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19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루카 12, 39-48)
You also must be prepared, for at an hour you do not expect,
the Son of Man will come.”
말씀의 초대
몸의 욕망에 복종하지 말고 주님의 의로움에 순종해야 한다. 욕망에 복종하면 죄의 노예가 되지만, 주님의 의로움에 순종하면 주님의 은총 아래에 있게 된다. 신앙인은 죄에서 해방된 주님 의로움의 종이다(제1독서). 주인의 뜻을 모르고 잘못을 저지른 종보다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잘못한 종이 더 무거운 판결을 받는다. 주님께서는 많은 것을 알려 주시고 맡기신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종의 비유로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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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언젠가 임종하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호스피스 봉사자에게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임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특히 사제나 수도자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평생을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봉사하며 산 사람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자녀나 배우자도 없고 세상에 미련을 둘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일반 사람들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하는지요? 일반 사람들은 임종할 때 모습을 보면 대부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걱정하기보다 이승의 인연을 더 많이 걱정합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자식 걱정, 배우자에 대한 염려, 영원한 이별에 대한 고통과 아쉬움이 한껏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신앙이 약할수록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제나 수도자는 세상 것에 미련이 없기에, 오히려 곧 닥칠 죽음 저 너머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 짙게 밀려오는 것이겠지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 뜻을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가르치며 살았지만 아는 만큼 살지 못하여 막상 주님 앞에 나서려는 순간 더 많이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지의 세계를 향한 죽음 앞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죽음의 언저리를 맴돌며 혼자서 힘겹게 고통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민감하게 살았던 사람일수록 죽음을 앞두고 더 많은 유혹에 시달리고 더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인들도 죽음 앞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하고 외치실 정도로 빈 하늘을 바라보시며 매우 고독한 상황을 표현하셨지요. 죽음은, 모든 사람이 그동안 입었던 옷을 벗고 벌거숭이로 주님을 만나야 하는 절대 고독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그가 입고 있던 옷이 고상할수록 벗어야 할 고통도 큽니다. 주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고 비굴하고 죄스러움을 안고 살기에 주님 가까이에서 그분의 자비에 기대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제나 수도자, 교회에 열심인 봉사자들을 세상을 초탈한 사람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약함을 통하여 일하시는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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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 흐르는 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바닷물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사각형에서는 누구나 네 개의 각을 가려냅니다. 하지만 둥근 원에도 ‘수억 개의 각’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작은 이익보다 큰 이익을 염두에 둡니다. 보통 사람은 ‘작은 이익’을 먼저 보지만, 그는 ‘큰 이익’을 먼저 봅니다. 보통 사람은 눈앞의 ‘현실’을 넘지 못하지만, 그 사람은 ‘미래’를 대비합니다. 그에게 미래는 결코 ‘먼 시간’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선명하게 미래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기준은 ‘준비하는 삶’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얼마만큼 열정을 갖고 사는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명성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잃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워렌 버핏’의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걸려 ‘신앙의 탑’을 쌓아 왔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정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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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계획을 수정할 때가 여러 번 있습니다. 분명 계획대로 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부딪힙니다. 신앙생활 역시 계획대로 될 때보다 수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계획 안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주님의 계획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때로는 그분의 이끄심이 당혹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실망스러운 결과와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참 뒤에 돌아보면 얼마나 위험한 순간을 넘겼는지, 얼마나 큰 도움을 주셨는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십니다. 매사를 주님과 연결하려 노력할 때 깨어 있는 삶으로 바뀝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길 때 깨어 있는 삶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분을 잊지 않아야 깨어 있는 삶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누구 닮았다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때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그 분은 지금 현재 텔레비전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예전에 자주 나왔었던 개그맨 이원승씨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원승씨 닮았다고 누가 말을 하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아마 이원승씨도 똑같은 생각이겠지요). 괜히 내 얼굴을 보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또 이원승씨 닮았다는 이야기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아무튼 고등학교 때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부끄러움은 ‘누구를 닮았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이렇게 생긴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웠고, 괜히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어느 날, 이렇게 숨어서만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구 닮은 것 같은데…….”라고 말하면 곧바로 “이원승씨죠? 사실 제가 그분과 아주 가까운 관계랍니다.”라고 말하면서 먼저 적극적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반색을 하면서 “맞아요. 이원승씨와 너무 닮았어요. 그런데 어떤 관계에요? 친척이에요?”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때 저는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넵. 같은 단군의 자손입니다.”
누구 닮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먼저 말하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누구 닮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제는 다른 사람의 모습보다는 저의 고유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저의 체험을 통해 이렇게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은 숨길수록 더 커지고, 드러낼수록 부끄러움은 작아진다.”
