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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묵상글 들 ( 12월 29일-시메온식의 관상.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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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2월 29일-시메온식의 관상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어제 복음은 아기들이 아기 예수님 때문에 학살당한 끔찍한 얘기인 데 비해
오늘 복음은 할아버지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보고 감격해하는 얘기입니다.
이 복음을 읽으며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인지 저도 시메온과 같이
구원을 보았다면서 이 세상을 평안히 떠나가게 될지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주님을 알고 살아온 과거를 돌아봅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 그리고 지금까지 주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며
일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요 복된 삶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게 된 것도 행운이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며 산 것도 행운이라는 표현은
그리 신앙적인 표현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니
이 표현을 쓴 것이고 신앙을 가진 부모님을 둔 덕분에
우리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행운이라는 뜻이지요.
사실, 주님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고 살았다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불행했을 것이고, 적어도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도 알고 그래서 사랑을 하며 살게 된 삶이 복이라는 것을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음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제가 사랑 실천을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직 사랑 실천이 부족하지만,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자랑스럽고
부모님과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뜻이지요.
문제는 미래입니다.
더 늙어 약해지고 병들어 하루하루 사는 것이 괴로움뿐일 때도
내가 내 인생을 여전히 사랑하고 고통까지 사랑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내 숨이 넘어갈 때도 당신 구원을 보았다고 할 수 있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내다보며 정말로 평안히 죽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의 사랑이나 행복은 고통을 통과한 사랑과 행복이 아닌,
그래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면
가을에 떨어져 겨울을 지낸 나뭇잎처럼 그렇게 바스러지는 것은 아닐지.
그런 저와 그런 저의 사랑과 행복이 되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제가 이름 붙인다면 시메온식의 관상입니다.
불교 스님들이 근기를 가지고 화두를 붙잡듯
저도 겨울철 비바람 찬 서리에도 흔들려 떨어지지 않도록
사랑과 행복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야 할 것이고
주님의 구원을 보았다는 시메온처럼 주님의 구원을 보되
그것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 되도록 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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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하느님의 구원을 가져올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힙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과 약혼한 마리아를 선택하시어, 그가 낳을 아기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하시며 다윗의 왕좌를 그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31-33 참조). 즈카르야도 자신의 찬미가에서 세 번씩이나 하느님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루실 일을 노래합니다(1,69.71.77 참조).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밤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선포한 기쁜 소식의 핵심도 ‘구원자’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2,11 참조).
루카는 이어서 시메온을 등장시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로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봅니다. 나아가 그는 이 구원자께서 온 인류에게 베푸실 은총, 곧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민족들에게도 마련되었음을 명백히 선언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시메온에게 아기가 구원자로서 장차 당하게 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이로써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도 통찰하게 하십니다. 분명 시메온의 노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명을 선포합니다. 구원받을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그곳에서 주어질 고통에도 동참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구원자 그리스도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으신 분은 어머니 마리아이십니다. 성전에서 율법에 따라 맏아들을 봉헌하시기에 앞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던 어머니 마리아의 응답을 다시 떠올립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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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성탄 팔부 축제 5일)
성탄 팔부 축제 제5일 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이 모세의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굳이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4,4-5)
사실, 율법(속량법)에 따른다 하더라도 굳이 성전에 가지 않고 어디서든 사제에게 성전비용(다섯 세캘)을 바치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예수님을 성전에 데려간 온 것은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후 남편 엘카나와 함께 나이 많은 사제 엘리를 만나는 이야기를 반영해줍니다(1사무 24-28). 그리고 시메온 예언자는 사무엘의 출생 이야기에 나오는 엘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르면, 부모는 아이를 성전에 있는 나이 많은 랍비에게 데려가 복을 빌어주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고 나자 즈카르야가 하느님을 찬미했듯이(루카67-79), 예수님이 할례를 받은 후에도 시메온이 하느님을 찬미합니다(루카 2,28-32).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찬미노래는 흔히 라틴어 첫 단어를 따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 부르는데, <이사야서>(40,5;42,6;46,13;49,6;52,9-10)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성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불리기도 하고, 주로 동방교회에서는 저녁기도 때, 서방교회에서는 끝기도 때 바쳐집니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미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제야”라는 말은 현재가 구원이 성취된 시대임을 말해주며,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은 ’풀어주셨다. 쉬게 하다‘, 죽게 하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이사야서>(40,5)의 “모든 육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말을 반영합니다. 또한 “모든 민족들, 다른 민족들”은 이방인을 뜻하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계시의 빛”이 비추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놀라워하는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는 예수님은 “모퉁이 돌”로서 믿는 이들에게는 요긴한 돌이지만, 배척하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것을 말해줍니다(이사 8,14-15;28,26;로마 9,33;1베드 2,6-8). 따라서 마리아가 고통을 겪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여 멸망을 자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그들의 “마음 속 생각”, 곧 믿지 않는 마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겪게 될 마리아의 고통을 암시해줍니다.