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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퍼와 게시합니다.
주식이란 상대성게임이라 우선 내가 성공할려면 귀하 뿐만 아니라 더 큰상대는 한국주식에도 전세계인이 들어와 경쟁하므로 외국인부터 피똥싸게 만들려면 심리전에서 이겨야 합니다.
참고바라며 구독합시다.
절반의 성공 그리고 또 다시 쓰라린 패배
주식입문 어언 8년차
수차례의 깡통으로 자살까지도 기도하려고한 정말 어리석고 우매한 사람의 쓰라린 실패경험과 절반의
성공담입니다.
저의 어리석었던 쓰라린 실제 경험담을 들려드리오니
저에게는 재기의 발판을,
주식투자 입문하시는 분들께는 경각심과 주식투자의 올바른 길을,
유경험자 분들께는 수익모델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주식입문하시는 분들은 장문이지만 꼭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식투기는 하지마세요. 정 하시려거든...
Y2K인터넷 버블이 꺼지는 2000년 4월경 직장에서 동료들이 인터넷으로 주식투자하는
것을 보고 나도 잘하면 억대 연봉자가 될 수 있겠다는 부푼 마음으로 시작한 주식투자가
내 인생을 이렇게까지 힘들고 비참하게 만들지는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500만원의 여유자금으로 시작하여 하락장이었지만 운이 따랐는지 100%수익이
났었습니다. 그러나 3개월도 못가서 첫 깡통을 찼지요. 사실 그 때 주식투자의 무서움을 알고
그만 두었어야 했었습니다.
도박판에서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이 말이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주식투자 처음하시는 분이 우연히 요즘 잘 나가는 액티패스나 위디츠(07.9월 현재는 대선관련주나 동일청강 )에 저가에 투자하여 단시일에 몇 백 프로 수익이 났을 경우 과연 이 사람을 행운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십중팔구 아니 백중 구백구십구는 비운(悲運)아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도박이 그러하듯 처음에 쉽게 벌면 그 맛을 잊지 못하여 계속하게 되고
돈을 잃기 시작하면 본전 생각에 그만두지 못한다고 하는데(다른 도박은 해본 적이 없음) 여러분도 머지않아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를 떠나지 않는 한 말이죠.
여러분 주식투기는 하지마세요. 정 하시려거든...
첫 깡통 이후 주식하는 동안 저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 번 만 더 한다고 하여 아내가 처녀 때 피같이 모아온 지참금 1500만원 고스란히
날리고,(그 당시 제 아내 유치원 교사 월급 70만원으로 기억됩니다.)
마지막 도전이라고 아내를 다시 설득하여 저축해 놓은 돈 2000만원 투기해 고스란히 날리고,
다시는 안한다고 약속하고 아내 몰래 시작하여 퇴직금 중간 정산하여 1500만원 날리고,
아내 몰래 잃은 퇴직금만이라도 원금회복하려는 마음에 돈을 빌리기 시작하여
친구 돈에, 마이너스통장 대출에, 카드깡에, 캐피탈 추가대출까지 약4500만원 빚지고 나니
정말이지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아서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모든 것이 허무하게 생각되어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더군요.
심한 소화불량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그리고 그렇게 자상하고 가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들에게 툭하면 짜증내는 못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자살 직전에 아래의 신장사기사건 이 후 아내에게 털어놓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직은 젊으니까 사랑하는 두 딸을 생각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천사 같은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서 저의 진심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 후
빚 갚느라 이사하면서 전세금 2000만원으로 이자가 많은 것부터 정리하고, 각종 보험 모두 해약하고, 심지어 혼인 예물과 애들 돌 반지까지 팔아서 빚잔치를 하였으니 정말 저는 나쁜 놈이요 미친놈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 월급이 120만원이었는데 거의 1억을 까먹고
작은 평수지만 구미시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송정동의 아파트에 살다가
월세(종택으로 보증금 없이 월15만원에 묘지11기 벌초해 주는 조건)로 전락하여 충남 당진의 시골 깡촌으로 이사까지 하였으니
제 아내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여러분도 짐작이 되시리라 ......
여러분 주식투기는 하지마세요. 정 하시려거든......
