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사람이 깨어나면서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는 설정이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한 일일드라마에서도 교통사고로 10년 넘게 식물인간으로 있던 사람이 깨어났지만 치매 상태였는데 다시 교통사고를 당해 그 충격으로 정신이 돌아와 과거를 기억하게 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개연성이 희박한 상황을 이중으로 넣은 작가의 무심함이 대단하다. 조만간 주인공이 로또 1등에 연거푸 당첨되는 설정도 나오지 않을까(그래야봐 66조분의 1밖에 안 된다).
그런데 며칠 전 TV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허리가 아파 15년째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90세 할머니가 교통사고로 쓰러져 머리가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고 119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회복 중 침대 위에서 식사를 한 뒤 할머니는 무심코 식판을 내다놓다가 깜짝 놀랐다. 침대에서 병실 밖 복도까지 허리를 편 채 걸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의사들은 “사고 충격으로 신경을 누르던 게 풀린 것 같다”, “충격으로 놀란 근육이 척추를 꽉 잡아줘서 그런 것 같다”는 등 별로 와 닿지 않는 추측을 했다. 한마디로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가 깨어나는 건 어떨까? 사고 등으로 의식을 잃은 뒤 이를 회복하지 못하는 기간이 1년이 넘어가면 의사들은 보통 깨어날 가망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끔 식물인간으로 수년을 보내다가 깨어나면 기적이라며 해외토픽감이 된다. 실제 작년인가 TV에서 그런 사람 얘기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미주신경자극장치는 왼쪽 가슴에 심은 전류발생기와 목의 미주신경에 연결된 전극으로 이뤄져 있다. 스위치를 켜 전류를 흘려보내 미주신경을 자극한다. ⓒ Cyberonics
말은 못하지만 눈짓으로 반응해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 9월 25일자에는 15년이나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사람이 미약하나마 의식을 회복했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이게 왜 연구냐 하면 의료진이 이 사람을 깨우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즉 환자의 미주신경에 전극을 박아 지속적으로 전류를 흘려보냄으로써 잠자는 뇌를 깨운 것이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부설 인지과학연구소의 안젤라 시리구 박사팀은 20세 때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가 된 뒤 15년째 누워있는 한 남성을 대상으로 ‘미주신경자극’이라는 치료법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미주신경(vagus nerve)이란 뇌의 숨뇌(연수)에서 나오는 신경으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심장, 인두, 성대, 위, 장 등의 장기에 연결돼 해당 부위의 감각과 운동에 관여한다. 최근 ‘제2의 뇌’라고 불리는 장과 뇌의 의사소통도 주로 미주신경을 이용한다.
그런데 미주신경에 전극을 꽂아 자극하면 그 자극이 뇌로 전달돼 뇌의 몇몇 부위의 활동이 변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뇌에 직접 전극을 집어넣지 않아도 목에 있는 미주신경을 건드리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뇌전증(간질) 같은 신경질환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의 증상이 심할 경우 몸에 미주신경자극장치를 부착해 이상 조짐이 느껴지거나 증상이 나타날 때 의료진 또는 환자 스스로가 작동시켜 미주신경을 자극해 사태 전개를 막거나 증상을 완화한다. 현재 미주신경자극장치는 미국의 한 회사에서만 생산하는데, 회사 사이트를 보면 지금까지 10만 명 이상이 치료를 받은 것 같다.
15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있던 35세 남성에게 미주신경자극 치료법을 쓴 결과 뇌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대사량을 보는 FDG-PET 데이터로, 오른쪽 두정엽과 후두엽, 시상(thalamus), 설전부(precuneus)의 증가가 두드러진다(왼쪽이 전, 오른쪽이 후). ⓒ ‘커런트 바이올로지’
연구자들은 35세인 식물인간 환자의 몸에 장치를 부착한 뒤 정기적으로 미주신경을 자극했고 6개월이 넘도록 상태를 관찰했다. 또 뇌파를 측정해 뇌의 활동량과 패턴에 변화가 있는지 확인했다.
식물인간 상태는 우리가 잠을 잘 때와 비슷하게 뇌의 여러 부분 사이의 연결, 즉 네트워크가 끊어져 있다. 그 결과 호흡이나 심장박동 같은 기본적인 생리활동을 담당하는 부분들은 제대로 작동해 삶을 지속할 수 있지만(물론 외부에서 위로 음식을 공급해야 한다) 거기까지다.
의식을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주체가 자기정체성을 유지한 채 주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설사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소위 ‘멍때리고’ 있는 상태라고 할지라도 뇌의 회로는 부지런히 돌아가는데 이를 ‘디폴트모드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부른다. 즉 전두엽과 두정엽, 측두엽, 후두엽 등 뇌의 여러 부분이 상호 정보를 주고받으며 나라는 주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우리가 잠에서 깨는 것도 밤사이 꺼져있던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다시 켜지는 일에 다름 아니다.
수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미주신경을 자극한 뒤 뇌파를 측정해 얻은 데이터를 분석하자 놀랍게도 환자의 디폴트모드네트워크가 미미하나마 다시 활성화된 것 같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파장이 4~7Hz(헤르츠)인 세타파가 크게 증가했다. 보통 뇌파의 파장으로 뇌의 활동성을 추정하는데 파장이 짧은 알파파나 베타파가 우세할수록 각성상태이고 파장이 긴 델타파나 세타파가 많을수록 이완상태다. 깊은 잠을 잘 때는 파장이 가장 긴 델타파가 우세하다. 식물인간 상태였던 환자는 미주신경자극으로 델타파가 줄고 세타파가 늘어난 것이다.
또 뇌의 활동정도를 반영하는 대사량을 측정할 수 있는 FDG-PET 영상을 찍은 결과도 미주신경자극 치료를 받은 뒤에 오른쪽 두정엽과 후두엽, 시상, 선조체에서 대사량이 크게 늘었음을 알 수 있다. 연구자들은 논문에서 “미주신경자극으로 가장 활성화된 부분인 오른쪽 아래두정엽과 두정엽-측두엽-후두엽 경계는 의식적 각성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환자의 행동을 관찰한 결과 역시 측정결과와 일맥상통했다. 즉 환자는 여전히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보이는 대상의 동선을 눈으로 따라가고 의료진의 요청에 따라 베개 위의 머리 방향을 돌렸다. 또 책을 읽어주면 유심히 듣는 것 같았다. 한번은 의료진이 무심코 환자의 얼굴 가까이로 순간 다가갔는데 환자가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논문의 환자처럼 미주신경을 자극할 경우 희미하나마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경우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시도를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