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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6편 7절-47편 3절. (07. 01. 21. 일후)
46편 7절-11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47편. 고라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3절: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아래 복종케 하시며.
46편 7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만군’이라는 말은 군대가 많다는 뜻인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천군천사들만이 아니라 우주만물과 심지어 마귀까지 다 동원시키신다. 개구리도 잡고 쓰시고, 메뚜기도 잡고 쓰시고, 하늘의 먼지를 이로 만들어서 쓰시기도 한다. 또한 우박을 내리게도 하고, 땅에 불이 붙게도 하신다. 이게 다 성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군대로 쓰시는 거다.
또 보면 해가 사람을 태우기도 하고, 달도 바람도 짐승도 개도 티끌도 다 부리신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인간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를 피할 수 없는 거다. 별로 도망을 가서 숨더라도 끄집어낸다고 하셨으니 인간 자기가 하나님을 피해서 어디에 숨겠느냐?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니 사람이 죄를 지은 그곳에서, 또는 죽은 그곳에서 다 내어주더라. 그러니까 피할 수 없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냐? 우리가 하나님께 잘만 보이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고, 그 군대는 우리 군대가 된다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 보이면 적이 돼버리고, 잘만 보이면 모든 만물이 그 사람을 위해 움직인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못 보여지게 되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잘 보여지겠느냐? 예를 들면 부모에게 잘못 보이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말씀에 불순종하면 된다. 말씀에 불순종은 부모를 사랑치 않는다는 거다. 사랑치 않으면 부모의 말을 안 듣는다. 누구 집 자식이든 부모의 말을 안 들으면 ‘아, 저 아이는 부모를 사랑치 않는구나. 얼마 안 가서 몽둥이찜질을 당하겠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자식은 부모님이 명령을 하기 전에 척척 움직인다. 이런 자식에게는 ‘네가 다 가져라. 용돈 더 줄까?’ 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야곱의 형 에서가 어떤 정신과 마음으로 살았기에 하나님이 에서에게서 떠났으며, 동생 야곱은 어떤 정신과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까? 에서는 하나님보다 어느 쪽을 더 사랑했느냐? 세상이다. 세상을 사랑하니 세상을 취할 수밖에 없는 거고, 세상을 취하니 하나님은 버려지게 되는 거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가 버린 하나님을 사랑했고, 믿음생활을 잘 해 나갔다. 그 후로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고, 이 열두 지파는 하나님의 택한 선민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면 나는 야곱이 되고 싶으냐, 에서가 되고 싶으냐? 야곱이 되려면 야곱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세상 복은 네가 다 가져라. 나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가지겠다. 나는 하나님을 독차지 하겠다.’ 이게 야곱의 정신이다. 생각을 해 봐라. 이 세상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계시의 뜻은 또 있는 거지만 곡식이 알갱이가 잘 되면 껍데기도 잘 된다. 벼 알갱이가 안 든 것은 벼의 배가 불룩하냐, 쭈글쭈글하냐? 쭈글쭈글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을 해야 되겠느냐? 껍데기냐, 알맹이냐?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신다. 성경은 흘러간 얘기가 아니다. 현재에서도 자기에게 말씀 그대로 들어가는 거다.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자기의 신앙사상에 대해 더 자극이 되어야 한다. 자기의 영원을 좌우지 하는 것은 껍데기가 아닌 신앙사상이다.
현재에 하나님 앞에 바로 된 것은 영원히 간다. 영원히 잘 되는 거다. 현재에 옳은 정신 사상을 가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되 더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 그냥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야곱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나,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이나 같은 하나님이다. 마찬가지로 야곱에게 하신 것을 오늘날 자기에게도 그대로 하시는 거다. 그래서 내 욕심은 우리교회 교인들은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종들이 됐으면 좋겠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하나님은 환난 때 우리의 피난처시라. 환난이 극심할 때는 워낙 붙들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께로 피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어려울 때는 어느 쪽으로 피하고 싶으냐? 이게 문제다. 무슨 말이냐? 병원의 의사가 ‘당신 내일 죽습니다’ 라고 하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살려달라고 한다.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어설프게 아프면 하나님을 찾느냐, 다른 곳에 마음이 가 있느냐? 다른 데 가 있다. 자기의 이런 마음을 자기가 알 수 있는 거다.
현재 자기에게 모든 것이 어렵지만 어느 문제보다 어느 문제가 더 어렵다고 느껴지느냐? 자기 생각에서 이 판단을 하는 거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자기 능력은 생각지 않고 일부터 한 번 크게 해 보려고 하나님께 일감을 달라는 쪽으로 마음중심의 무게가 쏠린다. 이것은 자기 속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자기 몸 밖의 것을 자꾸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더라도 일종에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격이다.