누구나 자신 안에 조그마한 부끄러움이라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끄러움을 더 이상 숨기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숨긴다고 해도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다른 것까지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가장 힘들어 할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부끄러움을 버리고 자신 있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늘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은 뒤를 바라보지 않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 결과 자신 있게 지금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시는 주님께는 우리가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나약한 부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즉,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면서 할 수 없는 부분은 주님께 맡겨드릴 수 있는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늘 깨어 준비하는 신앙인의 모습이며, 내 안에 가지고 있는 부끄러움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자신 있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사업이 실패하면 교훈을 얻은 즉시 잊어라. 현명한 사람은 실패를 해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발타자르 그라시안)
준비하며 사는 삶
- 신한열 수사-
프랑스에서 산 지 20여 년이 흘렀다. 멀리서 바라보는 한국은 때때로 놀랍고 불가사이하기까지 하다. 그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다미 선교회나 휴거 소동도 나중에 들었다. 종말에 대한 관심은 현실이 힘들 때면 도피 의식과 맞물려 고양되는 모양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신자들, 그중에서도 성직자와 수도자, 교사 등 가르치는 직분에 있는 이들을 향한 경고와 격려로 들어야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 에 대한 경고다. 복잡다단한 오늘의 사회에서 복음에 따라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 경쟁과 질투, 결과 또는 업적 지상주의를 넘어 하느님의 가치를 실천하기란 교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쉽지 않다. 우리는 뜻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거나 잘못될 때,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나의 허물은 보지 않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런 반성이 필요하다. 정의의 이름으로 자비를 가리는 경우는 혹시 없는가 ? 속도와 효율 논리에 나도 모르게 파묻혀, 가난하고 모자란 사람들 가운데 이미 와 계시는 그분,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 오늘날 갈라지고 찢겨진 한반도에서 예언자적 사명이란 일치와 화해를 심는 것이 아닐까 ? 우선 나부터 이웃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을까 ? ‘주님은 도둑처럼 예기치 않을 때 오신다. 종말이 언제 올 줄 모르니 늘 대비하라’ 는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을 외치며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겁을 준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다는 사람들, 그것도 종교적 엘리트한테는 때때로 엄한 경고를 보내시지만 보통 사람들한테는 결코 심한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위협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忠誠스러운 忠實
-김찬선신부-
미래를 대비하여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오늘 복음을 이해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니 신경 쓸 것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러니 오로지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십분 이해가 되고 좋은 말이지만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의 참 뜻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현재를 과거와 미래에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라면 좋지만, 과거와 미래와 단절된 현재를 살라는 뜻이라면 ‘아니올시다!’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축적이요, 미래를 위한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현재인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 현재란, 진정한 현재를 사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충실한 것도 아닌, 영원을 잃어버린 순간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영원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진정한 현재가 아닙니다. 영원을 잃어버리면 순간의 쾌락을 사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그저 현재를 먹고 마시고 즐기느라 주님이 오시리라는 것도 무시하고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도 무시하고 주님이 맡기신 임무도 등한히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영원을 잃어버리면 설사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에 충실하다 해도 자기 인생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교회의 일에 忠實해도 하느님께 忠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충성하여 당신 일에도 충실하기를 원하시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전삼용신부-
길을 가장 잘 잃는 동물 중 하나는 양들입니다. 양들이 일부러 길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먹을 풀만 찾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찾다가 길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양들이 풀을 찾아 가다가 길을 잃는다고 해서 양들을 나무랄 것이 아닙니다. 그런 본성을 지닌 동물을 잘 살피지 못한 목자의 책임이 더 큽니다. 그러므로 양들에겐 그들을 이끌어 줄 착한 목자가 필수적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목숨을 바쳐 양을 지키는 착한 목자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대리자들을 뽑아 제 때에 양식을 주고 위험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오늘 베드로는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이 자신들에게 해당하는 말인지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인지를 여쭈어봅니다.
물론 모든 이들이 항상 깨어있어야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베드로가 질문을 했기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성직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 즉 교회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종들, 즉, 교회의 목자들에게 제 때에 집 식구들에게 양식을 공급할 것을 명령하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집사는 주인이 떠나자 늦게 돌아오겠거니 하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며 가족들은 제대로 먹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생명의 양식을 백성들에게 주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교회의 목자들이게 이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뜻을 잘 따르지 않는 목자들은 주인이신 예수님께도 그분의 양들에게도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은 갑자기 그 종을 불러들여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제가 굿뉴스에 강론을 올리기로 결심한 이유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사제에게 제일 힘든 일 중에 하나가 바로 강론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어머니가 밥반찬을 무엇을 준비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사제들도 오늘은 어떤 음식을 차려줄까 항상 고민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저보고 쉽게 쉽게 글을 쓴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사실 아이를 낳아보지는 않았지만, 강론 하나 쓰는 것이 그만큼 피를 말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가끔 굿뉴스를 보며 다른 분들이 매일 강론을 올리는 것을 보고 매우 존경스러워 하였습니다. 