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들이 제법 풋풋하게 자란다.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베란다 텃밭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다. 내가 무엇에 빠져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텃밭에 있는 이 순간만은 세상에서 더는 부러운 것이 없을 듯하다.
일상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몸이 나른해지고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이 있다. 무료한 시간이 반복되니 별생각을 다 하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추억으로 산다더니 근래 부쩍 옛 고향 텃밭이 떠오른다. 엄마와 함께했던 그때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풍경들도 막 찍은 사진처럼 선연하게 펼쳐진다
오래전 고향 집에는 제법 넓은 텃밭이 있었다. 마늘이며 상추랑. 시금치와 감자 등 계절 따라 다양한 종류들이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갔다. 엄마의 정성으로 기른 윤기 나는 채소 잎들은 꽃보다 더 찬란했다. 특히 텃밭 울타리를 타고 오른 줄기 마디에는 싱싱한 오이들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엄마는 오이 하나를 뚝 따서 몸빼바지에 가시를 쓱쓱 문질러 주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물면 아삭하고 상큼했다. 반질한 보라색 가지도 따 먹었다. 달짝지근하지만 혀끝은 아릿했다. 어린 시절 즐겨 먹던 간식거리였다. 이런 즐거움이 있어 자주 엄마를 따라 텃밭을 다녔다.
봄이 시작되는 이때쯤이면 우리 집 텃밭에는 무장다리가 보라색 꽃을 피웠다. 덩달아 배추도 노란 꽃을 피워 나비를 불러 모은다. 팔랑이는 하얀 나비를 쫓아 텃밭 이랑을 따라 폴짝이며 뛰어다녔다. “네 에미 치마꼬리를 꼭 붙잡고 다니거라.” 친척 할머니 말의 의미도 모르면서 엄마가 좋아 졸졸 따라다녔다. 삼십 대 초반 그때의 엄마도 텃밭의 푸른 오이처럼 싱그러웠고, 보라색 가지처럼 윤이 나고 부드러웠다. 외롭고 힘들었을 엄마와 달리 철부지인 나는 엄마가 곁에 있어 마냥 즐거웠다. 살아낸 생을 전부 되돌려본다 해도 그 시절만큼 평화롭고 행복했던 적은 없었지 싶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인이 쪽파 뿌리를 팔고 있었다. 무작정 한 소쿠리를 샀다. 베란다 빈 화분마다 흙을 채우고 적당한 간격으로 쪽파 뿌리를 심었다. 물도 골고루 뿌렸다. 얼마 전 상추씨를 심었다. 작은 떡잎들이 오종종히 올라왔다. 뿌듯하기도 하고 싹을 틔운 떡잎이 신기하기도 했다.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떡잎 줄기가 콩나물처럼 웃자라더니 힘없이 쓰러져 말라버렸다. 실패한 경험은 있었다만 이번에 다시 쪽파를 심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쪽파는 달랐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여린 잎이 반 뼘 정도 자랐다. 꼿꼿하게 잘 자라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온통 쪽파에 정신을 쏟다 보니 공허감도 어느새 사라졌다.
다 자란 파를 뽑으니 양이 제법 많다. 텃밭 농사 첫 수확이다. 마음 가는 두 분 선생님께도 나누어 주었다. 파김치도 담갔다. 내가 키운 채소라서 인지 사서 담가 먹었던 맛과는 확연히 다르다. 연하고 아싹한 더 깊은 맛이다.
얼마 동안은 마음에 커다란 공간이 생겼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었다. 오랫동안 했던 꽃꽂이도 접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이 그랬을까. 몇 날을 즐기자고 꽃줄기를 가위로 자르는 것이, 싫었다. 화분에서 예쁘게 피었던, 꽃들이 금방 시들어가는 모습도 보기에 허망했다. 더욱이 처절하게 느껴진다. 그때부터 베란다에는 사철 초록 화분만 두었다.
채소 농사에 자신감이 생겼다. 초록 화분을 밀쳐두고 본격적으로 베란다 텃밭을 만들기로 했다. 이번에는 부전시장에 가서 배추와 상추 모종을 샀다. 거름 몇 봉지와 넓은 화분도 두 개를 장만했다. 배추 모종이 잘 자라 속잎을 꽉 채워주는 야무진 상상도 해본다. 잎이 풍성하게 자라면 입맛 당겨줄 붉은 상추도 촘촘하지 않게 심었다. 부추 씨앗을 심고 쪽파 뿌리도 다시 심었다. 이렇게 나의 텃밭이 완성되었다. 두 식구의 김장거리가 되려나. 심어 놓은 어린 모종들이 잘 자랐으면 좋겠다. 지저분해진 베란다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니 다리가 아프고 허리도 뻐근하다. 베란다 텃밭이라지만 농사짓기는 역시 만만하지 않다.
속잎을 채워가는 텃밭 채소들을 둘러본다. 어제는 구멍 숭숭 뚫린 배춧잎을 살피다가 통통해진 배추벌레도 한 놈 잡았다. 완전 유기농으로 기른다는 농사꾼의 자부심도 크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을 부러워한 적은 없다. 하지만 한적한 곳에 작은 텃밭이라도 소유한 지인들은 부러웠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한다. 몇 개의 화분마다 몇 가지 채소들이 심어진 베란다 텃밭만으로도 뿌듯하다. 넓디넓은 텃밭을 가진 농부의 마음인들 이처럼 넉넉하고 푸근할까.
다음 외출 때는 시장에 들러 고추와 방울토마토 모종을 사 와야겠다. 즐겨 먹는 들깨도 심어봐야지. 재배하고픈 종류들이 늘어난다. 농부의 욕심이란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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