모든 것이 어려울 때 자기가 들어서 더 어렵게 만드는 일은 없는지 잘 생각해 봐라. 하나님은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역사를 하려고 하시는데, 해결을 해 주려고 하시는데 자기가 들어서 그 역사를 더 어렵게 만드는 일은 없는가?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다. 야곱에게 그랬듯이 그 야곱의 하나님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확실히 피난처가 되시는 거냐?
8절: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믿어지지 않으면 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적 행적을 눈으로 보라는 거다. 하나님께로 피하여 믿음으로 살아간 참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았는지? 또한 이스라엘이면서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거짓 이스라엘로 살아간 자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또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용을 하고 처치해 버렸는지 생각을 해 봐라.
북조 이스라엘에는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그 땅이 항복을 했다. 남조유다에는 바벨론 군대가 들어와서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고, 자기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를 죽여 버린 유대인들은 로마의 구둣발에 폐허가 돼버렸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세상을 붙잡고 세상을 소원 목적하며 세상 누림으로 살 때 홍수로 쓸어버렸고, 하늘의 유황불로도 쓸어버렸다. 이래도 못 믿겠느냐 그 말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산 자는 쓸어버렸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걸어간 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다. 이들의 정신이 지금의 우리 속에까지 흘러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의 야곱을 알아야 하는 건데, 야곱을 안다는 게 뭐냐? ‘에서의 동생이 야곱이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은 누구고, 둘째 아들은 누구고, 누가 누굴 낳고’ 한 걸 아는 게 아는 거냐? 하나님께서 붙잡고 역사하신 그 속의 신앙을 봐라. 그 신앙을 가져라. 이런 욕심이 있어야 한다.
마리아가 욕심이 나느냐? 그래서 ‘이마리아, 박마리아’라고 이름을 짓는 거냐? 마리아로 이름을 짓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리아의 속에 든 신앙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가 되는 거다. 우리 교인들, 현재 각자 자기 속에 누구의 정신이 흐르고 있느냐? 다윗, 모세, 노아, 아브라함, 야곱, 유다‘ 등등 자기 속에 누구의 정신이 흐르고 있느냐? 여러 사람의 정신이 흐르고 있느냐, 한 사람의 정신이 흐르고 있느냐, 아무도 안 닮았느냐?
성경이 우리들에게 왜 이런 사람들을 알게 해 주는 거냐? ‘그 신앙 믿음의 마음을 네가 다 가져라’ 그 말이다. 네가 노아의 마음을 가졌느냐? 그렇다면 믿음의 방주를 지어야 한다. 다 좋지만 술 먹고 옷 벗는 것은 본받으면 안 된다. 진리진실의 정신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성도들에게 개별적으로 역사를 하신다.
우리가 선지 사도들이, 신앙 선조들이 받은 복을 받아야 하겠는데, 무슨 복이냐? 먹고 마시는 복이 좋으냐, 먹고 마시는 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복이 더 좋으냐? 어느 거냐? 자기가 현재적으로 어떻게 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또 자기가 어떻게 사니까 자기 마음이 황폐해지고 황막해지더냐? 내가 어떻게 사니까 내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내가 어떻게 사니까 내 마음이 삭막해지더냐? 이게 있는 거다. 자신이 실지로 이런 경험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못 믿겠느냐? 성경을 역사적으로도 훑어볼 때 내가 어떻게 살면 마음과 정신이 삭막해지거나 풍요로워지는 건지? 내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다는 증거다.
그런데 자기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안 믿어지는 사람은 죽어도 안 믿어지는 모양이다. 예수님 당시에 나사로가 병이 들어서 죽었다는 것을 그 집 식구들도 다 알고, 그의 친척들도 다 알고, 그의 이웃들도 다 안다. 그리고 죽어서 썩어가던 시체가 나흘 만에 살아나서 예수님 옆에 앉아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는데도 그 나사로를 살리신 분이 어떤 분인지 믿으려 들지를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과거(구약 때)에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도 안 믿어지는 것이고,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 중인데도 이것도 안 믿어지는 것이고, 이렇게 되니 미래에 분명히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말해줘도 안 믿어지는 거다.
8절: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땅으로 황무케 한 것을 와서 보라는 거다. 자기 신앙의 마음이 기름지냐, 황무하냐? 세상정신으로 가득 들어있다면 황무한 거다. 황폐된 거다. 반대로 자기 속에 깨달음이 늘 들어가 있다면 기름진 땅이다. 황무한 땅에는 가시나무가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잡초 씨는 심지도 않아도 난다. 곡식은 반드시 사람이 심어야 나는데 가시나무나 풀은 이상하게 심지를 않는데도 잘 난다. 그러면 이건 누가 심은 거냐?