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이러한 시메온의 눈은 관상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십자가의 예수님을 마주보고 있었던 백인대장의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는 고백과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의 눈이 되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루카 2,30).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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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성탄 팔일 축제 제 5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탄을 준비하면서 특강을 하였습니다. 코로나의 상황으로 직접 가지는 못했고, 영상으로 녹화해서 보내드렸습니다. 사람이 없는 텅 빈 성당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어색했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입니다. 한 신부님의 제안으로 각자 선물을 준비해서 성탄 선물을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도 기쁨이지만 주는 사람에게도 설렘입니다. 선물을 준비하면서 예전에 본당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제대 앞에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구유 안에는 성모님, 요셉 성인, 소, 양이 있었고,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홍보분과 자매님의 제안으로 성탄 트리에 카드를 달았습니다. 카드에는 예수님께 드릴 선물이 적혀있었습니다.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을 찾아뵙고 대화하기, 시각 장애인에게 가서 선물하기, 성당 화장실 청소하기, 연탄이 필요한 가정에 연탄 사다드리기, 군에 입대한 본당 청년에게 선물 보내기, 혼자 계신 어르신 모시고 식사하기’와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성탄 밤 미사가 끝나고 필요하신 분들은 하나씩 가져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트리에 달려있던 카드를 모두 가져갔습니다. 주님께 선물을 드렸던 따뜻한 성탄이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저는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면서 알았지만 어머니께서는 신학을 배우지 않았어도 체험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도 읽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주교님을 모시고 섬에 사는 공소 신자들을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이 안 계시는 곳이라서 신자들은 교리를 잘 몰랐고, 기도문도 잘 몰랐습니다. 주교님께서 교리를 가르쳐주시고, 기도문도 알려 주셨습니다. 섬을 떠나서 가고 있는데 공소 회장님이 물 위를 뛰어서 오고 있었습니다. 신부님도 주교님도 모두 놀랐습니다. 물 위를 뛰어 왔기 때문입니다. 배 위에 오른 공소 회장에게 주교님이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습니다. 회장님은 주교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 중에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왔는데 배는 이미 출발했고, 급한 김에 뛰어 왔다고 합니다. 주교님은 지식으로 신학은 잘 알았지만 믿음은 공소 회장님보다 약했음을 알았습니다. 주교님은 공소의 교우들을 무시한 것을 뉘우쳤고, 공소 회장에게 기도를 청했습니다. 많이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아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신화와 허구가 아닌, 실제 있었던 역사이며 사건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들의 아이처럼 백일잔치와 돌잔치를 했을 것입니다. 오늘 시메온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메온은 예수님께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대사제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율법학자도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신앙인이라면, 어둠을 벗어나 빛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빛의 세계에 있다고 하면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이는 허구요, 관념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이제 한해가 이틀 남았습니다. 나의 신앙을 관념과 허구의 틀에 가두기보다는 실천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한해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2020년 한 해를 돌아봅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씀을 실천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희망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희망은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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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22-35: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듯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은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하여 “일년생 어린양”도 아니고 “작은 집짐승 하나도 마련할 힘이 없는”(레위 5,7) 처지였기에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제물은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이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낸다.
노인인 시므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오시자마자 신심 깊은 행실이란 두 팔과 꾸밈없는 믿음인 목소리로 그분을 찬미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남녀 백성들을 나타낸다.
의인 시므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의 영혼을 꿰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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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 32)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고맙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꼭 기억해야 할
사랑이 있다.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운데
하느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 속에서도
빛이 되어 오신
우리의
주님이시다.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따르는 것이
우리 삶을
다시 살리는
힘이 될 것이다.
사랑이
계시의 빛이며
하느님을
드러내는
영광이다.
아픔이 시작된
곳에 사랑을
향하는 희망도
있다.
절망이 있어
희망이 있다.
아파도
희망이다.
희망의
존재들인
우리들이다.
희망을
자라게 하시는
주님께서 오셨다.
아픔을
치유하는
희망이시다.
삶을 위한
희망이다.
삶의 중심에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이
계신다.
우리또한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희망을
믿는 이들이
따스한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다.
끝내
이루어지는
희망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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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가정 성화 주간 ⓶: 침묵,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감수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성전으로 가서 하느님께 봉헌한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봉헌은,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먼저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유다인들의 전통(탈출 13,2)에 따른 것이기도 했거니와, 더욱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예수 아기는 성령께서 잉태시켜 주신 이상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 아기의 부모가 지닌 이러한 봉헌 의식은 나자렛 성가정의 침묵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성모 마리아에게서 이 침묵의 태도가 두드러집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메시아를 잉태하리라는 전갈을 들었을 때부터 마리아께서는
이 전갈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루카 1,29).
짐승들의 우리 동굴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았을 때에 목동들이 찾아와 경배하며 천사들이
전해준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루카 2,19).