정말 힘든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여름방학 때 아일랜드에 가서 많은 신자 분들이 말씀에 목말라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사제라면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신자들에게 말씀의 양식을 제공하는 일을 첫째로 삼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학을 마치고 바로 강론을 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작하면서 걱정되었던 것이 하나 있었는데 매일 강론을 올리다보면 소재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시작해놓고 소재가 다 떨어져서 중간에 포기해 버리면 더 창피한 일이 될 것이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말씀은 무한하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그 말씀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무한하셔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 년을 목표로 시작했는데 벌써 일 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당신이 직접 빵과 물고기를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다시 그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사도들에게만 특별히 위임한 것은 다 이유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세우신 교회 안에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으고 교회 안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양들에게 당신의 대리자들을 통하여 매일의 양식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해야 할 사제가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제 때에 양식을 공급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사제의 첫 번째 임무가 되어야합니다. 즉, 말씀을 묵상하고 그 양식을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사실 그 때도 지금처럼 사제들이 바빠서 말씀의 직무에 충실할 시간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뽑았던 것이 말씀 이외의 실무를 맡길 부제들이었습니다. 부제를 뽑은 것은 사제들이 말씀의 직무에 더 충실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정으로 주인을 사랑하고 그분의 양들을 사랑하는 목자들에게 그분은 넘치도록 양들에게 제공할 양식거리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말씀을 묵상하고 제 때에 양식을 제공하는 일을 첫 번째 직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오늘 복음처럼 갑자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너는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이다.”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쁨을
-상지종신부-
제가 맡고 있는 예비자 교리반에 유아세례를 받고나서 성당을 나오지 않았던 40대 중반의 자매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런데 난감한 것은 언제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을 하지 못하고 계실뿐만 아니라 세례받은 사실을 증언할 만한 어떠한 자료나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단 한번 밖에 받을 수 없는 것이기에 세례 기록을 찾아야만 하는데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55년도에 태어나신 이 자매님은 자신이 서너살 때쯤에 부산 광안리나 대신동쯤에서 살았기 때문에 아마 그곳의 성당에서 받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지푸라기 붙잡는 심정으로 광안 성당과 서대신 성당에 전화를 했습니다. 50년대 후반에 그곳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것 같은데, 한번 찾아봐 달라고 말이지요. 사실 무척 귀찮은 부탁입니다. 제가 부제 때 본당에서 한달 반 가량 사무원 없이 사무장을 해봐서 잘 압니다. 가뜩이나 바쁜 사무실 업무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세례기록을 찾는 것은 여간 짜증나는 일이 아닙니다.
결국 광안 성당에서 세례기록을 찾았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광안 성당 사무원 자매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제게 더 고맙게 다가온 분은 서대신동 성당 사무장님입니다. 서대신동 성당 사무장님께서 자기 본당의 세례대장을 찾다가 없으니까 혹시 하는 생각에 이웃 본당인 동대신동 성당과 중앙 성당에도 찾아보았던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도 없었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자기 본당 세례대장만을 찾기도 귀찮을 것인데, 다른 본당에도 연락을 하고 찾아보았다는 것이 말이죠. 서대신동 사무장님께서는 세례기록 때문에 속타는 제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신 분이셨습니다.
서대신동과 광안 본당에 전화를 한 후에, 제발 세례기록을 찾았다라는 전화를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례기록을 찾다가 없으면, "저희 본당에는 그 자매님의 세례기록이 없습니다."라고만 하면 저의 부탁을 충실히 들어주신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기대했으나까요.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다른 본당까지. 비록 서대신동에서 세례기록을 찾지는 못했지만, 하느님의 일에 너무나도 충실했던 한 분을 만났습니다. 제 마음에서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저절로 울려퍼졌습니다. 언제 부산에 갈 기회가 있으면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소주라도 한 잔 대접하면서 말이지요.
하느님께서 저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게 사명을 맡기신 하느님의 마음이, 제가 세례기록을 찾기 위해 다른 성당에 전화로 부탁했을 때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게 맡기신 사명이 어떠한 것이든 그 사명만이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다른 무엇도 함께 드릴 때, 그것을 받으실 하느님의 마음 역시, 서대신동 사무장의 연락을 받은 제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제게 당신의 일을 맡기신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를 지켜보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정말로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성당출입 금지령>
-양승국신부-
신앙생활에 아주 열심인 한 자매님의 하루 일과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새벽 4시 반 기상, 성서필사, 아침기도, 새벽 6시 미사 참례, 오전 10시 봉사활동, 오후 2시 교육관에 가서 성서 공부, 저녁 8시 레지오 마리에 회합,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틈만 나면 묵주기도요, 전례 봉사, 성가대 활동, 병원 원목실 봉사, 성령쇄신 묵상회 기도모임, 철야기도회, 구역일 등등에 신경을 쓰느라 남편이나 자녀들은 완전히 뒷전,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수도자나 성직자도 따라갈 수 없는 신앙생활을 그 자매님은 마치 목숨이라도 건 듯이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활동이 많아지다 보니 가정 안에서 주부로서의 역할에 소홀해지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지출이 많아졌고 때로 "하느님을 위한 것인데 어때!"하면서 팍팍 쓰다보니 집안 살림이 거의 파탄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식구들의 원성은 점점 커져갔고, 결국 뒤늦게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남편은 부인에게 성당 출입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하는 분들이 없겠지만 참으로 조심해야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적인 직무에 충실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사제는 사제로서의 직무가 있을 것입니다. 교사는 교사로서의 직무, 주부는 주부로서의 직무가 있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본연의 의무가 무엇인지 그것을 먼저 잘 파악하는 일, 그리고 그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삶을 보다 진지한 자세로 숙고하려는 노력,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다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려는 노력, 우리가 매일 지겹도록 만나는 이웃들과 언제나 새롭게 관계를 맺어나가려는 노력이야말로 매일의 직무에 충실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멀리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봉사도 중요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피붙이들, 매일 서로 너무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도 주고 미워도 하는 내 가족들에게 충실하려는 노력 그것만큼 하느님 앞에 큰 봉헌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 하나, 미세한 사건 하나도 주의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정성을 다하는 노력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봉사나 기도도 적정선이 필요하겠습니다. 밤낮 안 가리고 피정이다 세미나다 봉사다 전교다 하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지 말면 좋겠습니다. 물론 갖은 상처로 인해 부서진 마음을 추스를 길을 찾을 수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동안 우리는 계속 삶의 중심을 잃고 표류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은 "들음"으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신앙은 많은 훌륭하고 좋은 생각만으로 성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은 "들음"이 "깨달음"과 "행함"과 만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완결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깨우침, 그로 인한 변화된 삶을 우선 내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고뇌하며 살아가는 우리 가족들에게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차별대우
-노우진신부-
우리 집에는 중학교 1학년을 다니는 아이가 하나 있다.