어쩌면 그렇게도 운이 없는지(사실 실력이 없었던 건데)
내가 돈 마련하여 주식 다시 시작하면 상투고 깡통 차면 어김없이 바닥이고,
내가 사면 어김없이 내리고 내가 팔면 오르고
이놈 사고나서 기다리다 저놈이 갈 것 같아 갈아타면 내리고 그 놈은 상한가 가고
한마디로 미치고 환장한다는 말을 주식하면서 여러 번 경험했지요.
아내 몰래 빚으로 투기하니 빨리 복구하여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주식투자에서 금기사항인
몰빵과 미수, 미수몰빵을 서슴없이 지르고 밤새 미국시장 상황 보초서며 마음 졸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요.
주식보다 옵션투자가 쇼부가 빠르다고 하여 기웃거리다가 단 일주일 만에 깡통 차고 그러니 돈 잃고 건강도 안 좋아지고 심지어 부부관계도 안되더군요.
돌이켜보면 제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고 대책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제발 저와 같이 아무런 준비 없이 투기 하지마세요.
여러분 주식투기는 하지마세요. 정 하시려거든......
저도 주식하기 전에는 열심히 살았다고 자타가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충청도의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정말 찌저지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때까지 일년에 4번 쌀밥 먹어봤지요. 양명절하고 조부님 제사와 아버님 생신 때 그 외날은 꽁보리밥도 없어서 못먹었고 영세민에게 주는 2푸대 밀가루로 거의 매일 수제비와 칼국수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요즘 아이들을 보면 참 부럽습니다. 유치원 아이들도 생일이라고 파티하는 것을 보면 어린시절 배고팠던 기억이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음식은 절대 버리지 않는 습관이 있지요. 이런 어린 시절 때문에 제가 부자가 돼 보려고 주식에 빠지지 않았나 봅니다. 그것이 진정 행복이 아니란걸 알면서도......)
소아마비 장애인 아버님 슬하에 8남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81년도) 못하고(어린마음에 그 때도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담임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아까운 아이라고 어려우셔도 진학시키라고 하셨던......., 우리반 61명중 남자는 저 혼자만 중학교 진학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셋째 매형의 소개로 상경하여(성남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성남시 제일실업중학교와 광성실업고등학교 비인가 야간학교)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패스했고 끝내 대학진학을 못하여 교수의 꿈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공부할 때는 정말 열심히 했었습니다.
81년부터 공장을 다녔는데 86년까지는 월급도 거의 없었고 국경일도 없었고 일요일도 한 달에 두 번 쉬고 일했었지요.
먹여주고 재워주고 야학 보내주고 용돈 받고 일했었지요.
일명 공돌이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대학진학을 위하여 서울역 대일학원 근처 경일독서실에서 5년동안 기거하면서 신문배달, 지하철 1호선 침통철에서 신문팔이, 룸살롱 보이, 나이트클럽 조명기사, 이삿짐센타, 골프연습장 골보이, 을지로 인쇄소촌에서 일식집 써빙, 서울역에서 구두닦이 찍세(은어로 찍세라함), 식당음식배달 등등 안해본거 없지요. 결국 대학진학은 못하여서 지금도 여유만 된다면 대학입시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98년 IMF직후 실직했을 때는 제 학력으로는 어려운 주택관리사 시험도 6개월정도 신문배달하며 공부하여
합격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 자격증을 사용하고 있지요.
요즘 살기 어렵다지만 지금은 노동자들도 정말 많이 좋아진 편입니다. 우리 선배님들이야(50대 이후) 말할 것도 없이 저보다 더 고생들 하셨지만......
여러분 주식투기는 하지마세요. 정 하시려거든......
이런 비참한 일이 있었습니다.
한 참 빚지고 감당 못하여 도저히 아내에게 죄스러워 말 못하여 생명보험 여러 개 들어 놓고 사고를 가장하여 죽을까 생각 했었습니다.
그런데
차마 어린 두 딸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히 구미터미널 화장실에서 신장매매 광고를 보고 신장 하나는 없어도 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여 연락하니 7000만원 준다고 하더군요.
그 때는 빚 때문에 구세주로 생각하고 빨리 진행해 달라고 하니 아무걱정 말라고 하면서 대구영남대 병원에 가서 병원 수간호사와 다 얘기가 돼있으니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하더군요. 병원에 도착하여 연락하니 의사에게 친척에게 신장을 기증하려고 하니 피검사와 무슨무슨 검사를 하러 왔다고 가르쳐 준대로 의사에게 말하니 검사를 해주더군요.
