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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춘 목사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습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中略>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를.
프랑스 시인 구르몽(Gourmont) 쓴 [낙엽]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 어제 밤 같이 바람이 조금 분 다음 날 아침에 유난히 많이 진 낙엽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을의 쓸쓸함을, 인생의 쓸쓸함을 노래한 이 시를 읽으면 낙엽을 밟는 것이 마치 우리 자신을 밟는 것 같아 예사로 밟을 수가 없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쓸쓸한 시를 음미하는데 여러분들은 이 가을에 어떤 시를 자주 음미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에 읽고 음미하는 시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인 전도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 중에 매우 중요하게 지키는 절기 3가지가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첫 열매를 거둔 것을 감사하는 오순절,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나서 가나안을 향해 갈 때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던 것을 기념하면서 8일 동안 텐트를 치고 그때를 회상하면서 감사하는 장막절이 있습니다.
이들이 왜 이때 전도서를 읽었을까요? 시편 136편 같은 감사의 시를 읽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추수감사와 구원에 대한 감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도서를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어떤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까?
얼마 전 한국의 대학생 1,000명에게 "지금 당장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설문조사를 하였더니, '자동차, 휴대폰, 이성의 친구' 등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나는 감동 받고 싶다"였습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이 감동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로 감동에 굶주려 있습니다.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읽은 [101가지 마음을 여는 이야기] 책이 있는데, 이 책은 95년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몇 달 전의 보고에 의하면 이 시리즈 책이 무려 2,800만 부나 팔렸다고 합니다.
왜 이 시리즈 책들이 잘 팔립니까? 101가지의 감동적인 글들이 실려있기 때문입니다.
인디애나 주의 어떤 학교에 15세의 브라이언이라는 아이가 뇌종양에 걸려 방사능 치료를 하다보니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브라이언은 남의 시선이 창피해서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 날 브라이언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큰 맘 먹고 학교에 갔더니 자기 반의 모든 아이들이 브라이언과 같이 다 삭발을 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브라이언만이 학교 전체에서 머리카락 없는 유일한 학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반 전체가 삭발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이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가슴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하는 감동에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아무리 읽어도 가슴 뭉클한 감동,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차원이 다른 감동, 더 깊은 영적인 감동,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에 텐트를 치고 전도서를 읽으면서 자신들의 삶을 다시 한 번 추스르곤 했던 것입니다.
전도서는 1절을 보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인 솔로몬이 썼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왕 노릇을 하면서 아가서와 잠언 그리고 전도서를 기록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는 솔로몬이 젊어서 쓴 것으로 보고, 잠언은 중년기, 그리고 전도서는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난 뒤 인생의 말년에 쓴 인생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인생을 다 살아본 뒤에 '진정 무엇이 인생에 있어서 의미 있는 것이고 정녕 가치 있는 일인가?'를 깨닫고 그 깨달음을 후대의 오고 오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연세 많은 분들이 읽어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젊은 사람들이 빨리 읽을수록 좋습니다. 인생의 참된 길을 빨리 알면 알수록 인생의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첫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절) 이 말씀은 노자나 장자의 글 혹은 불교의 허무 사상을 반영하는 글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헛되다'는 말이 한 절에 5번 나오고 전도서 전체에는 무려 38번이나 나옵니다.
도대체 무엇이 헛되다는 말입니까?
3-11에 두 가지 질문을 통해서 헛됨을 말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했습니다(3절).
왜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말입니까?
4절부터 보면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여기서 두 존재, 인간과 땅이 대조됩니다. 땅은 영원하나 인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 세대가 가면 다른 세대가 오고 또 그 세대도 얼마 있지 않으면 가고 마는 인간의 유한성을 봅니다. 인간의 죽음을 봅니다. 봄에 새싹이 나서 한껏 여름에 푸르름을 자랑하다가 얼마 있지 않아 낙엽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느끼면서 허무를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땅은 100년 전이나 1,000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그대로 있습니다.
솔로몬은 5-7절에서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것 해, 바람, 강물 3가지를 말합니다. 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반복하고 늙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아 하루도 자리에서 못 일어나는 날이 없습니다(5절).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곳 저곳으로 자유롭게 다녀도 피곤하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습니다(6절). 강물은 때로 지각변동이나 사람들 때문에 변화가 생기긴 하지만 거의 모든 큰 강들은 이곳이 막히면 저곳으로 저곳이 막히면 다시 이곳으로 흘러 흘러서 바다로 향해 갑니다(7절).
