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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칼럼] 영화 ‘파이브 피트(Five Feet Apart)’ - 2019년 감독 저스틴 밸도니
악수하고 포옹합시다!
‘사회적 거리두기’란 말이 자연스럽습니다. 정부도, 언론도, 전문가도, 사람들도 코로나19의 감염과 확산을 막기 위해 ‘한 공간에서 서로 일정하게 물리적 거리를 둔다.’는 뜻으로 말합니다. 신조어는 그렇게 일상어가 되고, 표준어가 됩니다. 그래도 ‘사회적’이라는 말이 가진 다의성(多義性), 언어가 사고와 의식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꺼림칙합니다. 인간이 ‘사회적’인 이유는 같은 공간에 어울려 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에는 물리적 공간과 함께 심리적, 감정적, 의식적 공간도 있습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사회적’이란 기호(언어)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924년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도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ing)’를 개인과 개인, 집단 간의 관계를 특정 짓는 친밀도의 개념에서 처음 사용했습니다. 물리적 거리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때문에 사회적 거리는 개인은 물론 인종, 계급, 국가, 성별, 세대 간에도 가까울 수록 좋습니다. 코로나19로 어쩔 수 없이 물리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지금에는 더욱 그래야 할지 모릅니다. 생명의 터전인 지구의 생존을 위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인간들 사이에서만이 아닌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동물의 ‘사회적 거리’까지 좁혀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만나기를 피하고,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말하지 않고, 손잡기를 주저하는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얼싸안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몸이 닿을까 움츠러드는 접촉 혐오증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불가피하고 일시적이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스며들고 있는 고립과 경계, 불신과 배척이 진짜 ‘사회적 거리’를 얼마나 더 멀게 만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리적 거리는 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코로나 위기를 통해 우리는 당연하게 여겼던 악수와 포옹, 입맞춤과 같은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접촉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지 깨닫고 있습니다. 아무리 인터넷으로 만나고 이야기해도 따뜻한 손길과 체온만큼 서로를 가깝게 하는 것도 없으니까요.
<파이브 피트>에서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스텔라(헤일리 루 리차드슨 분)와 B.세파시아에 감염된 윌(콜 스프로즈 분)은 온갖 안전장치를 동원해 감염 예방의 물리적 거리인 6피트를 5피트로 줄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사랑의 느낌을 몸으로 확인하고 싶은 두 사람은 죽음을 각오하고 손을 잡고, 포옹하고, 윌은 호수에 빠진 스텔라를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까지 시도합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선택, 어차피 시한부 생명이니 죽기 전 마지막 소원으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통해 <파이브 피트>는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을 잔뜩 움츠린 우리에게 ‘따뜻한 작은 손길, 볼에 닿는 입술의 촉감이 기쁠 때는 하나로, 두려울 때는 용기로, 열정의 순간에는 짜릿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킨십. 우리에게는 공기만큼이나 그 손길이 필요하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그 손길이 간절해지기 전까지는. 만지세요, 옆의 그 사람을. 인생은 낭비하기에 짧아요.” 스텔라와 윌의 말입니다. 비틀스의 존 레넌도 ‘사랑은 포옹, 포옹은 사랑(Love is touch, Touch is love)’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 2021년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삶은 ‘연기(演技)’가 아닙니다
연기(演技)는 배우만 할까요. 배우가 아니어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과 행동’인 연기를 하면서 삽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삶에서 배우로 변신하곤 합니다. 아우렐리우스도 <명상록>에서 “인생이 연극과 같다.”고 했지만, 그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무대에 나를 올린 자(하느님)의 각본에 의해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연기를 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상처와 두려움과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칭찬받기 위해서, 상대를 속여 이익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진짜 ‘나’는 아닙니다. “연기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선하고 아름다운 연기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까요. 왜 연기여야 하나요. 선하고 아름다운 삶 그 자체가 더 낫지 않나요.