이 아이가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는
"수사님 왜 차별 대우해요?"
"이건 불공평해요!" 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순간에는
’불공평하다’ ’차별대우를 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쓸 때는 왠지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만 그렇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며
부끄럽지만 하느님 앞에 괜한 투정을 부렸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왜 나만 그래요?"
"왜 저한테만 이런 십자가를.."이라고
하느님께 불만을 터뜨렸던 나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는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과연 나는 무엇을 가졌으며, 무엇을 맡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을 때
난 또다시 괜한 투정을 하느님께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형제 여러분,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로마서 6장 12-18절)
-양승국신부-
<네가 몸부림치던 그 10년>
한 수행자가 10년 동안이나 기도에 전념해보려고 노력했었지만 허사였습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육체적인 욕망들을 어쩔 수 없어 숱하게도 넘어지고 또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계속 따라다니는 끈질긴 유혹으로 인해 그의 영적 생활은 퇴보일로를 걷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0년이나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적 진보를 이루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참담했던 수행자는 심한 혼란 상태에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나는 이제 완전히 녹초가 되었구나. 나 자신이 이렇듯 파괴된 마당에 이제 수행하겠다는 마음을 접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수행자가 막 세상으로 돌아오는 길을 떠나려할 때,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들아, 네가 몸부림치던 그 10년이 바로 너의 영광이 되었다. 그러니 네 자리로 돌아가거라. 이제 내가 온갖 성가신 생각에서 너를 해방시켜주리라."
육적인 욕망을 버리고 영적 여정을 시작한다는 것은 이토록 어렵고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 그분의 각별한 은총에 힘입어야 이룰 수 있는 일이지요.
"결국 죽어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라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직도 방황과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제 수도생활이 부끄러웠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수도생활에 입문할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무지개 빛깔이었습니다. 수도원 담을 들어섬과 동시에 모든 죄악과는 결별하겠다던 제 각오는 대단했었습니다.
그러나 서원을 한다고 해서, 수도복을 입는다고 해서 단칼에 영적인 인간, 성스런 인간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더군요.
몸은 수도원에 있지만 정신은 온통 사바세계를 헤매 다닌 적인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돌아보니 지난 대부분의 세월은 결국 죽어버릴 육체의 욕망에 너무도 쉽게 자주 굴복하고 마는 자신의 모습을 슬픈 눈으로 바라 보아온 부끄러움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월은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가 제 삶의 굽이굽이에 깃들어져 있었던 세월, 끝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한없는 용서와 자비가 베풀어졌던 은총의 세월이었습니다.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라는 권고는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죽음과도 같은 요청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활활 타오르는 육체의 욕망은 젊음의 특권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 욕망이 주는 유혹이나 매력은 참으로 달콤하고 큰 것이어서 한번 맛들인 사람은 살을 깎는 노력이나 결단력 없이는 헤어나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보다 완전한 인간, 보다 영적인 인간에로 부르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토록 부족하고 비참한 우리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하느님의 도우심과 은총에 힘입어 크게 변화되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들아, 나는 여기에서 네가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다렸느니라. 네가 끝까지 육체에 굴복하지 않고 견뎌냈으니 이제부터 내가 영원히 너를 지켜주겠다."
또 다른 수행의 장인 오늘 이 하루, 아래의 글과 함께 또 다른 영적 여정을 힘차게 새 출발하시길 바랍니다.
<단 하루의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
덜 미워하고 더 사랑하겠습니다.
덜 가지고 더 행복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웃겠습니다.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는 대신 오늘을 열심히 살겠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후회하는 대신 새로운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대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겠습니다.
아프다고 말하는 대신 아픔을 견디겠습니다.
바쁘다고 말하는 대신 쌓인 일을 하나씩 해나가겠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대신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겠습니다.
남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대신 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겠습니다.
갖지 못함을 불평하는 대신 베풀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살아있음을 기쁘게 즐기겠습니다.
단 하루의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 말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저의 수준을 약간 높이는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피아노 연주회에 다녀왔거든요. 물론 저는 클래식에는 완전히 문외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연주회를 다녀온 것은 본당 청년 중 한 명이 음악대학 졸업 연주회를 한다고 해서 본당의 청년들과 함께 참석한 것입니다.
4년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보이는 시간, 그러다보니 몸짓만 봐도 온갖 정성을 다 쏟아서 연주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지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정성을 다하는 그 모습에 저 역시도 열심히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제 체력이 안 좋은지 아니면 연주 소리가 너무나 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잠들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난 저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자세를 추슬러 주위를 보았어요.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꽤 많더군요. 즉,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학생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 연주 소리를 제대로 듣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저처럼 졸거나, 또 휴대전화로 계속해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 게임을 하는 사람, 책을 보는 사람, 글을 쓰고 있는 사람 등등……. 거의 모든 사람이 딴 짓만 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관련된 연주자나 나와야 조금 관심을 갖고 듣습니다. 그래서 한 명의 연주자의 연주가 끝나면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이상한 현상까지도 볼 수 있었지요.