검사가 끝나고 부로커에게 연락하니 조직검사비용이라면서 77만원 입금하고 수술날짜 통보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그 때는 빚지고 돈이 한 푼 없어 아내에게는 아는 선배가 좋은 취업자리 소개해 준다고 소개비가 필요하다고 거짓말하여 조직검사비를 생활비에서 타내어 브로커의 계좌에 입금하고 일주일 후에 연락하니 아직 결과가 안 나왔다고 하고 또 일주일 지나니 조직이 맞는 환자를 찾는 중이라고 하고 한 달이 지나도 같은 대답이더니
급기야는 연락 두절 되더군요. 사기 당한 것을 그 때야 알았습니다. 바보같이
벼룩에 간을 빼어 먹어도 유분수지 그 때는 정말 그 놈을 만나기만하면 죽이고 싶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여 울었고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여 더 울었습니다.
아니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루 종일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군요.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이 ...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여러분은 부디 저와 같이 되지 마세요)
아내는 지금도 그 때 제가 취업사기 당한 걸로 알고 있지요.
그 이후 뉴스에서 그 브로커인지는 모르지만 대구경북에서 활동하는 장기매매 브로커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과응보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은 오히려 그 때 사기당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생 새옹지마라고나 할까요. 그 때 수술했으면 돈도 건강도 모두 잃었을 테니까요.
지금도 터미날이나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에 이런 사기꾼들의 전화번호가 있지요.
아무리 어려워도 여러분은 저와같이 속지 마세요.
여러분 주식투기는 하지마세요. 정 하시려거든...
사기 당한 이 후 깨달은 바가 있어
아내에게 고백하고 진정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천사 같은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용서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주위의 도움으로 이자가 많은 금융권의 빚을 먼저 청산하고 위의 내용대로 전세금과 보험해약환급금과 혼인예물로 일부 갚고 나머지는 분할로 갚기로 약속하고 정말 열심히 일하여 2년여 만에 모두 갚았습니다.
여러분 주식투기는 하지마세요. 정 하시려거든
전에도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주식에 미쳐 아내 때문에 몸만 따라다니다가 피 눈물을 흘린 후 빚 갚아가면서 제 아내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며 다음을 준비 하였습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할까요.
피눈물을 흘린 후 빚 갚아가는 동안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주식 서적 30여권을 탐독하였고,
한 가지 매매기법만을 연구하고, 연마하여 2005년 초부터 06년 말까지 월평균 15%(종잣돈500만원에서 현재 1억원 조금 넘네요. 월15% 월로 보면 작아보이지만 복리로 투자하면 엄청 큼니다.) 수익을 올렸습니다.
정말 이 때는 저도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장이 무척 좋았으니까요.
산술적으론 본전은 한 셈이죠. 그러나 아직까진 절반의 성공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3-5년 후쯤이면 저와 제 아내가 주식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미련 없이 이 어둠의 세계를 떠나려 합니다.
지금은 건강이 안 좋아져(신경성 위염이 발전하여 위궤양이라고 하더군요.) 잠시 쉬면서
제가 성공한 매매기법과 투자원칙 등을 자세하게 노트하고 있는데 거의 완성단계에 와 있네요.
후일에 제 꿈이 이루어진다면 노트를 기초로 해서 책 한 권내고 그만 둘 수 있다면
그동안의 고통의 보상으로 남겠지요.(꿈이 너무 큰가요?)
주식초보 여러분!
지금이라도 손실이 크지 않다면 주식투기는 그만 두세요.
저보다 더한 고통이 여러분을 기다릴지 모릅니다.
정 하시려거든 주식투기 하지 마시고
꼭 여윳돈으로
우량주(기본적, 기술적인)에
중장기로
주식투자 마인드로 하세요.
정 하셔서 주식투기를 주식투자로 승화시키시려면
정말 철저히 준비한 후에 하세요.
시장은 평생 열립니다.
그리고 파생은 절대 하지마세요. 정말 절대 파생은 하지마세요.
두서없는 미천한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금돼지해 모두 성공투자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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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한 방에 성공하겠다는 당신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한 방에 성공하는 인생이라면 실패도 한순간이다!"