배우의 연기는 다릅니다. 잠시나마 무대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런 모습을 그럴듯하게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게 직업이니까. 그런데 그가 무대에서처럼 삶에서도 연기를 한다면? 실제로 기자 시절 만났던 배우들에게서 종종 그런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2022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각본상 수상)의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기 분)도 그런 배우입니다. 아내의 외도를 알면서도 이별이 두려워 모른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했습니다. 아내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의 마지막 외도 상대였던 젊은 배우와 함께 일하고, 아내와의 추억까지 이야기합니다. 둘의 관계를 모른 척, 연기를 합니다.
아내와 하게 될 이별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절망과 배신감, 분노와 질투심, 상처와 후회를 감추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연기를 하고 나면 싫더라도 ‘하지 못한 질문과 듣지 못한 대답’을 품고 다시 나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그전과 조금 위치가 달라져 있다.”고 했습니다. 진실과 용서, 치유에서 조금씩 더 멀어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런 그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배우들과 함께 소통의 벽을 넘어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준비하면서, 잠시 자신의 운전기사가 되어준 젊은 여성 미사키(미우라 토코 분)의 상처를 이해하고 쓰다듬으면서 삶에서 하던 연기를 그만둡니다. 연기로는 어떤 진실도 만날 수 없고,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를 모른 채 우리는 주님 앞에서까지 신앙을, 봉사를, 사랑을, 용서를, 기도를 연기하려 합니다. 누구도 “나는 아니오.”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연기가 가능하기나 할까요.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안’까지 보시는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삶에서 하는 연기는 진실의 문을 잠가버리고, 신앙에서 연기는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위선을 꾸짖을 때 말씀하셨듯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불행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올드’ - 2021년 감독 나이트 샤말란
하느님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영화 <올드>에서처럼 1년이 30분과 같이 빠르게 흐르는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거나, 그곳에 머무르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 1시간이 7년처럼 느리게 가는 행성이 있다면.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그곳으로 가서 살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이야말로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는 가장 원초적 본능이며, 인간에게 늙음과 죽음보다 싫고 두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영생을 믿으면서도 ‘개똥 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오래 사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수명을 길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 속에서 초현실적 상황을 섬뜩하게 그려온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올드>에서 이런 상상을 합니다. ‘시간의 빠르기는 마음대로 할 수 없어도, 같은 시간에 인간을 빠르게 늙고 죽게 만드는 곳’이 있다.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강력한 자성을 가진 희귀한 광물질의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여 성장과 노화가 쏜살같이 진행되는 해변입니다.
불화로 이혼을 앞두고 마지막 가족 여행을 온 카파(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분)와 프리스카(빅키 크리엡스 분) 부부, 열한 살과 여섯 살인 딸 매덕스와 아들 트렌트, 의사인 찰스(루퍼스 스웰 분)와 그의 아내와 노모와 강아지와 어린 딸, 남자 간호사와 여자 심리치료사가 그곳에 갑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연의 시간은 변함이 없는데 인간의 시간만 너무나 빠른 곳에서 매덕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성숙한 처녀가 되고, 어린아이였던 찰스의 딸이 트렌트의 아이를 임신해서 30분도 안 돼 출산을 합니다. 프리스카의 종양은 갑자기 커지고, 방금 생긴 상처가 피가 나기도 전에 없어집니다. 어제 실종된 여자의 시신은 뼈만 남아있고, 해안에는 버려진 호텔 물건들과 여행용품들로 가득합니다. 바위와 동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한 충격파로 그곳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혼란과 충격, 절망과 공포 속에서 찰스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정신 질환이 드러나면서 살인을 저지르고, 여자 심리치료사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이틀도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일들, 지금까지 마음에 품었던 것들을 단 하루 만에 모두 마주하고 행동으로 저지릅니다. 그러나 <올드>가 ‘그곳’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공포나 놀라움이 아닙니다. 바로 ‘깨달음의 시간’입니다. 그들은 엄청나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앞에 서서야 아무리 남은 인생이 짧더라도 결코 다른 사람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죽음이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서야 지난 삶의 이기심과 두려움이 부질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평생이란 시간이 단 이틀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우주 만물을 창조하면서 “한처음”(창세 1,1)으로 시작한 하느님의 시간은 차별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릅니다. 그 시간을 빠르거나 느리게 하는 것은 저마다의 인간입니다. 셰익스피어도 “시간은 사람에 따라 각각의 속도로 달린다.”고 했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기브 뎀: 사라진 자들의 비밀’ - 2022년 감독 김경용
생명은 자신만의 것인가?