피아노를 연주하는 연주자는 모든 관객들이 잘 들어주기를 원하겠지요. 하지만 그 중에서 제대로 듣는 사람은 정말로 몇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지금 연주자와 관객의 모습이 주님과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남기십니다. 그 메시지를 보고서 당신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계속 딴 짓 하기에 바쁩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만 가지고 있고, 주님께 대한 관심은 겉으로만 조금 보일 뿐 정작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에 주님께서는 충실한 종이라고 하면서 과연 우리를 받아주실까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오신다는 주님인데 우리들은 얼마나 잘 준비하고 있었을까요? 무조건 주님의 자비에만 맡기기에는 우리들의 노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물론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노력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아직도 시간이 많다고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들을 생각해보세요. 시간이 아주 천천히 지나갔나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 10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갑니까?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직도 내게 많다고 생각되나요?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말하지요. 지금 당장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을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다시 읽고 오늘 하루를 잘 살도록 합시다.
빠다킹신부
충실한 종
-이수철 신부-
주님이 주신 지금 내 삶의 자리에 충실할 때,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제자리를 잊고 뿌리 없이 방황하는지요? 행복은 저기, 밖에,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안에, 가까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우리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은 바로 여기, 안에, 가까이 계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충실히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주님은 제 삶의 자리에서 항구히 충실한 자에게 크나큰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우리 베네딕도 수도가정의 가훈은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모습도 거룩하고 아름답지만, 제 삶의 자리에서 충실히 일하는 모습도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지 않고,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현자처럼 묵묵히 제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주신 일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세상의 유혹이나 허영이, 탐욕이나 허무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도대체 남의 삶의 자리와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하고 어리석은 시간 낭비에 정력 낭비인지요! 누가 뭐라고 하든 제 삶의 자리에서 충실한 자가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사람입니다.
충실한 오빠
-노미화-
우리 집 육남매 중에 제일 고생하며 자란 사람은 둘째 오빠다. 둘째 오빠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 형편이 어려워 오빠는 남들 다 가는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날마다 오빠를 데리고 다니면서 담배꽁초를 한 봉지씩 주워다가 그걸로 뭔가를 만드셨다. 오빠는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 담배꽁초를 줍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싫었다고 한다. 오빠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그때도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자퇴를 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 후 다시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어머니 아버지도 이젠 여든이 훨씬 넘은 노인이시다. 육남매 중에서 둘째 오빠가 부모님을 제일 열심히 챙기고 자상하게 돌봐드린다. 두 분이 드실 사골과 김과 명란젓이 떨어지지 않게 미리 챙겨드린다.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도 둘째 오빠가 제일 먼저 달려간다. 그래서 무슨 일만 생기면 아버지도 둘째 오빠만 찾는다. 자라면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못했고, 지금 살림도 넉넉하지 않은 편인데 부모님께 잘하는 오빠가 고맙고 또 미안하기도 하다. 평소 말이 없는 오빠는 자신이 힘든 것도 표현하지 않기에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냈는지 몰랐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오빠를 다시 보게 된다. 그런데 명절 때 모이면 돈이 없다고 늘 투덜거리는 형제들이 있다. 욕심을 내면 끝이 없다.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늘 허전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는커녕 받으려고만 한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주인의 칭찬을 받듯이 둘째 오빠도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
-이경식 -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 복음 말씀을 실감하면서 산다. 내가 돌보는 호스피스 환자들은 어느날 갑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투병을 하다가 이제는 말기가 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머지않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암은 무서운 병이지만 그래도 죽음을 미리 예측할 수 있기에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영향 안에서 살다가 갑자기 말기암에 걸리면 죽음을 실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회개하고 새로운 가치있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이때 생명 연장을 위하여 의사를 찾아오고 의사는 하느님의 선물인 항암제를 사용해 암치료를 시작한다. 간혹 항암제로 암을 완치시키는 경우도 있고, 대부분 생명 연장이 가능하다. 항암제는 부작용이 있어 고생은 하지만 얼마간의 생명 연장을 할 수 있어 소중한 것이다. 생명 연장이 가능한 시간 동안 새로운 삶을 산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과 바꾸고도 남을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이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믿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주님은 우리를 부활의 생명으로 건너가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으며,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는 것을 매일같이 바라보며 그곳에서 일하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 최영균 신부-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꼭 숙제검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늘 문제가 됐던 것은 일기장이었습니다. 일기를 꼬박꼬박 잘 써야 하는데 며칠씩을 밀려 쓰다가 아버지께 호되게 종아리를 맞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학이 될 무렵에는 종아리 맞기 싫어서 늘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몰아서 일기를 쓰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자업자득이라고 평상시에 놀다가 호되게 혼이 나고 나서야 후회를 하면서도 그런 일들은 한동안 되풀이 되었습니다. 마치 ‘개미와 베짱이’에 나오는 베짱이의 모습이 제 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행운은 늘 준비된 자의 것이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달콤한 영적 위안을 주는 수프가 아닙니다. 신앙은 도전적인 것이고 늘 깨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밀렸다가 할 수 있는 숙제가 아닙니다. 