목동들이 전해준 말은,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루카 2,10-13)이라는 것이었고, 이어서 갑자기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하고 찬미하였다는 말까지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었을 때, 해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관습에 따라 처음으로 소년 예수님을 데리고 갔다가 잃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사흘만에야 겨우 찾아냈는데, 그때 소년 예수님께서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대꾸하였는데, 이때 성모님께서는 어린 아들이 보이는 이 당돌한 반응에 대해 당황하시면서도
이 뜻밖의 반응에 대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분명히 부부지간에 공유되었을 이러한 성모님의 태도는 그나마 복음서의 기록에 나타나 있기라도 하지만,
요셉의 경우에는 복음서마저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혼 직후 느닷없이 일어난 성령 잉태 사건 당시에
요셉이 보인 태도로 미루어보면, 하느님께서 개입하고 계시는 징표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때마다 그도
그 징표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느라고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하였을 것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준 이러한 침묵에 대해,
“침묵은 영혼이 살아 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입니다.
이를 중대시하는 마음이 소란스러움으로 포위당해 있는
우리들 안에서 재생되었으면 합니다.” 하고 강론하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보여준 이 나자렛의 침묵이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영감과
훌륭한 가르침을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부모들에게도 마음의 준비와 영적인 묵상, 그리고 내적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 홀로 은밀히 보시는 기도의 필요성과 가치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만남 중에서 유독 생명에 봉사하는 유일한 만남이 혼인이고,
혼인한 부부들이 자녀를 낳음으로써 이루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자녀의 탄생과 양육 과정에서 겪는 하느님의 손길에 대해서 부모들은 나자렛의 부모가 보여준
이 위대한 침묵을 본받아 자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적인 묵상을 나누며
그리고 각자 내적 생활로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각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의 존재는 그 부부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개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과 공동체에 깃든 하느님의 개입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문맹은 많은 가정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면,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기른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녀를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1요한 2,4),
그분의 계명을 실천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자기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에게 깃들여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아보고자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 대화에서 알아들은 대로 자녀를 존엄한 존재로 기른다면,
그 가정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될 것입니다(1요한 2,5).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하느님의 빛 속에 머무르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만일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자녀를 대한다면, 그 가정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1요한 2,11).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 6세 교황이 강조하는 대로, 나자렛 가정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배울 수 있는 복음의 학교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지극히 소박하고 겸손하며 아름다우신 가정생활의 계시, 그렇게도 심오하고
은밀한 그 계시가 지니고 있는 귀한 의미를 보고 듣고 묵상하며 실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자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것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여 얻어진 영적 감수성은 한평생 그 자녀들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내적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가정에서 유아세례를 시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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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새벽을 열며.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빠다킹 신부님.
요즘에 초등학생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유튜브 크리에이터’라고 말한답니다. 그만큼 유튜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광고나 PPL을 통해 꽤 높은 수입을 얻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1년에 몇십억씩 버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모든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좋아요’와 ‘구독’ 버튼을 눌러 달라고 청합니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는 전 세계에서 매일 1억여 개 이상의 동영상이 등재된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볼만한 것을 0.1%만 가정해도 그 숫자가 10만 개에 달합니다. 이렇게 볼 것 많은 유튜브의 세상 안에서 인기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어서 수익을 창출한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정말로 힘든 곳입니다. 저 역시 1시간짜리 강의 영상을 찍고서 편집하는 데 온종일 걸렸습니다. 직접 경험해보니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하긴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막연한 상상보다 직접 해보니 깨닫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막연한 상상만 합니다.
이 세상은 쉽지 않습니다. 막연한 상상만으로는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해서도 막연한 상상을 합니다.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만드신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하지요. 그 성가정의 기준을 세상에 맞춥니다. 모든 것이 다 풍족한 상태인 것처럼,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정결례에서 바치는 제물을 보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바치는 제물은 비둘기로, 이는 가난, 단순, 순결을 상징하는 예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막연한 상상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막연하게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께 찬미를 드릴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의 빈틈이 있어도 죄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아시기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인의 모습이 아닌 성장하는 갓난아기의 모습을, 곧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그마치 30년을 준비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지금을 어떻게 살고 있나요? 그냥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만을 가지고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매 순간 의미 있게 또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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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지 마라. 종종 열쇠 꾸러미의 마지막 열쇠가 자물쇠를 연다(필립 체스터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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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6개월 된 아기의 아빠 빌리 오웬(Billy Owen)은 모터사이클 정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깨질듯한 두통을 계속 느껴서 황급히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정밀검사 결과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SNUC(sinonasal undifferentiated carcinoma)라는 열 명 중에 아홉이 죽는 생존율이 10%밖에 안 되는 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비강이 막혀서 호흡할 수 없게 하는 암이었지요. 초기 단계라면 종양만 제거하면 되지만, 그의 경우는 오른쪽 눈, 주변 근육 및 신경을 포함한 얼굴의 절반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과거 오른쪽 눈이 있던 곳에 커다란 구멍이 황량하게 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수술을 받는다면 누구나 우울해지고,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보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이용해서 현재 각종 공포 영화 속의 좀비 역으로 새로운 경력을 쌓고 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아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시작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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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성탄 8일 축제 내 5일.<빛이 세상에 왔지만>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요한3,19).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빛을 기다리고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 그리고 그 빛을 누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를 통하여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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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5일.<십자가>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루카 2,28-33).”