왜 그 노인은 죽었다가 1시간 만에 다시 깨어난 것일까요? 왜 그의 시간만 거꾸로 갈까요? 도대체 어디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또 그곳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요?
<기브 뎀>은 이런 현실에서는 존재 불가능한 상황으로 궁금증을 자아내는 단편 미스터리 판타지입니다. 그리고 ‘사라진 자들의 비밀’이란 부제(副題)가 암시하듯 마지막에 다다르는 곳에서 우리에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자들이 누군지, 그들의 비밀은 무엇인지 마주하게 합니다.
신기루처럼 판타지의 시간들이 사라지면 한 인간이 가진 생명의 무게가, 그 시간들의 연결이, 그것의 시원(始原)이 남긴 아픔과 안타까움, 잔인함이 우리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기브 뎀>의 진실에는 어떤 조건도, 이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섭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기브 뎀>은 처음부터 호기심과 재미를 자극합니다. 기적같이 생환해 급속하게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송승훈(윤덕용 분)의 모습과 기행(奇行), 그런 아버지를 대하는 철현(김민상 분), 연희(박래연 분) 남매의 반응부터 그렇습니다. 분명 다시 살아난 아버지인데 펜으로 글을 쓰면 자꾸 지워지고, 누구도 아버지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수상합니다. 이렇게 설정한 영화적 재미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청년 송승훈도 그의 젊은 아내와 어머니를 만납니다. 그들의 눈물과 후회의 비밀도 조금씩 밝혀집니다. 노인(송승훈)이 왜 “우리 아이를 구해 달라.”면서 자꾸 시간이 없다고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아기로 돌아간 노인과 그 아기를 알아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아픔과 절망도 마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인과 아내와 철현, 연희 남매의 실체도 충격적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기브 뎀>은 목소리를 높여 ‘생명 존중, 태아 보호’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으로써 낙태를 비난하거나 절규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Them)에게 무엇을 주어야(Give) 했는지, 왜 주지 못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영화가 화두로 삼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26)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가슴에 ‘쿵’하고 닿습니다. 42분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기브 뎀>은 영화가 가진 감동의 힘을 믿고, 공감 있는 이야기로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생명의 시작인 태아를 보호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누군가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미래는 누군가에게는 현재이고, 누군가는 아들과 딸, 손자와 손녀입니다.
그 존재와 시간을 함부로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죄입니다. 독일의 생태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책임 윤리는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면서 “현재의 우리는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결과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기브 뎀>의 노인처럼 결코 거꾸로 가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과거를 마음대로 바꾸도록 허락하시지도 않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백설공주 살인사건’ - 2015년 감독 나카무라 요시히로
누가 그녀를 살인자로 만들려 하는가?
제목만 보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추리물이 아닙니다. 동화를 섬뜩하게 변주한 스릴러물도 아닙니다. ‘미디어, 그 위험하고 무책임한 선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이야기는 살인사건으로 시작합니다. ‘백설공주’란 브랜드를 붙인 비누를 만드는 화장품 회사의 여직원이 살해당합니다. 범인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디지털 세상만큼이나 사건은 빨리 왔다 갑니다. 미디어도 사람들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한 사람, TV 추적프로그램의 조연출 아카호시 유지(아야노 고 분)만이 이 사건에 매달립니다. 그는 희생자의 동료 여직원인 시로노 미키(이노우에 마오 분)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불확실한 추측과 자신의 상상만 있을 뿐, 확실한 근거는 하나도 없지만 유명해지고 싶은 그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편집으로 방송을 합니다. 동시에 트위터 광(狂)인 그는 취재 과정까지 실시간으로 SNS에 올립니다.