신앙에도 감각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경기에서 우승을 하기 위해 자기와 싸우면서 고된 연습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한 번 미루고 두 번 미룬 후 경기에 임한다면 결코 우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운동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졌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먹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실과 성공은 늘 준비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기환 신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데 급급해서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받고서도 무엇을 받았는지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받은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살아가고, 또 살아가는 중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으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감사하는 맘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는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관리인과 그렇지 못한 관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인처럼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지닌 관리인을 원하시고 그러한 관리인이 우리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는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우리의 귀한 생명을 잘 관리해야하고, 그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하며, 또한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잘 관리해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관리인으로서 주인인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충성스러워야하며 슬기로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대로 우리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며 그분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더욱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매일 매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 세상의 주인께 인정을 받고 더 많은 것을 받고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예수님이 오시는 때,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깨어서 기도함, 많이 받은 이들
-이성우-
예수님은 우리에게 언제 오십니까? 예수님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매순간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 사건 그리고 모든 자연을 통해서도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미사, 기도, 성경묵상, 전례,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매일매일 나에게 다가오시며 나와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우리의 준비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다가오시지만, 우리는 매일 못 알아봅니다. 예수님은 매일 매일 사랑을 고백하시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짝사랑하시게 방치합니다. 우리가 준비되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십시오. 깨어 살아가십시오. 잠자고 있는 영혼은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묶여 있는 영혼은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깨어서 자유롭게 되는 만큼, 나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제발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매일매일 기도하셨습니다. 누구보다 많이 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주님께 많은 걸 받은 사람이고 많은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깨어 기도해야 다른 양들도 깨어 기도하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가장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만나지 못한 예수님을 누구에게 만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내 앞에 계신 예수님도 못 알아봅니다. 하느님 앞에 가서 무어라 하겠습니까? 졸려서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변명하겠습니까? 아, 통탄할 일입니다. 깨어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이유
-최명숙 목사-
사목생활 초기에 장애인 자매 둘을 데리고 생활했습니다. 모두 중증 장애였기에 제가 부엌일을 했는데 열다섯 살 된 자매는 혼자서 일어나고 앉기도 어려운 불편한 몸이면서도 날마다 해질 무렵이면 방 청소를 했습니다. 청소는 자기네가 하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른이 넘은 자매는 아예 청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쌀 한 되를 사서 하루를 먹는데 어느 때는 두 사람에게 밥을 퍼주고 나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린 자매는 한사코 조금씩 같이 먹자고 권하지만 나이 많은 자매는 행여 빼앗아 먹을까 봐 모른 척하고 혼자만 먹었습니다. 그렇게 함께 생활하다 보니 어린 자매가 은근히 나이 많은 자매를 무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지고,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무시하게 되면 싫어지는 게 자연스런 과정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한 방에서 생활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어느날 어린 자매를 불렀습니다. “얘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남보다 무엇인가를 주신 데는 모두 이유가 있단다. 네게 다른 누구보다 지혜를 더 주신 것은 더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받지 못한 그들을 도우라고 주신 거란다.” “네.” 총명한 아이는 내 말뜻을 즉각 알아챘으며 그후로는 그 자매에게 훨씬 부드럽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게 생명을 주신 이유가 있듯이 내게 그 무언가를 주신 것도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깨달아 사는 것이야말로 사명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양승국신부-
<세상이 그나마 견딜만한 것은>
일본의 한 생태학자가 일개미의 생태에 대해 세밀히 연구한 결과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개미 하면 근면한 동물의 상징으로 우리 머릿속에 인식되어 있지만, 사실 모든 개미들이 다 근면하지 않다고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수많은 개미들이 다들 난리입니다. 뭔가 저마다 하나씩 뭔가 입에 물고 줄지어 다닙니다. 식량을 저장하기도 하고, 집을 짓기도 하고, 덩치가 큰 곤충과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바라보면 상황은 전혀 뜻밖입니다. 어떤 녀석들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기는 하는데 개미공동체를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폼만 잡고 있습니다. 뒷짐 지고 유유히 산책하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어떤 녀석들은 얄밉게도 하루 온종일 단 한 번도 개미집밖으로 나와 보지도 않고 안에서 빈둥거리기도 한답니다.
단 20%정도의 개미만이 죽을힘을 다해 개미공동체 그 많은 식솔들을 위해 전력투구를 한다는군요.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인간 사회나 조직, 공동체 생활 안에서도 이런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를 일컬어 20:80법칙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억지로, 인위적으로 형성되기보다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할 삶의 논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 어느 정도 참조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사람마다 주어진 몫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그릇도 다릅니다. 역량도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공평하신 분이기도 하지만, 때로 엄청 불공평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면서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나는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하루 온 종일 뼈 빠지게 일만 하는데, 하루 온종일 빈둥거리는 저 인간은 도대체 뭐냐?”
은근히 심기가 뒤틀립니다. 왠지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억울합니다. 가서 따지고 싶습니다. 일 좀 하라고 소리 지르고도 싶습니다.