벤처 열풍이 한창이던 1990년대 말, 내가 일하던 무역회사에서 한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이 벤처기업에서 개발한 제품을 해외 시장으로 진출시키는 것이 당시 내 주요 업무였다.
정부의 벤처기업 지원 덕분으로 나는 미국과 캐나다 박람회에 참가하여 국내 제품을 전 세계에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개월간 해외 마케팅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갔다. 많은 외국인이 한국 IT 박람회에 참관하며 관심을 보였다. 당시 박람회에 참가한 이후 사라진 기업도 많지만, 성공해서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는 기업들도 있다. 개중에는 천만장자가 된 벤처 사업가도 있고 쪽박 차서 감옥을 들락거리는 사람들도 있으니, 미래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다니던 무역회사의 사장이 투자했던 벤처기업은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지만, 결국 쪽박을 차고 말았다. 당시 검색 엔진을 개발했으나 폐쇄형 검색 엔진이라 개방형 검색 엔진에 밀려 벤처기업의 수익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벤처기업은 우리 회사에 더 많은 투자를 요구했으나, 투자자 입장에서는 더 이상 투자하기에 무리가 있어 결국 추가 투자를 포기했다.
이에 따라 내 일거리도 없어졌고, 이후 무역회사 고유 업무를 맡아야만 했다. 해외에서 유통되고 있는 양질의 제품을 발굴해서 국내로 들여오는 일이었다. 완전히 신규 시장 개척이라 쉽지 않았다. 해외IT 박람회를 가는 동안에도 신규 아이템 발굴을 위해 관련 기업을 만나 미팅을 하곤 했다. 국내에 수입하여 유통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 규모가 미미했다. 무역 분야에서 좀 더 도전적으로 일하지 못한 내 책임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발을 붙이면서 맡겨졌던 벤처기업 마케팅 활성화 업무가 사라지자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감은 짙어져만 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과 달리 몸은 나태해졌다. 해외 아이템 발굴도 나 스스로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테지만, 그런 의욕은 점점 떨어졌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빈둥거리며 보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시작한 일이 주식 투자였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다. 아무런 기초 상식도 없이 뛰어들었다가 5백만 원의 손실을 냈다. 주식 공부 좀 해야겠다 싶어서 관련 서적을 10~20권 정도 읽으며 기초 지식을 쌓았고,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워 투자를 시작했다.
한두 달 사이에 원금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몇 개월 뒤에는 20퍼센트 넘는 수익률을 올렸다. 원래는 원금만 회복하면 그만둘 생각이었으나 욕심이 났다. 그리하여 1천만 원 이상의 수익을 내면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욕심을 내다가 결국은 크게 손실을 보고 말았다.
손실을 보고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에 투자자금을 모두 빼야 했다. 그러나 주식 투자는 결혼 이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대출까지 끌어안고 아내 몰래 주식 투자를 계속하다가 차는 물론 집까지 날렸다. 급기야 우리 가족은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살 집이 없었기에 아내와 아기를 처갓집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다. 아내와 아이를 처갓집에 보내고 나는 서울의 단칸방으로 올라왔다. 돈만 생기면 아내 몰래 주식투자를 해서 모은 돈을 또다시 날리곤 했다. 몇 년간 계속된 주식 투자로 아내는 물론 나조차도 힘들었다.
한번은 전세 자금으로 송금되어온 목돈을 불려보겠답시고 그 돈을 미수금으로 3배까지 불려서 투자했다가 전세금을 몽땅 날리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아내 몰래 집주인과 월세로 계약해서 매달 월세를 지불했는데, 나중에 아내가 알고는 망연자실했다.
가족이 떨어져 지내다가 아내와 아이가 서울로 올라오기는 했지만, 우리 가족은 여전히 단칸방 신세였다. 아마도 그때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지 싶다. 어리석은 나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모두 잘못된 내 탐욕에서 비롯한 벌칙이었다. 직장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던 나태함이 만들어낸 실패였다. 그 이후로 주식 투자는 완전히 그만뒀다. 아무리 좋은 투자 정보가 있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설령 잠시 벌었다고 하더라도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기 쉬운 것이 직접 투자임을 쓰디쓴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일이
최고의 투자임을 실패를 통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대여, 고위험 고수익으로
한 방에 돈 벌겠다고 욕심을 부리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후회할 수 있다.