두 곳 모두 신이 납니다. TV에서는 수사와 심리 전문가를 자처하는 미디어꾼들이 추측과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프로듀서는 시청률을 위해 그들에게 엉터리 분석과 진단까지 강요합니다. 멋대로의 상상과 억측, 확증 편향에 빠진 트위터리안들은 익명으로 마구 욕을 퍼부으면서 마녀사냥을 시작하고, 신상털이로 사냥감을 발가벗깁니다. 아카호시 유지는 “나 혼자 사건의 핵심에 다가갔다.”고 자랑하고, 트위터리안들은 ‘이런 경우 범인’, ‘치정’이란 댓글로 호응합니다.
진실은 숨어있던 시로노 미키의 ‘당신의 방송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편지와 그녀의 어릴 적 친구의 증언으로 밝혀집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사실 확인이나 죄의식 없는 방송과 SNS의 비양심, 윤리 의식 부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사적 자유와 공적 책임을 혼동하는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을 조롱합니다.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간 인격 살인을 저지르고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통해 관계없는 분을 용의자처럼 다룬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는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방송. 신상털이를 하고 온갖 모욕을 퍼부어놓고는 그 책임을 방송에 떠넘기면서 이번에는 아카호시 유지를 사냥감으로 삼는 잔인하고 뻔뻔한 짓을 서슴지 않는 SNS.
의도된 것이냐 아니냐,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익숙하고 과몰입하는 세대의 죄의식 없는 행동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미 새로운 미디어들로 가득하고, 엉터리이건 말건 SNS까지도 ‘미디어’라고 부르고 있으며, 누구나 그 미디어의 콘텐츠 생산자와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이렇게 누구나 미디어를 자유롭고 다양하게 이용하고, 참여할 수 있는 세상일수록 언론인을 포함한 미디어 종사자들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는 것 아닐까요. 8월 15일~18일 서울에서 열린 시그니스(SIGNIS, 가톨릭커뮤니케이션협회) 세계총회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여러 사람들이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방법을 배워 건전한 비판적 감각을 개발하고 정의를 위한 활동, 사회적 화합,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에 대한 존중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보내주신 것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영화칼럼] 영화 ‘브로커’ - 2022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태어남이 ‘축복’이라면
어느 교회 복지 시설에 있는 ‘베이비 박스’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불가피하게 키울 수 없는 장애로 태어난 아기와 미혼모 아기를 유기하지 말고 아래 손잡이를 열고 놓아주세요.’ 공식 기록으로 이 별난 상자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98년입니다. 이탈리아의 테베레강에서 익사한 영아의 시신이 계속 발견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낳은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고안한 것입니다. 그것이 9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여전히 출생의 흔적도 없이 버려져 목숨을 잃는 아기들이 있고,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주시리라.”(시편 27,10)는 믿음으로 그 생명을 지켜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브로커>에서 베이비 박스가 있는 복지 시설에서 일하는 동수(강동원 분)는 아기를 몰래 버린 소영(아이유 분)에게 “어떻게 버릴 생각을 하지, 버릴 거면 낳지를 말든가.”라고 비난합니다. 그런 동수에게 소영은 “낳아서 버린 것보다 낳기 전에 죽이면 죄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져?”라고 쏘아붙입니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지난 칼럼의 영화 <기브뎀>에서 보았듯이 아예 한 생명의 존재를 넘어 다른 생명의 미래까지 없애버리는 낙태야말로 ‘원치 않은’, ‘불가피하게’란 것이 이유가 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물론 낳아서 베이비 박스에 버리면 그만인 것은 아닙니다. 