절대로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웃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지 마십시오. 결국 남는 것은 상처요 실망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그에게 맡기고, 하느님께 맡기고, 그저 내게 주어진 몫만 바라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시킬만하니 시키시는 것입니다. 감당할만하니 짐을 지워주시는 것입니다.
때로 어쩔 수 없습니다. 언젠가 병들고 연로해져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날, 꼼짝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게 될 그날, 아무도 우리를 불러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일도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이웃들의 지나친 요구 앞에서도 ‘이렇게라도 나를 필요로 해서 불러주니 얼마나 고마운가’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한 인간을 생산능력, 필요성만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인해 삶의 현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기치 않은 병고로,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고로,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노화로 인해 삶의 일선에서 물러서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몫까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나마 견딜만한 것은 아직도 그 누군가의 짐을 묵묵히 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로를 원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서로의 짐을 기꺼이 나눠지고 가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충실한 종으로서'
-홍성만 신부-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준비'를 당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이어서 준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로서 들려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시고, 주님의 뜻대로 관리를 하는 종은 바로 '나'자신입니다.
비약된 감이 있지만 여기서 한 가지를 묵상합니다.
주인의 뜻대로 관리를 해야하는 종인 나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맡기셨을까?
그것은 현재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입니다. 나의 건강ㆍ능력ㆍ재산을 비롯해 나의 가족, 내가 안고있는 모든 일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에 맞게 관리하는 종으로서, 매일매일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매일매일 성실하게 마음을 다해 관리하고 운영해야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命)이자 나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마음이 찜찜합니다. 성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게을리 했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힘을 다해 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최선의 길임을 한순간도 잊지 맙시다.
오늘도 처해진 상황 속에서 주님께 의지하며 있는 힘을 다하는 충실한 종으로서 하루를 마감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복음을 전하는 그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기양 신부-
이번 주간 내내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양식을 공급하는 한 관리인의 비유를 들어 언제 오시는지 모르게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려야 하는 우리의 자세를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주인이 있든 없든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러운 종과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제멋대로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내는 불충한 종을 비유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충성스럽지 못한 종은 쫓겨나게 되고 처벌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됨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고 동시에 늘 깨어있으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을까요?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사명이 있지만 가장 궁극적인 사명은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신 이 사명은 너무나도 중요한 부분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중요함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8-20)
하늘로 승천하시며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이 사명을 바로 이어받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열두 사도와 후에 개종한 바오로 사도까지 온전히 매진했던 것이 바로 이 선교의 사명입니다. 사도행전이 그 과정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목숨까지도 바쳐가며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실했던 사도들의 행적을 낱낱이 그리고 있는 사도행전을 통해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선교의 사명은 전 세계 곳곳에서 실천되고 있습니다. 밀림 깊숙한 곳부터 교도소에 있는 사형수에 이르기까지 복음은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크고 귀중한 사명을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이 선교의 사명에 나는 충성스러운 종인가? 불충한 종인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충실하지 못한 종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 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12,45-46)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는 불충한 종들이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본당의 신자 수는 3800명에 가까운데 일 년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고작 170여 명에 불과한 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불충실한 종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스스로 되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이 선교의 사명에 내가 얼마나 충실하였는지를 나 스스로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를 생각하면 선입관이 앞서 부담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만큼 큰 이웃 사랑은 없습니다. 요즘 같이 힘들고 외롭고 불안한 시대에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 이상 복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알게 되면 자유를 얻습니다. 가난으로부터도 자유롭고, 건강이 좋지 않아도 자유로우며, 죽음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복음(福音)을 전하는 것 이상 더 큰 이웃 사랑은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에게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일신상의 안위를 제시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씀이지요. 특히 입시의 첫 관문에서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 자녀에게 자유롭고 성실하게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보다 더 자녀를 위하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끔 성당에 가는 시간이 아깝다며 시험 공부에만 열중하라는 부모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금방 무너지고 말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정말 자녀를 위하고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알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는 이웃 사랑의 첫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이 소중한 사명을 별 생각 없이 흘려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당에서도 선교 사명에 충실한 그룹은 어른들이 아니라 초등학생들입니다. 결과가 증명해 주고 있지요. 제가 처음 부임했을 때 70~80 명이었던 아이들의 수가 지금 17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두 배 반의 숫자는 저절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친구들을 열심히 성당으로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선교는 참으로 단순하고 쉽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머리 속 계산이 없지요. ??축구하러 가자.?‘ 혹은 ??탁구 치러 가자.?‘하고 성당으로 친구를 데려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느님을 알게 되고 신앙의 뿌리가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선교 사명을 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는 신자의 사명을 확인시켜 줍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끊임없이 이야기 하지만 소귀에 경 읽기인지 사람들은 교회 밖에만 나가면 본연의 임무를 망각합니다. 선교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충실한 종의 모습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또 교회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선교의 사명이 신자인 우리의 첫 번째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난생 처음으로 산을 갔습니다. 물론 걸어서 등산한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산을 간 것이지요. 제가 이제까지 자전거를 타고 도로만 다녔다고 하니까, 자전거 샾 사장님께서 산을 한번 가자고 해서 어제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고서 산을 오른 것입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특히 울퉁불퉁한 산길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재미는 도로를 타면서 느끼는 재미와 또 다른 색다름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해보는 일인지라 긴장은 되더군요. 더군다나 자전거로 산을 타다가 다친 사람들을 많이 보았거든요.