시메온 예언자의 찬미가의 앞부분은 생전에 구세주를 뵙게 된 것에 대한
찬양이고, 뒷부분은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해서
구세주를 보내주신 일에 대한 찬양입니다.
이 찬미가를 듣고 요셉과 마리아가 놀란 것은,
예수님을 ‘모든 민족들’을 위한 구세주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즉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천사는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32-33).
천사의 말에서 ‘야곱 집안’이라는 말은, 신학적으로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지만, 표현만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났을 때 천사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마태 1,21).
이 말에서 ‘당신 백성’이라는 말도 신학적으로는 ‘모든 사람’으로 해석하지만,
표현만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구세주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시메온이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한 구세주” 라고
말하니까 놀라게 되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분이라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놀라워하였다.’ 라는 말에는
‘기뻐하였다.’, ‘감격하였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세주” 라는 말은,
사실상 “예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라는 말입니다.
내가 성탄절을 경축하고 기뻐하는 것은,
바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을 경축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나의 구원’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함께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나의 구원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나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나의 구원’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말은 이기심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순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내가 먼저 구원의 길을 걷고 있어야 다른 사람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복음의 힘으로 살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만이 남을 믿게 만들 수 있고, 기뻐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기쁨을
남과 나눌 수 있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희망을 남에게 전해 줄 수 있고,
살아 있는 사람만이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여기서 시메온이 한 말은 예수님의 수난을 예언한 말인데,
마리아에게만 말한 것은, 아마도 요셉은 예수님의 수난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지만,
모든 사람이 그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여기서 ‘쓰러지다.’ 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쓰러뜨리시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 넘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반대하고 공격하는 표적”
이라는 뜻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다.’ 라는 말은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겪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구원 사업은
‘선별 작업’과 같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루카 3,16-17).
시메온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관해서 한 말은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와 대칭을 이룹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사도 2,23-24).”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시메온이 마리아에게 한 말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예언이고,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증언이고 고백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메시아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신 속죄 제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고,
우리 자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1,3).
(시메온이 예수님의 부활을 명시적으로 예언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생애가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찬미가와 예언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에 관해서는,
“믿음의 순수성을 위한 단련”이라고 설명합니다(1베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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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성탄 팔일 축제내 제5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명품名品인생을 삽시다
- 사랑의 봉헌 -
각자 고유의 명품인생을 살라고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된 인생입니다.
바둑에서 길이 남을 기보를 명국名局이라 하며 이런 뛰어난 명국을 남긴 이를 기성棋聖이라 합니다. 길이 남을 보물같은, 고전같은 그림을 명화라 하며 이런 뛰어난 명화를 남긴 이를 화성畫聖이라 합니다. 늘 언제나 유행을 타지 않고 한결같이 빛을 발하는 물건이 명품입니다.
고전이나 보물처럼 세월이 흘러도 짐이 아니라 선물처럼 늘 새롭게 느껴지는 명국이요. 명화요, 명품이요, 명필입니다. 실용적 사고가 만연된 인스탄트 소비주의 시대, 문사철文史哲, 시서화詩書畵를 구비具備한 옛 출중한 선비들 같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깊고 향기로운 이들이 참 그리운 시절입니다. 친필로 쓴 긴 옛 선비들의 긴 서간체 글이나 주고 받은 시문詩文을 대할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누구나의 소망이 명국인생이요 명화인생이요 명품인생일 것입니다. 바둑을 좋아하는 모 정치인을 보면 과연 고수高手라는 감탄이 저절로 들곤 합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평화로운 모습입니다. 아마 2-3단이라 하는데, 그분의 기풍과 더불어 인품을 짐작하게 하는 말마디에도 공감이 갑니다.
“저는 바둑을 통해 인생을 배웠습니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크게 보고, 멀리 내다보기, 전체를 봐야 합니다. 바둑에서 국지전의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늘 반면 전체를 보면서 대세를 살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꼼수가 정수에 이길 수 없는 이치도 같습니다.”
인생은 그대로 한 판의 바둑과 같습니다. 결정적 패착없이 악수를 두지 말고 꼼수나 암수에 걸리지 말고 완성해야 하는 명국인생입니다. 저도 참 바둑을 좋아해 고등학교 시절에는 바둑에 밤새웠던 일이 많습니다. 지금도 명국 기보를 보면 흥미가 발동하나 수도원에 들어온 후로는 바둑을 끊었습니다. 시간과 정력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닮은 바둑의 원리는 깊이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바둑은 하수나 동급의 사람과 두면 늘지 않습니다. 고수와 둬야 늡니다. 저에게 명국 인생의 상대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과 인생 대국을 하며 명국인생을 사는 것이 간절한 소망입니다.
