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주신 말씀 살피기 전에 우리 젊은 청년들은 아마 저를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고 또 모르시는 분도 있을 것 같아서 잠깐 소개하고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영국에 92년도에 왔어요. 그러니까 청년들 여러분들 다 낳기 전인 것 같아요. 30대 이전에는 다 낳기 전인데 92년도 요하고 와서 영국의 웨일즈에 가면 복음주의 신학교라는 데가 있어요. etcw라고 그랬어요. 지금은 유니온 칼리즈로 이름을 바뀌었습니다. 거기서 이제 신약학 고린도전서 연구하고 2004년도 한국에 귀국해서 백석대학교에서 한 15년 가르치고 2019년에 용인에 있는 칼빈대학교를 옮겨서 지금 칼빈대학교에서 6년째 신약학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이경석 목사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22장 34절 40절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 사랑에 포커스를 좀 맞추고자 해요. 이 본문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이런 쪽에서 많이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셨으리라고 생각을 하는데, 39절에 보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내 이웃을 사랑하되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보면 자기를 사랑해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고 그러한 크리스천들이 온 마음과 온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중에 하나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의 한 단면을 가르친다고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에게 이렇게 한번 질문을 해볼게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일까
여러분 각자에게 한번 자문을 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삶, 성령에 이끌리는 삶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죠. 제자의 삶, 십자가의 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에 다니며 헌신하는 삶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가 본질적인 측면에서 한 단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4절 40절 말씀은 바리새인 중 한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인과 사두개인들과 부활 논쟁에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였습니다. 그 바리새인들 가운데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이제 그 율법 바사의 율법 선생의 대답에 답해서 37절 40절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본문 36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죠. 헬라어로 말하면 디다 디다스칼레라고 하는 표현이에요.
여러분이 흔히 아는 대로 랍비 유대인들은 랍비를 굉장히 존경했습니다. 그들의 전통과 또 율법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그들에게 큰 교훈을 주는 선생 스승이었기 때문에 그렇죠 여기 마태복음에서 오늘 36절에서 말하는 이 선생님 하는 호칭은 그렇게 존경스러운 호칭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마태복음에 보면 이 디다스칼레라고 하는 용어가 6번에 걸쳐 나오는데 대부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사도계인들이 예수님을 약간 비하해서 자기들이 존경하는 랍비하고는 좀 구분을 해서 붙이는 칭호가 디다스칼레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율법 선생의 질문에 대해서 이제 22장 37절 40절에 보면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해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이 네 계명이 크고 으뜸이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둘째 계명으로 내 위에서 19장 18을 인용하여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구절은 마태복음 19장 19절에서도 인용이 됩니다. 그리고 끝으로 예수님은 이 두 명이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 즉 율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살아가는 이 계명의 집약이 돼 있다고 골자라고 그렇게 강조를 하시죠.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의 총체적인 계명이고 선지자들의 가르침의 핵심임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계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읽었는데 성경 본문 39절 한번 보십시다. 본문 39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너처럼 좀 사랑하라는 거죠.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들여다보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은 내 이웃을 사랑하게 돼 있는 거죠. 자기를 사랑해야만이 그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 크리스턴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죠.
크리스천의 삶을 자기 사랑의 삶이라고 그러면 이게 조금 안 맞는 것처럼 여러분 생각하기가 쉬워요.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를 수용하고 자기를 받아들이고 자기를 용납하고 자기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은 삶이 크리스틴의 삶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그대로 받아주세요.
제가 학생들한테 가르치면서 전혀 딜레마를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서 저는 율법 선생으로 아니면 윤리 선생으로 서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나에게 오시는 그 하나님, 나를 그대로 받아주시는 하나님 그걸 이제 우리는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은혜로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을 그냥 학생들하고 셰어하고 싶은 거죠. 내가 뭐 말씀대로 살고 내가 거창한 삶의 위대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고 나에게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에게 자양분으로 좀 같이 나누고 그 은혜 가운데서 앞으로 장차 교회를 향해서 또 목회를 하도록 좀 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 한 가지 전하는 거지.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세요. 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참 나 못됐다. 내 왜 그럴까? 그런 때 여러분들 여러분 자신 바라보면 숨 막혀요. 살기 싫을 거예요. 용기도 잃고 그런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은요 절대로 경사가 너 왜 그렇게 살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물론 제가 어느 때는 신앙의 단계를 보면 정말 저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런 모습 정말 싫어요.