부모의 양육권 포기 각서가 없으면 정식 입양이 불가능한 제도 때문에 아이들은 엄마가 언젠가는 데리러 온다는 믿음과 기적을 꿈꾸며 보육원에서 고아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온 동수와 세탁소를 운영하는 상현(송강호 분)이 베이비 박스에 놓아둔 소영의 아기를 빼돌려 돈을 받고 다른 가정에 팔려고 합니다. 아이에게는 ‘고아보다 따뜻한 가정이 낫다.’는 말로 불법 인신매매를 합리화합니다. 아기를 다시 데려가려고 온 소영도 처음에는 그들을 비난하지만 ‘원치 않은’, ‘키울 수 없는’ 아이의 양부모 찾아주기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네 명, 나중에 보육원에 있던 여덟 살 고아 해진까지 다섯 명이 떠나는 울퉁불퉁한 여정에서 그들은 서로의 삶의 흔적을 확인하고, 상처와 결핍을 마주하면서 ‘어색하고 이상한 가족’이 되어갑니다. 보육원 출신인 동수는 소영에게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봅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면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이사 49,15)
처음에는 돈 욕심으로 연기를 한 상현도 자신의 가족에게서는 사라져버린 따스한 감정들을 만나면서 진정으로 아기의 행복한 미래를 위한 길을 찾아주려 합니다. 이런 모습들에서 그동안 자포자기와 자기학대로 살아온 소영은 아기는 물론 상현, 동수, 해진의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소리칩니다. 그 감사의 기도는 해진이가 대신 소리쳐준 소영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브로커>는 그들의 미래를 열어두면서 태어남의 축복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지키면서 믿음과 나눔, 새로운 변화와 선택에 의해 자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벨파스트’ - 2021년 감독 케네스 브래나
지혜롭게 잘 나이 들어야 합니다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首都)입니다. ‘수도’라고 해야 인구 29만 명(현재)의 작은 항구도시로 오랜 세월 인종, 종교, 독립의 갈등을 겪은 곳이기도 합니다. 영화 <벨파스트>는 그 아픈 역사가 시작된 1969년 그곳에 살았던 아홉 살 소년과 가족이 보고, 듣고, 겪은 이야기입니다. 소년의 이름은 버디(주드 힐 분).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케네스 브래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50년 전 벨파스트의 동네 풍경이라고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저녁 먹어.”라고 소리칠 때까지 공놀이와 전쟁놀이를 하며 골목을 뛰어다니고, 이웃들은 옆집에 접시가 몇 개 있는지까지 알고 지냅니다. 그런 곳에서 갑자기 개신교인들이 돌과 화염병으로 천주교인들을 공격합니다. 골목에 바리게이트를 치고는 통행을 제한하고, 형제처럼 지내던 이웃이 하루아침에 ‘적’이 됩니다.
<벨파스트>는 그런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변화에도 아랑곳없이 동심을 잃지 않고 꿈과 사랑을 키워가는 소년을 지켜봅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애쓰는 소년의 아버지의 고민과 아픔, 정겹고 익숙한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이사하기를 주저하는 엄마의 모습도 그려냅니다. 물론 특별한 풍경은 아닙니다. 그 시절의 ‘나’와 ‘나의 아버지,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그보다 <벨파스트>를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은 버디의 할아버지(키어런 하인즈 분)와 할머니(주디 덴치 분)입니다. 부드러운 대화로 손자에게 사랑과 용기, 희망과 미래를 심어줍니다. 같은 반 여자아이인 캐서린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손자에게 인내심, 평화의 기도, 사랑의 용기와 정성을 일깨워줍니다. 영화에 빠진 손자와 같이 극장에도 가고 영화 얘기도 나눕니다.
억지로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 런던으로 가서 살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손자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네가 누군지는 나만 알면 돼. 넌 버디야. 벨파스트 출신이고. 온 가족이 널 위하지. 네가 어딜 가든 무엇이 되든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야.” “달나라로 가거라. 런던은 인간에게 작은 걸음일 뿐이다.”