9절: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누가 인간세상에 전쟁을 쉬게 하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다. 전쟁에는 육적인 전쟁이 있고, 영적인 전쟁이 있다. 인간들이 볼 때 모든 전쟁은 인간들이 하는 거지만 성경을 통해서 신앙 면으로 볼 때는 모든 전쟁의 시작과 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한 뜻으로 주권적으로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허용을 하시는 거다.
지금도 사방에서 서로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데, 지금은 천사가 그 바람을 막고 있지만 언젠가는 핵전쟁이 터질 거다. 뭘 보면 아느냐? 계:에 보니 바다의 고기가 삼분의 일이 죽는다고 하는데 이걸 문자적으로 보면 온 땅에 이처럼 큰 재앙이 일어나려면 핵무기가 아니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이런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생명 길 좁은 길을 더 빨리 잘 가도록 몰아넣는 전쟁이다. 이런 재앙으로 성도들을 질적 양적으로 생명권 위로 다 몰아넣은 후에 완악하고 불순종한 자들과 그들의 무기를 다 불태워 버린다. 그런가 하면 서로 총질을 하는 것은 상대방의 무기를 없애려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해서 불태워 버리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영적인 면에서도 이런 심판이 있는 것인데, 진리 신앙자들을 해코자 하는 모든 혀 놀림과, 비진리를 외치는 자들, 세상적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설교를 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앞잡이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 불에 태워버릴 거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불에 태운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왜 불에 태우는 거냐? 쓰레기니까 불에 태우는 거다. 그러니 쓰레기처럼 살지 말아라. 쓰레기가 뭐냐? 필요 없는 거, 알맹이가 없는 것이 쓰레기다. 그리고 잘 쓰다가 망가지면 쓰레기로 나간다. 그리고 오래 되면 쓰레기로 나간다. 또한 부서지고 변질되면 쓰레기로 나간다. 쓰레기는 불에 태운다.
10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누구보고 하는 말이냐? 악한 자들을 보고 하는 말이냐, 여호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냐? 과거적 역사적으로 완악하고 거짓된 길로 가는 자들을 진노와 심판으로 처치한 것을 똑똑히 보여준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고 여전히 세상 길, 넓은 길, 사망 길로 가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서 ‘내가 그런 자들을 어떻게 처지를 했는지 너희들이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그런 무리들 틈에서 서성이다가 개죽음을 당하지 말아라. 왜 그들이 받을 심판을 받고자 하느냐? 나오너라’ 이 말이다.
그리고 ‘너희는 제발 가만히 있어라. 내가 이 일을 하겠다. 너희들도 인본주의로 나가면 큰 코 다친다. 너희들은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봐라. 너희가 그들을 처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처치해 버린다. 너희는 다만 옳은 길,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역사, 하나님께로 바로 가는 옳은 길만 증거하라. 너희들을 해코자 하는 원수들은 내가 처치하마’ 이 말이기도 하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천상과 지상에서 누가 높임을 받으면 좋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이냐, 인간 자기냐? 여호와 하나님이다. 인간에게 높임을 받고 싶으냐? 그렇다면 인간에게 종노릇하면 된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통해서 높임을 받는 거다. 우리가 진리말씀에 수종을 들면 자기의 성격과 성질이 고상하게 올라간다. 올라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은 곧 자기의 영광과 직결이 된다. 돌려서 말하면 자기가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광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도 올라간다.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영광이라야지 땅으로 말미암아 된 영광은 올라가다가 뚝 떨어져 버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을 하면 자기도 올라간다. 그러니까 자기가 올라가려면 하나님을 부지런히 높이면 된다. 세상 사람들은 남을 짓밟고 자기가 올라가려고 한다. 세상적인 교회도 남을 짓밟고 올라가려고 하고, 돈을 가지고 올라가려고 한다. 우리는 말씀으로 올라가는 거다. 말씀으로 올라가는 것이 정확한 거다. 말씀에 의해서 사람이 영특해진다.