저위험 고수익 투자인
‘자기계발’에 올인하라!
젊은 날 ‘돈 한 번 벌어보자’는 욕심으로 주식투자를 했던 때가 있었는데요. 아내가 보내온 전세금까지 주식에 몰빵했다가 모두 다 날려버린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 다른 사람들에게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던 경험이었는데요. 이제는 ‘한 방에 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꾸준하게 자기 몫을 다해 한 땀 한 땀 흘려 나아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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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 학원을 운영 중인 이강성 씨. 아직은 작은 학원이지만, 그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도박 같던 주식 투자의 중독에서 벗어난 후, 그는 무척 행복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 방법으로 번 돈이 진짜이며, 그는 지금 그런 진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식 시장이 심상치 않다. 예금 금리가 낮아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 틈을 타서 직접 투자를 하는 개인 투자자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보도다. 얼마 전 한 신문에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PC방에서 주식투자를 한다’는 짤막한 기사가 났다. 기사를 본 스피치 강사 이강성 씨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큰일 날 기사다. 이 사람들 이렇게 하다가 잃으면 다행이지만 단 돈 몇 만 원, 몇 십만 원이라도 벌면 큰일난다. 내가 이렇게 인생을 망친 경험이 있다’고….
종로에서 작은 스피치 학원 ‘강성스피치’를 운영하고 있는 이강성 씨의 본명은 ‘이재성’이다. 스피치 강의를 시작하면서 ‘강의에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이름을 강성(講成)으로 바꿨다. 지금은 어엿한 사업가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지옥같았던 실패의 경험이 있다. 모든 것은 주식 때문이었다.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은 그에게 직업도, 가족도, 명예도 앗아가버렸다.
지리산골 검정고시 출신의 행정고시 합격, 그 후
“행정고시 32기 출신 공무원이었습니다. 인생 최악의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요. 지리산 산골짜기 7남매 중 넷째가 고시에 붙었다고 마을에 플랭카드가 걸렸던 것이 엊그제 일 같습니다.”
이강성 씨는 옛 기억을 더듬는다. 청학동이 지척인 지리산 어느 산골. 어렸을 때 공부를 곧잘 하던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중풍으로 투병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충격으로 더 이상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방바닥을 뒹굴다가 소설을 끄적여 보기도 하고 따분해 두 번이나 서울로 가출을 했다. 철없이 방황하다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나이 스물. 사회생활을 해 보니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그가 세상을 살아갈 길이 요원했다. 그 길로 산 속에 틀어박혀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일사천리로 합격하고 내친 김에 행정고시까지 보기로 했다. 어린 눈에도 면서기처럼 공무원이 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직업인 것 같았고, 이왕 하는 것 자존심도 있으니 7급이나 9급 공무원 시험보다 행정고시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4번의 도전 끝에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88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당시엔 행정고시만 합격하면 모든 것이 이뤄질 줄 알았어요. 사실 더 중요한 것은 합격 후에 어떠한 인생과 직업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인데요. 인생에서 진짜 어렵고 중요한 시험은 일과 인간관계에 대한 주위의 평가라는 걸 몰랐죠. ”
번듯한 직장도 생기고 결혼해 아이도 둘이나 생겼지만 그는 인생의 목표가 없었다. 일이 익숙해질수록 권태와 매너리즘만 몰려왔다.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서류작업을 위해 야근을 하고, 결제를 받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 상사의 방을 들락거리는 일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그때 만난 것이 당시 쏟아져 나온 주식 서적들이었다.
“IMF가 끝나자 주식시장은 무섭게 달아올랐습니다. IMF 사태 직후인 97년경 주가지수가 270이었는데 2000년에는 1200을 돌파했으니까요. 그해 봄, 활황이었던 시장에 돈을 번 사람들이 ‘나는 주식으로 하루에 50만 원씩 번다’ 류의 책을 쏟아냈습니다. 귀가 솔깃해 이 책 저책 읽어보던 저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을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돈에 휘둘리지 말고 돈을 지배하라’는 등 평소 제가 생각하는 내용이 그대로 책에 있었던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권태와 조직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던 저는 그 해 봄, 공직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식 귀신에 홀려 모든 것을 내던지다
“그때는 그래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렵게 고시까지 패스했는데 다 그만두고 주식투자를 한다고 하면 가족들이고 형제들이 가만두겠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정신 차릴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패 줄걸요? 아내도 어느 날 엄청난 부자가 되어서 나타나면 모두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모든 것이 어리석은 판단착오였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지요.”
