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허창옥의 『새』를 읽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숭고함-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에서 미국의 독립운동가인 패트릭 헨리가 한 말이다. 만약 그 자리에 작가가 섰더라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자유가 아니면 빵이라도 달라!”
『새』를 받아들고 “<새>”, "<섬>", "<밥>", "<길.4>" 부터 읽었다. 표지 그림처럼 제목이 명징해서이다. 작가는 책 전체를 통해서 먹는 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글에서 “밥”이 소재로 등장한다. 인간의 자유성을 억압하는 근원적인 굴레가 바로 존재의 본능(밥) 때문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오래 전에 작가는 젊은 어머니의 주검을 눈앞에 두고서도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던 자신을 발견한 이야기를 독백처럼 내 뱉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전골냄비 앞에서 여자 넷이 일상의 수다를 털어 내는 이야기를 주워들은 것처럼(“<밥 먹는 여인>”)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모습은 처절하게 슬퍼해야 마땅한 지경을 당해서도 왜? 배고픔이란 의식이 슬픔이라는 감정을 짓눌러버리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설움들이 고작 목구멍으로 밀고 들어오는 밥 한 덩어리의 힘을 이기지 못함을 털어 놓던 그 날 이후로 5년여의 세월이 흘러서 수필집 『새』가 탄생된 것이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늘 밥을 남긴다. 2/3 쯤만 먹고는 남긴다. 밥을 먹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무척 미안한 듯, 밥 한 그릇을 비우는 그 쉬운 일이 그에게는 힘이 든다. 양푼이 밥을 후딱 비우는 억척스러운 여인이 되지도 못하고(<밥 먹는 여인>), 그렇다고 이슬아치처럼 이슬만 먹고 살아가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그러하듯이 경계인이다. 그 경계에 서서 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살피고 어찌하지 못하는 모순에 괴로워한다. 그의 고뇌는 군왕의 눈도, 백성의 눈도, 어미의 가슴도 아닌, 한 인간의 마음으로 짚어 보는 고뇌이다.(<섣달그믐밤?). 승(僧)도 속(俗)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가식이 없고 진실하다. 그는 출세도 부귀도 명예도 문명(文名)을 날리는 일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오직 진실을 향한 열망 때문에 글을 쓴다. 그의 본색이자 수필의 본색이다.
그는 아주 어린 날부터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선은 늘 “밥”에게 가서 멈추었다. “옴마”라는 말은 애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워서 부르는 이름이다. 나에게 “맘마”를 주는 분으로 어머니란 의미가 부여되기 전에 형성되는 의성어다. 작가는 “<옴마, 옴마, 울옴마>”에서 아홉 살짜리가 난생 처음으로 받아온 자랑스러운 상장(賞狀)을 곡식자루 주둥이를 막는데 써버리는 엄마를 떠올린다. “진리” “형이상학” “깨달음” 나아가서는 “문학”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고상한 것들을 밥 앞에서 '묵사발'로 만들어버리는 힘찬 일갈이고 사자후다. 이 사건은 시간적으로는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이지만 작품으로는 가장 나중에 쓰인 글로 추정된다. 그는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작품 집 『새』를 출간 한 것이다. 그의 오랜 구도자적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작품이다.
작가가 길을 찾아 나선 것은 서른 해도 더 지난 아득한 젊은 날인 <산사의 밤, 눈은 내리고>에서부터다. 햇병아리 구도자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소금으로 절이기만 한 시퍼런 배추김치가 자꾸 목에 걸리는 절밥” 같아서 쉽게 이해되어 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서 수필쓰기는 “진리란 무엇인가?” 그 근원적인 물음을 향한 "<만행(卍行)>” 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 수필을 써왔고 지금도 왕성하게 수필을 쓰고 있다.