도중에 포기함이 없이 죽는 그날까지 평생 한결같은 끈기와 노력과 정성으로 완성해야 가는 각자 고유의 명화인생, 명품인생, 명필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입니다. 결고 비교하여 우열을, 호오를 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명국인생, 명화인생, 명품인생, 명필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원형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닮은 성인성녀들이 각자 고유의 명국인생, 명화인생, 명품인생, 명필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제가 볼 때 명품인생의 모범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며 명국인생의 정말 영적 고수입니다.
누가 뭐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의 눈만 생각하며 온갖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과 함께 제모습, 제크기, 제색깔, 제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명품인생을 만들면 됩니다. 이런 인생 역시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하느님께 선물로 받은 인생을 내 노력으로 완수해갈 때 비로소 명품인생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시메온이 명품인생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을 봉헌한 마리아와 요셉 역시 명품인생의 모범입니다. 명품인생, 명화인생, 명국인생의 비결은 다하나 평생 한결같은 아름다운 봉헌의 삶에 달렸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한결같이 아름다운 봉헌의 삶에 충실할 때 명품인생이 됩니다.
사랑의 봉헌, 봉헌의 깊이, 봉헌의 향기, 봉헌의 품위,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요즘 사람들의 언행이 야비하고 천박한 것은 이런 봉헌의 영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삶의 의미입니다. 봉헌의 삶보다 인간을 고양하고 품위있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봉헌이란 말마디보다 더 깊고 그윽한 말마디로 없을 것입니다.
평생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의 위에는 늘 성령이 머물러 계셨다 하며, 마침내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 품에 안고 감격에 벅차 아름다운 찬미가를 부릅니다. 끝까지 기다리며 봉헌의 삶을 살다가 어둠이 지나가자 참빛인 주님을 맞이한 시메온입니다. 우리가 매일 끝기도때마다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찬미가의 끝대목처럼 이민족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최고의 명품인생을 사실 예수님께 대한 예언입니다. 참으로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까지 순종하며 봉헌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셨던 참 아름다운 주님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시메온의 마리아 성모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마리아 성모님 역시 영혼에 칼에 꿰찔리는 온갖 아픔과 비움의 여정을 통해 온전히 예스YES의 삶, 봉헌의 삶을 사심으로 마침내 최고의 명품인생이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봉헌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사도요한이 제1독서에서 답을 줍니다.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므로 그리스도처럼 살면 됩니다. 형제애를 통해 봉헌 삶의 진위가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그러니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주님의 계명인 형제애를 실천할 때 봉헌생활의 완성이요 명품인생, 명국인생, 명화인생이 완성됩니다. 역시 명품인생의 답이자 길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위도 형제애를 통해 그대로 검증됩니다. 그러니 함께 하는 형제들은 형제애를 실천하라 주어진 구원의 도구이자 ‘천국의 사다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봉헌의 삶에 항구함으로 명품인생, 명국인생, 명화인생을 살 수 있는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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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영속성을 보여주십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루카 2,22)
"주님의 율법에 ...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루카 2,23)
"주님의 율법에서 ... 명령한 대로"(루카 2,24)
아기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율법에 기록된 것을 이행하기 위함이지요. 율법은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삶의 근간이고 정체성이며 이정표입니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다."(루카 2,27)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시메온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문자에 매이지 않고 영에 활짝 열린 그가 비로소 구원자 아기를 만나고, 알아보는 영광을 얻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2)
메시아를 기다리며 어둠을 견뎌온 이스라엘에 놀라운 보상이 주어집니다. 빛이신 분이 길었던 어둠을 가르며 세상에 들어오신 것이지요. 그렇다고 구약 시대까지를 어둠이라, 신약 시대부터 빛이라 칼로 베듯 단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빛은 성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미리 준비하신 구원의 절정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옛 계명과 새 계명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3)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지키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이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준비시키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이는 율법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친히 보여 주신 율법의 완성을 살되, 문자 자체에 매여 있지 않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완성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무르익어오던 율법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통해 정점에 이른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사랑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심정이 생생히 드러난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1요한 2,7-8)
요한 서간의 저자는 옛 계명과 새 계명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품으신 그 사랑이기에 연속성 안에 있으면서, 율법을 전해 준 모세와 달리 예수님은 당신께서 가르치신 계명대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으니 새로운 사랑이란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1요한 2,9)
구원자께서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그분과 제자들에게 살의까지 품습니다. 자신들이 수호해 온 율법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 계명을 대립각에 놓고 배척함으로써 눈을 감아버린 것이지요. 이스라엘 역사를 가로지르며 유유히 흘러오던 율법의 강물이 비로소 출구를 만나 온 세상을 향해 힘차게 뿜어나오는 완성의 때를 외면한 채 그들은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복음 속 시메온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앞에서 하느님 백성은 옥석이 가려졌지요. 사랑을 사랑으로 보는 이와 위험으로 간주하는 이로 말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우리의 신앙과 사랑의 민낯을 드러냅니다.
