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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살아 있는 말씀 앞에 내 양심을 비춰보는 묵상
장코뱅 추천 3 조회 325 26.07.04 07:21 댓글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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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7.04 08:38

    첫댓글 여름응 이기는 즐거운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 26.07.04 16:09

    알겠습니다.

  • 작성자 26.07.04 08:40

    <호크마 주석: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하나님의 말씀'은 앞에서 인용된 안식에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으나(Hewitt),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전해진 하나님 말씀 전체를 가리킨다(Robertson, Morris).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는 표현은 그 '말씀'이 '인격성'과 '역동성'을 지녀서 행위를 동반함을 암시한다. 즉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이들에게는 경고와 심판을 행하게 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에게 약속된 말씀을 성취케 하는 말씀이다(Hewitt, Morris).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 하나님의 말씀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오늘날의 수신자들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지닌 말씀으로서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한다(Trompf). 그 말씀은 '검'과 같아서 하나님의 음성에 계속불순종할 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아말렉과 가나안인들의 '검'(* ,마카이란)에 패배(敗北)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민14:43-45).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 작성자 26.07.04 08:40

    인간 심성에 내재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악독(롬1:29) 등의온갖 죄악을 예리하게 심판하는 '검'이 된다(Hofius, Lane).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혼과 영'(* , 프쉬케스 카이 프뉴마토스), '관절과골수'(* , 하르몬 테 카이 뮈엘론)는 인간의 구조로 명명되는'삼분법'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인간 정신의 전체적인 본성을 말하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표현이다(Bruce, Morris, Robertson). 한편 '찔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이이크누메노스'(* )는 '꿰뚫다'라는 의미로 인간의 영혼과 육을 분할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잠재된 의식까지 들춰내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Bruce, Robertson). 또한 '감찰하나니'의 헬라어 '크리티코스'(* )는 법정용어로서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인격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할 수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안식과 진노를 행함을 시사한다(시95:11, Lane).

  • 작성자 26.07.04 08:41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 '지으신 것'이란 '창조 행위' 혹은 '물질적인 우주'와 '영적인 존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고후5:17;갈6:15)가리킨다. 한편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의 헬라어 '아파네스'(* )는 본문에만사용된 형용사로서 부정 접두어 '아'(* )와 '보이다'를 의미하는 '파이노'(* )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역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마음과 뜻을감찰하시는 능력이 있어(12절)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남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모든 창조물들이 벗어날 수 없다는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식적인사실이었다(Lane).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혼 헤민 호 로고스'(* )는 동사가 없는 구문으로 해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자에게'라는 의미로(Morris),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시사한다(Robertson).

  • 작성자 26.07.04 08:41

    한편 '드러나느니라'의 헬라어'테트라켈리스메나'(* )는 '목(* , 트라켈로스)을 뒤로 젖히다'라는 의미로 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나 짐승을 잡기위해 뒷덜미를 젖혀서 목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이다(Morris). 이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어떤 것도 은폐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저자는 12절과 본절의 문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다는 것은(12절) 하나님 자신 앞에 드러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Lane).

  • 26.07.04 09:07

    네, 잘 참고하겠습니다.

  • 작성자 26.07.04 08:42

    잠20:27

    <호크마 주석>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 '영혼'의 히브리어 '네솨마'( )는 '바람', '호흡', '영혼' 등의 뜻이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불어놓으셨던 생기, 영혼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2:7). 이런 맥락에서 본절에서는 '양심', '종교심'의 뜻으로 번역될 수도 있겠다. 사람은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생령'으로 지음 받았으며(고전 15:45), 영적 삶이 정당하게 영위될 때 의(義)에 대한 무관심이나 스스로를 속이는 그런 생각은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Pulpit, Allen P. Ross).

  • 26.07.04 09:08

    아멘 🙏

  • 작성자 26.07.04 08:43

    롬2:15

    <호크마 주석>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 )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 )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고전 8:7-12). 칼빈(Calvin)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고호 4:2).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간다(갈 6:3;딤전 4:2;딛 1:15).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 작성자 26.07.04 08:44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26.07.04 09:48

    좋은 내용입니다. 공감합니다.

  • 작성자 26.07.04 08:45

    렘31:33

    <호크마 주석>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 이제 여호와는 백성들의 내적인 성품의 변화를 주실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순종할 수 있도록 할 것임을 선언하신다. 즉 여호와는 그들의 마음에 그의 율법을 기록할 것인 바 이는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에 전인적이고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을 암시한다(롬8:1-11). 한편 옛 언약은 돌 위, 혹은 책에 기록되었었다(출 24:7;31:18;신 4:13). 그리고 기록될 장소로서의 '마음'이란 표현은 17:1에서는 죄와 관련되어 쓰이고 있다.

  • 26.07.04 09:50

    네, 잘 읽고 참고하겠습니다.