가출할 때 가지고 나온 돈 2천만 원에, 퇴직금까지 모두 털어 만든 투자금 5천만 원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주식 관련 책을 하루에 두 권씩 독파하며, 고시 공부하듯 주식을 공부하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사고 팔았지만 한 번 사고 팔 때마다 그는 점점 더 가난해져갔다. 집 나온 지 서너 달이 지나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아내는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이혼 직후 아내는 두 아이를 데리고 중국으로 가 버렸다.
그 후 그는 더욱 열심히 주식에 매달렸다. 아내도 없고, 돌아갈 직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정고시 출신인 그는 일반 기업에 다시 취업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락장에서 그와 같은 개미투자자들은 아무리 안간힘을 써 봐도 속수무책으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하락장에서도 하루에 열 몇 개는 상한가를 친다며 그것을 잡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대안이 없다는 절박감과 대박에 대한 탐욕으로 가슴이 꺼멓게 탔다. 그러나 그것은 백전 백패의 싸움이었다.
“반대 의견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개인투자자들은 주식시장에서 절대로 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인들은 주식시장의 수많은 변수를 통제하지 못해요. 삼성전자의 영업 전략과 그 회사 CEO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금리가 오른다 내린다…. 예측은 할 수 있어도 통제는 하지 못해요. 기껏해야 점쟁이처럼 예상을 하거나 외국인이나 고수 따라하기 전략뿐인데, 따라하다가 그 사람들이 먼저 팔아버리면 고스란히 당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의 정직성이 머니게임 시장에는 없어요. 난 이런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거죠.”
어느 날 방에 쌓인 주식 책들을 정리하는데, 이강성 씨는 자신의 고시합격 수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고시 준비 시절, 품팔이를 나갔다 오면서 새참으로 준 빵을 먹지 않고 작업복 주머니에 넣었다가 툇마루에 던져주시던,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고기를 싸와 김치찌개를 끓여 ‘영양 보충하라’며 내 주시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다가 그만 뜨거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돌아오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생각이 되더군요.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2003년 초,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무일푼에 가족도 없고, 직장도 없는 신세였다. 오피스텔 평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고시원에서 지내게 된 지도 오래였다. 그는 살기 위해 막노동을 시작했다.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데, 공무원 시절엔 저보고 ‘사무관님, 이것 좀 처리해주십시오’ 하고 공손하게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함께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었던 사장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습니다. 겨우 마트에서 농산물 진열하는 일거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보도블럭을 들추고 지하수 찌꺼기를 퍼내고 있는데 하이힐을 신은 예쁜 여성들이 지나가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매일 밤 지친 몸에 술을 들이부어야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내일의 희망이 없었지요.”
적성 맞고 좋아하는 일 하는 것이 인생 대박
그러던 어느 날, 전철을 타려고 지하철역 플랫폼에 서있는데, 눈앞에 어느 스피치 학원 광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감, 긍정적인 사고방식, 인간관계…’. 본능적으로 ‘저거다!’ 하는 느낌이 왔고 당장 등록해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공직에 가만히 있었으면 이런 기회가 없었겠지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어떻게 돈을 벌어야 행복한가를 깨달았습니다. 학원을 다니다가 그 학원과 외부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고 이제는 독립을 해서 제 회사를 차리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돈을 많이 벌진 못하지만, 전 지금 인간적으로 무척 풍요롭습니다. 이 일은 제가 열심히 프로그램을 만들면 만들수록 수강생들이 만족하고, 그렇게 될수록 많은 돈을 벌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직한 사업입니다. 게다가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나의 경쟁력도 커지고, 다른 사람의 경쟁력도 키워줄 수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로버트 기요사키가 책에 쓴 것을 저는 지금 다 누리고 있습니다. ‘돈에 휘둘리지 말고 지배하라’. 지금 제가 그렇습니다. 적성에 맞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생 대박입니다.”
이강성 씨는 이제 시작이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첫댓글 좋은 글 읽었습니다..
어디에 빠진다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투기가 아닌 투자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