11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이런 찬송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을 하고 경험을 한 자가 부르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진리의 성도를 천군천사와 만물을 동원시켜서 보호해 주신다. 천군천사만이 아니라 만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움직인다. 이 만물을 자기 편으로 삼고 싶으냐? 그러면 질적 양적으로 주님을 닮는 일을 하면 된다. 하나님을 닮지는 않고 만물을 자꾸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면(세상 복을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이 오는 게 아니라 마귀가 온다. 일 목적으로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면 자기는 그만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앙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47편. 고라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절: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찌어다.’ 우리 인간은 희로애락을 표현할 줄 아는 존재다. 특히 무슨 좋은 일이 있을 때 박수를 치기도 한다. 왕하11:12에 보면 요아스를 왕으로 세울 때 무리가 박수를 쳤다. 그런가 하면 대표선수가 경기에서 이겼을 때 구경하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소방관이 불구덩이에서 사람을 구출해 올 때 이것을 보는 사람들이 신이 나서 박수를 치고, 학교에서 학생이 공부를 잘 해서 상을 타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치고, 찬송을 힘 있게 부를 때도 박수를 친다.
그런데 한 자리에서 다 같이 박수를 칠지라도 박수를 치는 성질이 각기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인도자가 ‘다 같이 찬송합시다’ 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성경이 깨달아진 것이 기뻐서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사업이 성공했다고 그것이 좋아서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할 수 있고, 어떤 할머니는 자기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서 좋다고 박수를 치며 찬송을 하고, 어떤 사람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했지만 성경 한 이치를 깨닫고 하나님의 처음사랑을 받은 것이 기뻐서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한다. 같은 찬송을 한 자리에서 같이 부르는데 박수를 치는 마음이 각기 다르다.
우리 성도가 박수를 치는 것은 성경 한 이치가 깨달아지면 그것이 가치가 있어서 박수를 친다. 이것은 주님이 자기의 왕이 되어서 박수를 치는 것과 같은 거다. 주님이 성도 자기의 왕이 되어서 박수를 치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도리를 깨달은 자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이 자기의 요구대로 되어 들어가면 좋아서 박수를 친다. 이런 자들은 주님을 왕으로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높이 치켜드는 꼴이다. 세상을 왕으로 삼는 꼴이다.
2절: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세상에는 왕이 많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주시요, 성도의 보호를 위해서 역사를 섭리 진행하는 분이시요, 세상 마지막 심판의 주권자시다. 만왕의 왕이시다. 그러나 이방 열왕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을 가지고 각자 나름대로 자기의 주권이 미치는 곳만 통치를 하는 왕들이다. 뿐만 아니라 각 분야나 각 부서마다 그 계통에서 전문업을 가진 왕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세상의 왕들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것이니 전부는 임시적인 세상에 속한 것으로 내려져 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왕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임금, 더 큰 왕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존재들이다. 마지막 때 큰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현재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진리통치를 받아야 하고, 그리고 그 분의 통치성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통치를 받아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격화 되고 사람이 만들어져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게 더 좋으냐,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게 더 좋으냐? 살리는 거다. 살리는 일이 얼마나 좋은 거냐?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창세 이후로 온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 사실을 진리 생명과를 먹은 사람은 느끼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은 못 느낀다. 이 세상은 성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성도를 위해서 이런 저런 사람을 붙잡고 우리에게 깨달음으로 다 보여주는 거다.
3절: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아래 복종케 하시며.’ 여호와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시요 큰 임군이시다. 이 분을 모시는 성도들은 세상의 모든 왕들 위에, 모든 열방들 위에 우뚝 서게 된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그 사고방식이 세상 여러 나라의 통치자들의 소원 목적보다 우뚝 높이 서 있어야 한다.
‘만민을 우리에게.’ 이것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진리를 붙잡고 신앙정조를 지키면서 생명 길로만 걷는 성도로 보여지고, ‘열방을 우리 발아래 복종케 하시며’ 라고 하는 것은 열방이 명예나 영광이나 부귀나 조직이나 단체가 아무리 크더라도 이 전부는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니 진리성도의 수준은 하늘의 것을 소원 목적하는 수준이고, 열방들은 불타고 썩어 없어질 임시적인 땅의 것을 소원 목적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하늘의 수준을 가진 자들은 땅의 수준을 가진 자들을 능히 이긴다는 거다.
세상을 주장하는 열방은 임시성에서 끝나는 것을 소원 목적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세상이 끝날 때 너도 끝이구나. 반면에 진리성도의 수준은 하늘의 것을 소원 목적을 하는데, 하늘의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이고 인격과 성품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간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열방은 영원히 가는 능력성을 가진 성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우리 기독자는 세상 속화된 열방의 수준에 머물고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 세상에서 아무리 유명할지라도 전부는 세상에 속한 거다. 하늘에 속한 게 아니다. 하늘에 속한 것은 하나님에게 있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의 것을 준다면 하늘에 속한 거다. 그런데 세상 마지막 때라서 교회에서 하늘의 것을 주지 않고 땅의 것을 주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을 거짓 종들이라고 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