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목어로 쇠는 기일
메주 고 제 웅
음력 3월 25일은 큰스님(은사 스님) 6주년 기일이다. 서울 강남구 헌릉로에 위치한 B 선원에서 제사를 모신다고 했다. 큰스님께서 입적하시고 상주 노릇을 할 때 목젖 안으로 설움을 삼켜야 했다. 삼킨 눈물은 한 서린 바다가 되었다. 그 바다에서 비목어가 헤엄을 쳤다. 시선이 왼쪽으로 쓸려 있어서 그런 것인가. 오른쪽은 보지 못한 채 헤엄을 쳤다. 한의 바다에 빠져 몇 년간 제사 참석도 못 한 채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호되게 뺨을 맞으면 왼쪽으로만 쏠렸던 시선이 주시점과 일치할 수 있을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큰스님! 계륵(鷄肋)이 매 맞고자 달려갑니다.”
눈시울을 붉히며 인터넷으로 서울 지하철 노선을 살폈다. 서울역에서 4호선을 타고 선릉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한 다음에 수서역에서 하차하여 택시로 B 선원까지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확실하게 알고 가는 것이 좋겠다 싶어 서울의 지인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부산에서 수서까지 가는 SRT 열차가 2016년 9월 16일에 개통되어 있었던 것이다. 귀와 눈이 정보에 어두운 탓이었다. 그간 비목어로 살며 시신경이 왼쪽으로만 쏠린 탓인가 싶어 눈을 비벼보았다.
수서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세곡동은 상전벽해를 떠 올릴 만큼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사통팔달로 대로(大路)가 시원스레 뚫려 있었고 B 선원 입구의 논밭은 아파트촌으로 탈바꿈되었다. 택시를 타지 않았다면 허둥지둥 헤매며 생고생할 뻔했다. B 선원과의 인연은 1975년도 군에서 제대를 하고 큰스님을 찾아뵈러 갔을 때부터였다. 그때 큰스님께서는 선원을 여시고 참선 수행하는 불자들을 지도하고 계셨다. 그 후로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사찰이다. 그런데도 내가 불효를 저지르며 발 길이 뜸했던 몇 년 사이에 인근 지형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큰스님 생전에 나는 계륵(鷄肋)이었다. 어느 날 스님께서 공부는 얼마나 하였느냐? 깨달음을 향해 공부하였으면 공부한 것을 내놓으라 하셨다. 나는 가감 없이 솔직하게 수행하며 본 경계를 말씀드렸다. 다 듣고 나시더니 찾는 소(牛)의 머리는 본 것 같다, 참으로 애썼다. 이제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황대선원(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스님의 거처)에서 보림*을 하면서 선원장을 하라고 말씀하시었다. 수행자로서 수행하며 자신의 깨달음을 인정받는 것은 돈오(頓悟)의 기쁨에 못지않을 정도로 소중한 뜻을 지닌다. 따라서 이는 눈물겹도록 가슴 저미는 환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이 뚜렷하고 분명하였기 때문에 스님의 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드릴 수 없었다. 이후부터 나는 큰스님께 계륵 같은 존재였다.
2012년 4월 19일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극락왕생하시도록 사십구재를 드리는 기간 중이었다. 5월 11일은 사제(四祭)였다. 전날 밤, 제를 지내 드리기 위해 큰스님 문도와 유지를 받드는 제방의 스님들이 B 선원에서 다과를 드는 자리였다. 맏사형(師兄)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대뜸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때의 정황과 답변을 시로 썼다.
“맏사형(師兄)*이 사리*가 몇이냐, 묻기에
수월(水月)이 둘,
답을 드렸다
조계사 주지
통도사 주지
불교 TV 이사장을 역임한 분이
상처 입은 잎 잎에
별이 떴다고 별 하나 잎 하나 세었습니다
통증이 하나둘 세일 때마다
시린 가슴에
현악이 울고
울음이 악보로 남았습니다
아아, 나는 큰스님께 계륵이었고
맛이 없어도
고기인가 했는데
사형께서 현을 뜯고 음률을 즐기시려 합니다
즐기려면 즐기세요
매미처럼 울다 가겠습니다
아니,
수월로 흐르다
물이랑에 이지러지겠습니다.”
더는 사형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리기 싫다. 그래! 기일에도 나타나지 않으리다. 제가 사형께도 계륵이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얼굴은 표정을 감춘 채 가슴 깊이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의지는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만해 한용운 선사를 신봉하며 살았다. 만약에 ‘선사께서 사셨던 그런 시대가 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그분처럼 살다가 생을 마치겠다.’고 생각하며 “님의 침묵”을 필사하고 또 필사하며 눈물이 흥건한 묵밭을 갈아엎었다. 어찌 감히 승단을 좌지우지하며 갑론을박하시는 지엄하신 분들과 어깨가 나란히 걸어갈 수 있으랴. 이 때문에 큰스님의 기일에 참석할 수 없었다.