아무튼 처음에는 아주 무난했습니다. 그런데 산을 오르다가 나무뿌리에 미끄러지면서 살짝 넘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조금씩 겁이 나는 것입니다. 특히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잔뜩 겁을 먹었지요. 새벽이라 이슬 먹은 낙엽과 나무뿌리는 상당히 미끄러웠고 그래서 넘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습니다.
무사히 산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산에서는 괜찮더니만 내려온 뒤 어깨가 너무나 아픈 것입니다. 글쎄 내려오면서 손에 힘을 너무나 줘서 어깨에 담이 걸렸네요.
샾 사장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자전거 타실 때에는 어깨에 힘을 빼시고 타셔야 된다는 것 아시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힘을 주고 타시면 어떻게 해요?”
‘제가 힘을 주고 싶어서 줬나요?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 다시금 분명히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내 맘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몸을 내 맘대로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꾸준한 연습과 노력밖에 없지요. 그래야만 어깨에 힘을 빼고서 여유 있게 자전거를 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연습과 노력은 자전거를 비롯한 운동 경기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주님을 따르는데도 그러한 연습과 노력은 분명히 필요하지요.
며칠 전, 어떤 분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영세 받은 지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당 생활이 너무나 재미없어요. 미사도 레지오도 다 재미없어요. 어떻게 하죠?”
축구 룰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축구 경기 보는 것을 재미있어 할까요? 또한 자전거를 전혀 타지 못하는 사람이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행복해 할까요? 아니지요. 축구 룰을 잘 알아야 축구 경기를 누구보다도 재미있게 볼 것이며, 자전거를 잘 타야 자전거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아무런 노력하지 않고 있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주십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이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면서 오늘 만큼은 주님의 뜻대로 행동해 보면 어떨까요?
내가 못하는 것을 포기하지 마시고 연습하세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신부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김인옥 수녀-
어린 시절 막내였던 나는 아버지의 단골 심부름꾼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수입과 지출을 항상 공책에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계셨는데, 아버지의 심부름은 용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주문하신 물품이 여러 종류여서 나는 나름대로 계산서를 만들어 돌려드리며 심부름 값을 청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심부름 값으로 얼마를 받고 싶으냐고 물어보시면서 “네가 한 일에 대한 값어치를 네 스스로 매겨서 청해 보아라.” 하셨다. 그 후로 나는 계산서를 드릴 때 항상 부가가치세처럼 심부름 값을 적어 넣곤 했다. 그 시절에는 내가 정한 심부름 값을 받아 저금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마다 가계부를 기록했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때 구구단을 잘 외우지 못해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던 내가 점점 숫자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 것은 지금 내가 하는 사도직이 수도회의 재정을 맡아 관리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도회는 회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도회는 국가에 재단법인으로 등록된다. 수도회는 회원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와 은인들의 기부금으로 하느님의 사업을 한다. 대부분의 수도자들은 수도회에 들어오면 돈과 무관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이 일에 부르셨다. 때때로 주님은 나에게 이 일을 맡기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나를 준비시키셨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연례피정 때 우리 수도회의 주보성인인 빈첸시오 성인의 영성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강의하시는 수녀님은 “하루가 모여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일 년이 되고, 일 년이 모여 영원이 됩니다.”라는 성인의 말씀을 소개해 주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내 머리에는 이런 말씀이 떠올랐다. ‘백 원이 모여 천 원이 되고, 천 원이 모여 만 원이 되고, 만 원이 모여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준비와 기다림에 열외는 없다.
-박상대신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이나, 아니면 주어진 계획에 따라 준비하고, 준비가 되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면 기다릴 줄도 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도 만나게 된다. 뜻밖의 불상사나 횡재 같은 일들 말이다. 이런 일들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기에 거기에 대한 준비나 기다림은 소홀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할 수 없었다고 해서 들이닥치는 일들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지 않았을 뿐, 계획된 일이고, 분명히 올 것이다. 그리고 올 것은 ‘어떤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주님이시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어제 복음의 주제와 같다.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반드시 있게 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잘 준비하여 기다릴 것을 거듭 강조하신다. 도둑이 예고하고 집을 털러 오지 않듯이 사람의 아들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39-40절) 지금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냐는 베드로의 질문(41절)에 예수께서는 답을 주시기보다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신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종은 관리인으로 지목된다. 그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종의 신분이지만, 다른 종들에 대하여는 관리인의 신분이다. 관리인은 곧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지도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교회의 지도자들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수행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재림’이 지연된다는 빌미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마지막 날에 가서는 소홀히 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48절) 그 때엔 어떠한 핑계도 변명도 소용없다.
오늘 복음의 비유가 교회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특정 신분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들리기도 하겠지만, 종말의 심판에 대한 준비와 기다림에 열외(列外)는 없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누구나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모양으로든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8절) 우리가 맡은 만큼 내어놓아야 하는 시기를 굳이 죽음의 순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결산해야 한다면, 종말은 우리에게 공포나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된다. 예수께서 재림을 이유로 우리에게 걱정이나 겁을 주시고자 하시겠는가? 그럴 리 만무(萬無)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순간이 바로 결산(決算)의 순간이다. ‘항상 준비하라.’(40절)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마태 28,20)은 매순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렇다면 그분을 향한 매일의 준비와 기다림은 우리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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