버디의 아버지라고 다르겠습니까. 어느새 편 가르기에 빠진 버디에게 “우리 동네엔 누구 편 같은 건 없어, 전에도 없었고.”라고 말합니다. 버디가 종교가 달라 캐서린과는 미래가 없을 것 같다고 하자 “친절하고 올바른 아이 둘이 서로 존중한다면, 저 아이와 가족 모두 언제든 우리 집에 와도 좋다.”고 허락합니다.
그들이 거창한 삶을 산 것도, 대단한 지식이나 철학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석탄 광부로 살았고, 할머니는 가난으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평생 ‘나보다 남을 더 많이’ 생각했고, 자신의 삶과 가족과 이웃의 평화를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 시간이 비바람과 햇빛으로 숙성되어 삶의 지혜가 된 것입니다.
“나이를 잘 먹은 노인은 훌륭한 포도주와 같습니다. 지혜롭게 잘 나이 들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쉽지 않지만 그래야만 합니다. 노인이 더 이상 주인공이 될 수는 없지만, 현재와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영감과 희망을 줄 수 있으니까요. 교황께서는 이것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사명이며, 진실하고 참된 소명이라고 했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아무르(Amour)’ - 2012년 감독 미카엘 하네케
‘존엄한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죄
생로병사(生老病死). 누구나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래도 모두가 사는 동안 겪지 않길 바라는 것이 있다면 병(病)이 아닐까요. 더구나 그 병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면. 그래서 ‘웰다잉(well-dying)’까지 외치면서 온갖 방법과 노력으로 그것을 막고 피하려고 애쓰는지도 모릅니다.
늙어가면서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주님은 왜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주시는 걸까. 당신 품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그조차도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거부할 권리는 없는가.’ 병이 주는 고통과 두려움, 비참함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둘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을 ‘존엄한 죽음’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고통이 죽음과 소멸의 두려움보다 커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데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는 것인가.’ ‘생명이 주님의 선물이자 의무라고 해서, 죽음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신마비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씨 인사이드>의 라몬과 <미 비포 유>의 윌이 그랬습니다. 이유는 “더 살 이유가 없어.” “이런 삶은 의미 없어.”였습니다.
똑같은 말을 <아무르>의 안느(엠마누엘 리바 분)도 합니다. 말년을 우아하고 평화롭게 보내고 있는 80대 노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찾아옵니다. 마비 증세가 나타나 수술을 했는데 상태가 더 나빠져 반신불수가 됩니다. 그런 아내를 은퇴한 음악 교수인 남편 조르주(장 루이 트린티냥 분)가 헌신적인 사랑으로 보살핍니다. 안느는 남편에게 하나만 약속해 달라고 합니다. “다시는 날 병원에 보내지 마.”
‘요양 병원에서 쓸쓸하게 혼자’가 되는 것이 슬프고 두려운 고령화 사회에서 그녀의 소망은 별난 것도 아닙니다. 조르주는 그 소망을 들어줍니다. 이따금 방문 간호사가 오는 것을 빼면 모든 시간을 쏟아 혼자서 아내를 돌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시간을 ‘내 집에서 편안하고 품위 있게 보내기’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고통과 절망으로 지쳐갑니다.
<아무르>는 우리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선택으로 결말을 맺습니다. 그것을 안느가 원했다고 ‘존엄한 죽음’이 되고, 조르주의 ‘사랑(아무르)’이 되고, 둘의 ‘행복한 기억’으로 남게 될까요. 아무리 ‘조력 존엄사’로 미화해도, 누가 그것을 행하든 살인입니다. 안락사 합법화에 반대하는 서울대교구의 입장문은 주님께서 왜 생의 마지막에 병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주는지 말해 줍니다. ‘그 시간을 주님께 봉헌하며, 지난날을 성찰하고 가족 친지들과 함께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시간을 보내며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고 존엄한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