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오십,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지나면서 알게 모르게 세상살이 과정에서 스스로 체득하거나 인생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들이 상당하다. 귀밑머리가 희끗해지고 가까이 보는 글씨들도 촛점이 잘 안 잡히는 노안(老眼)도 슬그머니 들어와 있고..여러가지 감각들이 시나브로 둔해진다. 감각적인 예민함은 둔해지지만 수 많은 시행착오(施行錯誤)를 통해서만 알게되어 어느 순간 문리(文理)가 저절로 트이는 것들도 있는것 같다.
개인적으로 보면 책상위에서 일하는 수십년 동안의 습관 속에서 약해진 육체적 건강을 조금이라도 보완하고 개선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등산은 나에게 커다란 변화와 새로은 가치를 발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산행을 통해서 사무실에서 받는 유무형의 스트레스를 상당히 해소하고 헐렁했던 종아리와 허벅지가 꽤 단단해진 느낌을 받는다든지 녹색 숲속을 몇 시간 거닐고 나면 사물이 아주 선명해 보이는 등 매우 유익한 취미생활이 아닌가 싶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찾게 되는 인생경험에서 얻는 배움이자 공자가 말한 지천명, 문리를 조금씩 깨우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또 얻는 보너스로 같이 산행하는 일행들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간들이다. 아주 친한 친구 몇 몇을 제외하고는 그 사람의 깊은 속내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5~6시간의 산행을 같이하면서 서로가 닫혀진 문을 조금씩 열어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몇개월이 지나면 마치 내가 그 친구의 가족처럼 상당히 깊은 속까지 알게 된다.
며칠 전에 북한산을 가면서 성전중학교 친구들과 산행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속에서 성전 대월이란 마을이 그냥 말로만 들었을 때에는 큰 달모양의 형태여서 대월(大月)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달맞이 마을을 뜻하는 대월(待月)이란 말을 듣고 매우 신기하고 통념을 깨는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대월마을에서는 달이 뜨는 모습이 가장 멋지지 않았을까 싶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름달 뜨는 시기에 대월에서 달맞이를 한 번 해보고 싶다. 이런 대월 마을에는 조선후기 세도가 중의 하나였던 풍양(豊壤) 조(趙)씨들과 곽(郭)씨 들이 반반 정도 되는 집성촌(集姓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조씨들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보통 촌에서는 농사 50여마지기(평수로 10,000평) 정도 되면 큰 부자로고 했었다. 그리고 그 이상은 별로 없었고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천석꾼, 만석꾼은 듣지도 보지 못했는데 이번 등산하면서 5명이 등산을 했는데 그 중 2명의 친구들 집 윗대에서 한 사람은 천 오백석꾼, 한사람은 오백석꾼 였다고 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한 섬 또는 한 석(石)은 쌀 두가마니를 뜻하고, 보통 논 한마지기에서 벼를 두 섬 수확하면 쌀로 찧으면 두가마니 한 섬이 되니 논으로 치면 천석꾼은 천마지기(약 20만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얼마나 대단한 부자였는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 이렇다. 북한산 백운대를 오르면 북한산성이 있고 백운대 오르기 전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위문(衛門)이 있는데 친구 중 한명이 그 성벽을 보면서 이 성벽이 자기네 시골집 성벽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니 이게 웬말인가 싶었다. 저렇게 대단한 성벽이 자기네 시골집 담벼락만도 못하다니..내 귀를 의심했는데...자기 휴대폰에서 사진을 뒤적이며 찾아서 보여준다. 아마 높이는 4~5미터쯤 되어보이고 밑에 커다란 반석과 위로 올라갈 수록 작은 바위와 돌 들로 쌓아 놓은 모습이 실제 더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묻기를 자네 집이 절터도 아니고 왜 이렇게 대단하냐고 물으니 할아버지 때 천오백석꾼 부잣집이었노라고...우와..깜짝 놀랄 뿐이라..
그 친구가 이런 저런 자기네집 땅 이야기를 하는데 강진은 물론이고 해남, 영암, 나주까지 땅들이 있어서 한 때는 수십리 밖에서도 지게에 벼를 지고 운반했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쯤에서 또 한번의 반전...그 중 한 친구는 오백석꾼 후손이라고...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지..그 친구도 조씨 인데 현재 자기네 옛 집을 보여주는데 마치 경복궁 주춧돌 같은 바위에 기둥을 세운 대궐같은 집이었다. 실제 집 모습은 천오백석꾼 집보다 이 오백석꾼 집이 더 규모나 모양이 좋았다고 한다. 또 이 오백석꾼 집에는 친구들이 어렸을 때까지 별채에 하인 가족을 기거시키면서 부려먹었다는 이야기다....
한 때 권문세가의 대표적 성씨였던 풍양조씨 후손들이 우리 친구들이라 놀라기도 하고, 역사적 관점에서 여러 가지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평생 이야기로만 들었던 천석꾼의 이야기를 등산하면서 친구들의 이야기로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우리집은 논 열 다섯 마지기, 밭 열 마지기, 산 6,000천평이 전 재산이었는데...정말 새발의 피도 아닌...그래도 열심히 살아야 겠다.
첫댓글 그 왕년에 잘 나가던 그 친구들은 지금은 어떻게들 사시던가? 좀 나누며 사시던가?
아니...사람들은 괜찮은 친구들인데 고생 좀 했지...그 부잣집 아들들이 한놈은 형편이 어려워서 국립철도고로 가야했고...
한 친구는 형편은 무지 어려웠지만 어찌어찌해서 평범하게 살더군...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