기일은 가슴으로 매 맞는 날이다. 제상에는 삼실과(三實果 : 밤(栗), 감(柿), 대추(棗))를 반드시 올린다. 삼실과가 제사의 의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연유와 까닭은 얼추 이렇다. 밤을 왜 제상의 첫손에 꼽는 것인가? 자녀는 부모의 헌신 속에서 성장한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희생은 우렁이 엄마와 같다. 우렁이는 새끼가 자랄 때 엄마의 속살을 먹고 자란다. 새끼가 자라서 세상에 나오면 엄마 우렁이는 빈 껍질만 남아 물에 동동 떠내려간다. 이처럼 밤도 싹이 트고 자라면서 알밤의 영양을 흡수해야 밤나무로 자랄 수 있다. 인간의 양육도 이런 이치와 다를 바 없다. 둘째로 감을 제상에 올리는 것은 교육을 뜻한다. 감나무는 고욤나무를 잘라내고 종자가 좋은 감나무 가지로 접붙이기를 한다. 그래야 좋은 감이 열린다. 인간도 세상에 태어났다고 모두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않는다. 인성은 교육을 통해서 어진 품성으로 거듭 태어난다. 사람의 인격은 가정교육을 비롯하여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통해서 형성된다. 셋째 대추는 대추 안에 씨앗이 하나 밖에 들어 있지 않다. 제상에 대추를 올리는 것은 일심(一心)을 뜻한다. 인간이 부모나 스승을 섬김에 살아계실 때나 저세상에 가신 뒤에도 한결같아야 한다.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의의가 삼실과로 적절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아! 나의 행위는 밤, 감, 대추가 넌지시 전하는 뜻에도 족탈불급이었으니 어이하랴.
어쩌다 사형은 요양병원에 누워 극락왕생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아! 큰스님! 사형! 인생이 대수입니까? 인간답게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을...... 이 계륵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살아생전에 저에 대해 기대와 사랑이 크셨기 때문에 원망인들 어찌 크지 아니 했으리요. 이 같은 연유로 저는 항상 계륵이었을 겁니다. 이제 제삿날을 꼼꼼히 챙기며 문중의 화합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마무리 될 무렵이었다. B 선원 주지 스님이 부탁했다.
"문도 대표로서 인사말을 해 주시기 바란다고."
“소싯적에 병역의무를 마치고 B 선원에 큰스님을 찾아뵈러 왔을 때였습니다. 그날 밤 선원의 산 등에 달이 걸렸는데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때의 정황과 심경을 시로 적어둔 것이 있습니다. ‘남월*’이란 시 한 수 낭송으로 인사말을 가름하겠습니다.
“가슴에 적락*이 영그는 날
하얀 송편 하나 산 등에 걸려
산 수조 풀벌레 병창이 푸르다
은은한 풍경 속
말도 마음도 뚜-욱 끊어졌다
심인*은 더욱 뚜렷하고”
그러나 ‘가슴은 비목어, 매 맞고 있습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아야 눈이 바로 박히겠습니까? 묻고 또 물어봅니다.’
* 비목어(比目魚) : 넙치과에 속한 바닷물고기.
* 계륵(鷄肋) : 계륵은 고사성어로 한국어로 그대로 풀어보면 '닭의 갈비'라는 뜻이다. 실생활에서는 큰 쓰임이나 이익은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상황, 물건을 나타낸다.
* 보림(保任) : 밝게 깨달은 마음을 반조하여 수 억겁 거쳐 오면서 쌓인 습을 녹이는 과정. 보림(保任)은 원래 선불교에서 깨달아 부처가 된 이후의 수행을 말한다.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이며, “보임”이라고 읽지 않고 “보림”이라고 읽는다.
* 남월(南月) : 남쪽 산봉우리에 달이 떠 있는 모습.
* 적락(寂樂) : 수행으로 얻는 즐거움(세인은 홀로 있으면 고독하다. 수행자는 홀로 명상이나 선정(禪定)에 들면 담담히 즐거움이 깃든다.
* 심인(心印) :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으로 전해지는, 부처의 내적 깨달음의 내용.
첫댓글 떠나가신 후에야 큰 모습이 보이나 봅니다!
저는 진실로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매 맞아야 인간이 되겠습니까?
매일
제사 드리는 심정으로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간사야 성불 하다보면 얻어지지 않겠습니까...^^
전 꿈속 세상이 사납습니다... 과거의 일들로
방하착(放下着: 내려 놓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을 그리 들고 계시기에
꿈속 세상이 사납습니까.
방하착 하소서.
@메주스님 감사 드립니다 ...
안부 놓아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