지금 이 세상에도 사랑을 두고 율법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재단하는 눈들이 없지 않습니다. 사랑할 마음은 없으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불편해, "젊은 사람이 왜? 멀쩡해 보이는데 왜? 나라에서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자신의 사랑없음을 율법으로 합리화하고, 행정에 떠넘깁니다. 사랑없음을 법적으로 정당화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흘러가는 사랑을 방해하고 차단해서 결국 사랑의 맥을 끊으려는 어둠의 힘이지요. 효율적이고 영리해 보이나 하느님의 온도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하느님께서 명하신 그 사랑의 완성임을 받아들이는 이는 자신이 받은 그 사랑이 또 다른 완성으로 이어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길을 터주지요.그는 언제라도 사랑의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으려 영혼을 활짝 열고 이웃과 세상을 살핍니다. 마치 감독의 Q 사인을 기다리며 Stand by 상태에서 대기하는 연기자처럼,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하나인 것처럼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사랑의 법이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통해 완성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되 문자에 매이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자유로이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성탄은 하느님 사랑의 축제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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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루카2,29)
오늘 복음은 율법 규정에 따라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말씀과 시메온 예언자가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인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이 시메온의 노래는 시간경 기도인 성무일도 끝기도 때 바치는 노래입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신 시메온의 하느님 찬미가를 통해, 예수님 탄생의 의미와 본질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 시메온 예언자는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어, 어머니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아픔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입당송)
시메온 예언자의 예언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우리 죄에 대한 희생제물이요 속죄제물인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와 본질'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당신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이듯이.
지금 코로나 19 특별방역 지침에 따라 많은 것들이 잠시 멈춰졌고, 함께 드리는 미사까지도 멈춰졌습니다.
이런 가운데에 주님께서는 탄생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19로 인해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마음껏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그렇게 마음 아파하고 있을 때인가?
지금은 그동안 잊혀지고 묻어두었던 성탄의 참의미와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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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 자신이 원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된 내용의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에 의해 봉헌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예수님은 굳이 봉헌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어차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성모 마리아에 의해 봉헌됩니다. 성모 마리아에 의해 봉헌되었다는 사실은 그분의 영혼이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시메온의 말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이신데도 또 하느님께 봉헌되셔야 할까요? 그것도 인간의 손에 의해서.
하느님의 성전에 봉헌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에 봉헌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집은 뜻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냥 하면 되지 왜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혼자서 사랑할 능력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애덤 그랜트’는 자신의 책 『기브앤테이크』에서 내어줄 줄 아는 사람, 남의 행복을 우선으로 삼는 사람, 이타적인 사람이 세상에서도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그는 ‘기버(Giver)’라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만 알고 남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을 ‘테어커’(Taker)라고 하는데, 이들은 세상에서 대부분 힘든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중간에 있는 사람이 받는 만큼 주겠다는 사람인데 ‘매처(Macher)’입니다. 이들은 월급으로 받는 만큼 일해주기 때문에 중산층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가장 성공하는 사람도 기버이지만 가장 망하는 사람도 기버라는 것입니다. 기버는 마음이 착해서 남이 보증을 서달라면 이유 불만 않고 서주고, 남이 승진하도록 도와주며 그래서 남에게 이용당하고 돈도 못 법니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기버는 성공하고 어떤 기버는 실패하느냐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애덤 그랜트 자신이 대학 초년생 때 아르바이트를 한 일이 있습니다. 처음 맡았던 아르바이트는 ‘레츠고’라는 여행 책자를 만드는 회사에 광고 판촉이었습니다. 관리자는 근무 첫날 고객 명단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레츠고 관광 가이드 광고비로 작년에만 30만 달러를 낸 사람들이야. 전화를 걸어서 다시 광고를 싣도록 설득해봐.”
겨우 열여덟 먹은 대학생이 회사 중역들에게 내년에도 광고를 실어달라고 말하는 것은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그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여행사 경영자 스티븐이었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화를 냈습니다. 작년에 그 여행사 광고에 나갔던 여행사 주소와 이메일이 이미 쓰지 않는 오래되고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이메일과 주소를 유지하기 위해 지급된 수백 달러를 빼주지 않으면 광고를 싣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광고는 그 위치와 크기에 따라 가격이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던 그랜트는 10% 광고비를 깎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화를 하다 보니 세 번 더 깎아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다시 광고를 싣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습니다. 작년 재광고율은 95%였는데, 그랜트는 거의 회사에서 잘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광고부 부팀장을 만납니다. 그녀는 작년 그랜트의 자리에서 일하며 30만 달러라는 수익을 올린 사람 때문에 업무가 늘어나 새로 생긴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일하며 학비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랜트는 자신이 하는 일의 역량에 따라 자리가 더 만들어지고 줄어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광고주들에게 밀리면 자신만 잘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입지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깎아달라는 말에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을 이야기하고, 또 그 광고로 많은 학생이 등록금을 내게 된다는 사실 등을 이야기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4달 뒤, 그랜트는 6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고 23만 달러의 새로운 광고도 따냈습니다. 그 회사가 생긴 이래 최고의 실적입니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광고부서의 영업 총 책임자가 되었고 100만 달러 수익을 달성하게 됩니다.
