쇠가 될 것이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