그의 작품에 담긴 이야기는 그냥 스토리가 아니다. 거의 대부분이 상징이다. “상징” 없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작품 “<새>”도 상징이다. 모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자유에의 의지를 “새”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한 끼의 밥을 얻기 위해, 늦은 시각(나이)까지 살아내는 일(작가가 일찍이 그렇게 표현 한바가 있음)에 몰입하는 그것을 '검은 새'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눈부시게 희고 견줄 데 없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거듭나는 일을 '흰 새'로 표현한다. 검은 새가 흰 새로 되는 일(진정한 자유와 해방) 그건 작가만의 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다. 그 꿈을 이루는 길은 현실을 떠나 있는 절과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 그 속에서 살아 내는 일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 만행(卍行)을 기꺼이 이겨 낼 그때 비로소 육안으로만 보이던 검은 새가 사라지고 내 안에 숨은 흰 새가 나래를 펴고 창공을 날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는 그때 우리가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춤을 출 수 있다고 말한다. 참 자유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자유로운 영혼, 떠도는 영혼>”). 그는 짐짓 그들처럼 내가 그 무게를 털어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고 마음을 숨긴다. 삶을 이겨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검은 새'들에 대한 예의이자 애정이다.
이야기 수필에 익숙해 있으면 그의 작품이 쉽게 다가오질 않는다. 우리 수필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문인들조차도 수필을 읽는 방법을 모르는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상징 수필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상징적인 이야기를 그냥 일상의 스토리로만 읽어 들이려고 하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재미가 없네" 하는 것이다. 수필이 문학이 되려면 작가가 표현하여 전하려는 것이 설명인지, 묘사인지, 직유인지, 은유인지, 상징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상징은 읽는 이의 생각의 각도나 깊이 여하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로 읽혀지는 힘이 있다. 샘이 깊을수록 물이 맑고 시원하고 달콤한 것처럼 우리의 생각 또한 그러하다. 천만 길 깊이에서 샘물을 길어 올리듯이 그렇게 길어 올려야 영혼을 울리는 수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을 하던지 치열하게 살아 내야 참 자유에 이른다("<사막에서 버티기>")는 고언을 들려주고 있다. 그의 의식은 이미 고독한 섬이나 고독한 새가 아니다. 땜질한 냄비 같고 각설이 저고리 같은 길, 때로는 어두컴컴한 터널 같은 인생길(“<길∙4>”)을 달려낸 영혼이다. “<김순분 아지매의 비닐봉지>”는 대미를 장식한 작품이다. 비바람에 날려 다니는 검정 비닐봉지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최대의 비참은 불멸이라고 외치면서 자신을 그토록 얽어매고 있던 고뇌에서 해방된다. 그로 인해 나의 번뇌도 함께 소멸된다. 그의 글은 화려한 문체도 군더더기 수식도 없다. 그래서 더 진실하다. 그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나도 가고 싶다. 세상살이가 녹녹치 않아서 오래 잊고 살았던 곳, 여유와 낭만이 있는 그곳으로 가서(“<그곳에 가고 싶다>”) 지는 노을을 등 뒤로하고 그와 함께 오래도록 탱고(수필)를 추고 싶다. 탱고를 배운 바도 없지만 흰 새와 검은 새를 다 함께 사랑하는 그 기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숭고함"은 아니까. 빵과 존재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아니까.
* 수필집『새』는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자기 삶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 써진 귀중한 책이다. 나는 고료 없이는 글을 쓰지 않는다고 천명한 바가 있다. 그 금기를 깨고 수필세계의 원고 청탁을 받고 이글을 쓴다. 이만한 명작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자가 숨겨둔 보물의 십분의 일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우리 수필의 발전을 위해서 짧은 지혜를 자랑하였다. 수필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이글이 작가에게 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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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표/범몽(凡蒙), 수필가. <문학예술>, <에세이 21>로 등단. 대구수필가협회 회원,수필집 <꼴찌로 달리기>, <생각 속에 갇힌 인간>, 관세사란 직업으로 그 지겨운 밥벌이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첫댓글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마라!
타인을 구속 시키려 들지도 마라!
노예해방은 모세가 출애굽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노예해방을 전 인류로 확산 시킨 분이 예수다. 예수의 노예 해방은 신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죽음에 가두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타인의 자유를 예속하여 자기에게 이롭게 하려는 모든 사악하고 사이비적인 생각을 배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