처음 그랜트가 일이 안 될 때는 사실 상대의 이익을 생각해 줬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좋은 사람’이란 이미지를 상대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면서도 상대에게 잘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일자리가 생기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생각에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회사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기도 합니다.
“나 너 많이 사랑해!”라는 말과, “하느님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거야!”라는 말과 어느 말이 듣기 좋습니까? 자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듣기 좋습니다. 하느님이 사랑하라니까 억지로 사랑한다는 식으로 말하면 뭔가 기분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봉헌한 사람이고,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봉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랑을 파견받지 않고 자신 힘으로 하려고 하면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그랜트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명예를 채우려는 사람이 됩니다. 호구 기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파견되어야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아버지께 봉헌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힘으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시키셔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 뜻에 봉헌되어 사랑하셨다면 우리 또한 그래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봉헌되었을 때 참으로 이 세상에서도 성공한 기버, 사랑 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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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투명한 아침 햇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석양은 더욱 찬란합니다!
성탄 시기 우리가 봉독하는 복음서 안에는 노인들께서 롤모델로 삼으시면 좋을 인물들이 몇명 등장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한나, 그리고 시메온입니다.
우리 모두 꿈꿉니다. 고상하고 품위있는 노인, 지혜롭고 영적인 노인!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더 기도해야지, TV를 끄고 책을 손에 들어야지, 포기해야지, 내려놓아야지, 입을 닫고 지갑을 열어야지, 백번 천번 다짐해보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노인 시메온의 삶이 참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시메온은 나이 들어가면서, 육적인 삶을 줄이고 영적인 삶을 조금씩 확장시켜나갔습니다. 마치 오늘날 열심한 어르신 교우들처럼, 매일 같이 성전으로 출근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에 따르면 그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던”(루카 복음 2장 25절)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시메온은 더 이상 내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더 이상 지상의 삶이 아니라 천상의 삶을 추구했습니다. 두발은 비록 이 땅위에 딛고 서 있었지만, 마음은 벌써 천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잘 준비된 영적 노인 시메온에게 마침내 주님께서 풍성한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평생토록 염원했던 소원, 지복직관의 은총, 메시아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시메온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복음 2장 29~32절)
또 다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또 다시 나이 한살을 더 먹으면서, 또 다시 주님 가까이 한발 더 다가가면서, 고민하고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고상하고 품위있는 노인, 지혜롭고 영적인 노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말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감격에 찬 노래를 부르는 시메온을 바라보며, 노년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계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해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가는구나 하며 좌절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어디 가서 나이 자랑 절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나이 들수록 더 기도하고 더 영적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부질없는 고집도 내려놓고, 별 도움 안되는 자존심도 버려야겠습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날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어떻게 해서든 움직여야겠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매일 눈에 띄게 소멸되어가겠지만 그와 반비례해서 영적인 영역은 더욱 성장시켜나가야겠습니다. 내 안에 나는 점점 작아지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점점 커지도록 나를 비워야겠습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신기한 소멸과 죽음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성찰해야겠습니다. 멋지고 훌륭하게 나이 드는 일은 기술을 젊을 때부터 배워야겠습니다. 어제의 나약하고 죄투성이인 나와 매일 아침 결별해야겠습니다. 나를 안주하게 만드는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매 순간 탈출해야겠습니다.