  • 작성자 26.07.04 08:47

    딤전1:19

    <호크마 주석>
    믿음과 착한 양심을 기지라 - 선한 싸움의 도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이다. 엡6:10-1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전신 갑주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본절에서는 교리와 행동에 연관된 근본적인 측면만을 언급하고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은 본 서신 안에서 세 번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1:5 ; 3:9) 보아 믿음과 착한 양심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의 '믿음'은 딤후 2:17, 18에서 기록된 것처럼'진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Hendriksen). 사람의 양심이 파괴되면 도덕적 부패와 함께 영적 파멸까지 초래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양심을 버림으로써 오는 믿음의 파멸을 막기 위해 선한 양심, 즉 성령으로 거듭난 양심과 진리인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한다.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약 양심이 파괴되면 믿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양심을 버림으로써 파멸이 초래됨을 경고하고 있다. 본절의 '버렸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사메노이(* )는 자의적(自意的)으로

  • 작성자 26.07.04 08:47

    거부했음을 뜻한다(have rejected, NIV).

  • 작성자 26.07.04 08:48

    벧전3:21

    <호크마 주석>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맘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 노아의 가족을 구원한 물은 세례를 상징한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세례의 형태에 참여한 것을 곧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참여하여 연합되어야 얻을 수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는 표시이다. 실제로 노아 홍수때의 물은 세례시의 물의 '실체'(* , 안티튀폰)이고 세례 때의 물은 '표상'(* , 튀포스)이다(TDNT).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 본문은 세례의 중요성을 배제시키려고 함이 아니다. 단지 세례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로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혹자는 '육체의 더러운 것'에 나타난 소유격을 주격으로 보아서 '육체가 더러움을 제거함으로'라는 의미로 보나(Bengel) 세례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까닭에 심령의 죄를 씻어내는 것이다(히 10:22).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된다.

  • 26.07.04 09:50

    1문단에 대하여:

    성경 묵상이 지식을 넘어 살아 있는 말씀의 빛으로 내 양심의 등불을 밝히고 깊은 내면을 대면하는 시간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외적인 행위를 넘어 혼과 영, 관절과 골수까지 스캔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숨은 생각과 중심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게 됩니다.

    매일의 묵상을 통해 내면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과 세밀하게 소통하며,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동화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작성자 26.07.04 11:00

    아멘!

  • 26.07.04 09:52

    2문단에 대하여:

    성경 묵상이 지식의 습득을 넘어 돌판이 아닌 내 영혼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깊이 새겨나가는 은혜의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내 안의 양심의 증거를 마주할 때, 고발과 변명을 거쳐 숨겨진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외적인 강요나 억지 의무가 아니라,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는 말씀과 교제하며 자연스럽게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참된 묵상임을 배웁니다.

    매일의 묵상을 통해 성령의 조명과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친밀한 동행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 작성자 26.07.04 11:01

    아멘!

  • 26.07.04 09:53

    3문단에 대하여:

    참된 믿음은 반드시 착한 양심과 함께 가야 함을 상기하며, 양심을 버려 믿음까지 파선에 이르게 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단호히 경계하게 됩니다.

    세례의 본질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듯, 성경 묵상 또한 외적 형식을 넘어 깨어난 양심으로 주님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자리임을 배웁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의 거울 앞에 서서 내면을 깨끗하게 성찰하고,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묻고 구하는 진정한 묵상의 삶을 살아가기를 결단합니다.

  • 작성자 26.07.04 11:05

    아멘!

  • 26.07.04 09:55

    마지막 문단에 대하여:

    감동적인 결론에 깊이 공감하며, 은혜를 나누어 받아갑니다.

    성경 묵상이 지식의 축적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내 깊은 중심에 초청하여 숨겨진 양심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은혜의 여정임을 고백합니다.

    말씀이 내 양심에 걸어오는 음성에 귀 기울이며, 부끄럽고 비뚤어진 모습들이 바로잡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으로 날마다 성장하기를 기도하고 기도합니다.

  • 작성자 26.07.04 11:06

    아멘!

  • 26.07.04 11:00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히브리서 4:12를 통해서 확실히 배웁니다.
    이번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잘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묵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일깨워 주십니다. 성경 묵상은 양심을 일깨우고 영혼에 진리가 박혀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진리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았으면 양심의 가책이나 죄 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고 자유해야 한다, 다시 회개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구원 받지 못한 증거다 라는 식으로 믿음을 호도하고, 양심을 버려야 산다는 등의 망언을 하는 사람들은 끝내 자기들의 그릇된 선택으로 믿음이 파선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성경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을 더욱 회복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26.07.04 11:04

    네, 예리한 분별이십니다. 성령이 붙잡아 인도하시는 영혼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회개(단회적 화심X)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기독교인의 탈을 쓴 위선자에 불과합니다.

  • 26.07.04 16:09

    @장코뱅 두 분의 분별에 공감합니다!

  • 26.07.04 16:11

    성경 묵상이 멈춰 있는 문자를 읽는 지식의 행위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숨은 중심을 온전히 스캔하는 영적 마주함임을 고백합니다.

    내 양심의 방에 들어온 말씀의 빛이 어둡고 비뚤어진 생각들을 정직하게 직면하게 하시고, 결국에는 온전한 회복과 바른 길로 인도하심이 참된 은혜입니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주님의 세밀한 음성이 내 양심에 말을 걸어올 때, 의무가 아닌 기쁨으로 응답하며 하나님과 더 깊이 동행하는 성숙한 신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6.07.05 16: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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