8절을 보면 인간의 모든 추구는 결코 인간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8절 첫 부분의 '만물의 피곤함'은 '모든 말들의 피곤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인간은 피곤하도록 많은 말을 하는데도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아무리 놀라운 것을 많이 들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모든 수고는 헛될 수 밖에 없습니다.
카뮈가 쓴 [시지프스의 신화 the myth of Sisyphus]에 보면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가장 혹독한 지옥의 형벌을 받고 있는 시지프스는 영원히 죽지못하고 지옥의 비탈에서 큰 바위덩이를 굴려 올리게끔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거의 올렸다 싶으면 다시 굴러 내려가 버리고 그러면 다시 굴려 올립니다. 이것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합니다. 인간의 헛수고를 잘 드러냅니다.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III the Great)은 21살에 왕이 된 후 세계를 주름잡았습니다. 그가 왕자로 있을 때 그의 가정교사였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나눈 대화 중에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왕자께서는 왕이 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희랍을 통일하겠습니다.""그 후에는 무슨 일을?" "소아시아를 정복하겠습니다." "그 뒤에는?""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점령할 겁니다." "그 뒤에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손에 넣겠습니다.""인도 점령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 때쯤 저도 죽겠죠." "그렇다면 그렇게 멀리 돌아다니다 죽으나, 지금 죽어버리나 별로 큰 차이가 없겠습니다."
그 뒤 알렉산더는 12년 8개월 동안 왕 노릇을 하다가 33살에 죽습니다. 그는 어릴 때 꿈처럼 소아시아, 중앙 아시아, 이집트, 페르시아와 인도를 정복했고, 그 후 그는 더 정복할 땅이 없다고 큰소리 쳤지만 죽을 때 "내가 죽거든 관의 양옆으로 구멍을 내서 나의 빈손을 밖으로 드러내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인생의 허무를 이런 식으로 웅변했습니다. 소년 시절, 아리스토텔레스가 해 주었던 말처럼 그는 실컷 돌아다니다가 빈손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말았습니다.
전도서 첫 부분도 정말 알렉산더처럼 살면 허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알렉산더와 똑같이 33년을 세상에서 사셨던 한 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는 왕자로, 왕으로 산 것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3년 동안 우리 인생을 위해서 일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때 그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마지막 말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3년간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고 그의 수고가
목적한 뜻을 다 이루었습니다.
전도서 첫 부분에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허무를 강조한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이나 알렉산더나 다른 어떤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은 죽음 직전에 '내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 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참으로 헛살았다, 허무하다, 내가 죽거든 손을 관 밖으로 내어 보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수고가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서를 읽으면서 더욱 힘써서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하게 됩니다.
두 번째 질문은 10절에 있습니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존재하는 것들은 이미 전에 있었던 것들이요, 어떤 일들도 사실은 전에 했던 일들이라고 합니다. 과거와 미래가 구분이 없고 같은 것이 계속 반복될 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새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일들을 했을 때 보람을 맛보지 않습니까? 실제로 신기록 작성이나 특허를 내는 것들은 모두 새로운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그 모든 것들이 과거에 다 있었던 것으로 새로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일할 의욕을 꺽어놓는 말입니까? 아이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을 만들어서 엄마에게 자랑을 할 때, 엄마가 '그거 전에 엄마 때도 있었어, 나도 그것 옛날에 다 만들어봤어'라고 말하면 아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혜로운 부모들은 설사 이미 있었던 것들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격려하기 위해서 마치 굉장한 것을 새롭게 발견하거나 만든 것처럼 놀라고 칭찬해 줍니다.
그런데 전도서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전혀 새로울 것이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진짜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해 아래서 새롭습니까?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면 새롭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삶을, 가정을, 사회를, 나라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겉으로는 똑같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도 새롭게 만드십니다. 정녕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사람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하는 일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새로운 일입니다. 헛수고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을 즐깁니다. 봄에 파랗게 돋았다가 가을에 지는 낙엽처럼 땅에 떨어져서 썩고 마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것을 찾아 그것에 투자할려고 고민하다가 성경에서 영원한 것 3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영원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히13:8).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마24:35).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요일2:17).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결코 그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이 가을에 낙엽 같은 인생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인생을 사는 자들이 되었음을 감사합시다.
아직 인간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처럼 보이는 분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이 세상이 허무하게 보이는 분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그 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