투명한 아침 햇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석양은 더욱 찬란합니다. 휘황찬란한 도시도 멋있습니다. 그러나 허물어져가는 고성(古城)은 그에 못지않게 멋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명품 노인으로 당당히 서기 위해 지금부터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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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김용원 토마스 신부님. ◉ 모든 것은 지나간다 ◉ [성탄 팔일 축제 제5일(2020.12.29)]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이 말은 다윗 임금이 세공사를 시켜 자신의 반지에 새기고 다닌 글귀입니다. 곧 승리를 거두어 기쁨을 억제
하지 못할 때 기쁨에 도취하여 자만하지 않도록, 반대로 큰 절망에 빠져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낙담하여 좌절하지 않도록, 다윗 임금은 이 글귀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성녀의 말을 노랫말로 만들어 아름다운 곡을 붙였습니다. “아무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아도 인생의 끝자락에 서면 한평생이 하루저녁 꿈과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한때는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런 순간도, 주체할 수 없이 행복하고 벅찬 순간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니 세상만을 쫓아 사는 사람은 세상이 사라질 때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고, 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기다리고 희망하며 살았던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몇 년 동안 백혈병으로 고생하던 한 소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병실을 정리하던 중에 소녀가 몰래 기록했던 일기장이 나왔습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오늘도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 엄마를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햇살이 환했어요. 감사합니다.’ ‘간호사 언니가 활짝 웃었어요. 뭔가 좋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에요.’ 소녀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망 대신 감사드리는 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습이 과연 어떠한가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화장을 하고, 예쁘고 멋진 옷으로 자신을 꾸밉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형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외적으로 꾸미는 것보다 더 큰 아름다움, 진실한 아름다움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내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이렇듯이 내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늘 감사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유다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성전에서 봉헌식을 해야 했습니다.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레위 12,2-3)는 성경의 기록 때문입니다. 마리아께서도 이런 이유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러 가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신 분께서 인간의 손에 들려 성전에 봉헌되십니다. 봉헌을 받으셔야 할 분께서 봉헌되시는 것은 철저하게 우리와 같으신 분임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며,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사시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는 시메온이 예수님 일행을 기다
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늙은 예언자 시메온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그는 나이 많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렇게 늙은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시메온은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시메온은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루카 2,26)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마침내 오늘 예수님을 팔에 안고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 종이 평화로이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눈으로 구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루카 2,29-30)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순간 늙은 시메온이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행복해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시메온의 이런 모습을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성녀 데레사의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시메온에게 지금의 늙은 나이까지 살아온 시간은 모두 사라졌지만 주님만이 영원하시기에 그는 이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시메온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기쁘다고 너무 기쁨에 메이지도 말고 슬프다고 너무 슬픔에 잠겨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하고 외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 영원한 것이 보입니다. 시메온이 품에 안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하느님이 보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은 영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고 있습니까? 세상과 함께 사라질 것들(돈, 권력, 명성)을 쫓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것들을 희망하면 결국 절망과 허무만 남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욕심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메온은 달랐습니다. 시메온은 내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메온은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으로 성전에서 평생을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시메온을 보면서 우리는 노년은 쇠퇴와 상실이 아니라 지혜의 완성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노년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것이요, 노년의 최대 행복은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메온이 우리에게 깨우쳐 준 지혜입니다. 우리도 시메온처럼 살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는 때에도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 해남성당 김용원 토마스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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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9.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 일기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작은 소망을 품은 기도….
두 마리의 염소가 좁은 산길을 가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위로 오르려 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내려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이 너무 좁아서 염소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자리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길옆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였습니다.
결국, 두 마리는 도중에서 만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두 마리는 서로 바라보다가 꼿꼿이 서서, 마치 한판 싸움이라도 벌일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 많은 사람이 이 두 마리의 염소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싸울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두 마리의 염소 중의 한 마리가 길옆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한 마리만 무사히 그 길을 지나가던지, 아니면 싸우다가 두 마리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래쪽에서 올라가던 염소가 길 위에 엎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던 염소는 그 등을 딛고 내려갔고, 그제야 엎드렸던 염소는 일어나서 제 길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이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인간들이 만든 정결례를 따르는 모습까지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힘으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었던 방법은 딱 한 가지 ‘하느님의 사랑’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다름 아닌 “눈높이 사랑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낮추는 하느님의 사랑에 시메온 예언자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무일도 제 2독서에서 성 베르나르도 강론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멘.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힘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초라한 마구간의 구유에서 이 세상에 가장 낮은 이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제가 신학생 때 가장 존경했던 영적 지도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한 시간 동안 영적 면담을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도무지 말씀을 안 하십니다.
말씀 좀 하셔서 제가 올바른 영성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으면 하는데, 신부님께서는 1시간 동안 저 혼자만 말을 하게 하십니다.
당시 저는 그 신부님의 모습에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제로 살아가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명한 것은,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말을 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의 말을 들어 주는데에 있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 사랑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낮추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데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운님들 자신이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가서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뿌리내릴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저 두레박 사제의 소망이 있습니다.
제발 코로나가 지나가고 사제가 신자 고운님들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사제가 자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 고운님들의 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이 걸리더라도 그동안 코로나로 힘들게 살아왔던 고운님들의 삶을 고해성사로 치유 받고 회복시켜 고운님들의 삶의 자리에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뿌리내려 주고 싶습니다.
고운님들이 조금만 더 참고, 더 기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저 두레박 사제는 작은 소망을 품고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간호하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도 주님의 치유와 회복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작고 적은 일에 충실한 영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영혼, 그래서 성령님이 항상 머물러 있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복된 고운님들은 두레박 사제의 작은 소망을 품은 기도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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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9일 화요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매일미사
_강주석 베드로 신부 집전
https://youtu.be/cEaTd5bWyyo (31:31)
•202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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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석 베드로 신부 (의정부교구 가톨릭 동북아 평화 연구소 소장) 집전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5
*** 신부님 강론 11분 35초부터 16분 50초까지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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