내가 목사인데 내가 교수인데 왜 이렇게 살아요? 그럴 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단계를 거쳐서 정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다 보니까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뭐냐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셔요. 하나님은 결코 저를 향해서 너 이렇게 좀 살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더라고요.
여러분 살아갈 때요. 여러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게 얼마나 행복해요 그렇죠 남편이 숨 막히는 게 뭐냐면 아내가 옆에서 그러잖아요. 당신 이렇게 살아야 돼. 남편이 아내한테 이렇게 살아야 돼. 그거 숨 막히거든요. 사실은 그래서 그걸 뭐라고 그래요? 바가지라고 그러잖아요. 바가지. 근데 이제 삶의 지혜가 쌓이면 그 바가지도 어때요? 은혜의 말씀으로 들리잖아요. 그 힘이 어디 있어요? 바가지도 은혜의 말씀으로 들을 힘이 어디서 나와요? 여러분들 하나님이 나를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거죠.
여러분 절망할 필요 없어요.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들여다보면서 용기 잃을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게 크리스천의 자기 사랑이 있어요. 그 마음이 있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상대방이 보여요. 뭘 필요로 하는가?
저 사람이 지금 내가 얼굴 대하고 대화하는 저 사람이 뭐를 필요로 할까 그런 여유가 생기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개념은 모호할 수 있습니다. 자칫 자기 사랑을 자아를 인식하고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인식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아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틀에 갇히기 쉬운 자기를 자신의 틀 속에 가두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어떤 틀에 가두어서 보시질 않아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앞에 서면 하나님 사랑 앞에 서면 나의 감정의 틀, 나의 사고의 틀, 나의 경험의 틀에 나를 가두지 않게 되죠. 그게 크리스천의 자기 사랑이에요.
구체적으로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 4절을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라고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처음 메시아 예수를 따르던 때와 달리 나름대로 이제 자아의식이 생긴 거예요. 자기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뭔가는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그걸 이제 기득권이라고도 하죠. 그런 것들이 생각되어서 만약에 예수님이 혹시라도 유대인의 왕이 되면 정치의 권좌에 오르게 되면 누가 더 많은 권력을 얻게 될까 하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에서 서로 싸우게 되고, 이제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렇게 묻게 됩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 그때 예수님이 이제 한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세우고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냐면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마태복음 18장 3절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다 그래요. 여기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는 지규법이 두 번 사용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린아이와 같다는 이 지규가 어떤 의미인가 좀 주목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세기 당시 어린아이들은 우리가 잘하는 대로 한 인격으로서의 존중을 받지를 못했어요. 부모의 소유처럼 생각이 되죠. 그러니까 오늘날의 어린아이하고는 천지 차이예요. 이 세계 어린아이들은 자아에 대한 의식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 하는 표현은 뭐냐 하면 자아의식이 없는 거예요. 자기를 자아의식이 없을 정도로 낮추는 거죠.
빌립보에서 예수님 그렇게 말씀 그 바울이 예수님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지만 자기를 낮췄는데 죽기까지 복종하셨어. 그게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죠. 자아의식이 없어요.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이 전부가 돼버린 거죠.
여러분의 삶은 어때요?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기 사랑에서 출발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해서 아까 찬양 나왔는데 온 마음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에 내가 없어도 행복한 삶이지
제가 이제 60이 정확히 말하면 64세입니다. 64년 동안 깨달은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자아를 의식하지 아니할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내가 어떤 사람하고 대화를 하거나 학생들 앞에 서거나 나를 의식하지 않으면 너무너무 행복해요. 강의를 할 때는 대부분 제가 저를 나를 인식하지 않고 강의 내용으로 학생들 앞에 충분히 교감합니다. 내가 나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강의에 들어갔다 나오면요.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고 땀 흘리고 그 쾌감 여러분들 아실 거예요. 그런 행복감이 밀려와요. 내가 잘나서 그런 행복감이 아닙니다. 내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 학생들한테 학생들하고 교감하면서 느끼는 행복이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이 그 말씀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자아의식이 없는 공동체 자아의식이 없는 삶 킹스크로스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여기 와서 나를 여러분들 교민이고 또 유학생이니까 나를 의식하기가 쉬울 거예요. 아마 환경이 그래요. 사실은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예수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는 고백 가운데 그런 자아의식을 뛰어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배는 바로 그거예요. 나는 없고 하나님만 보이는 거죠. 나는 온데간데없고 주님만 보이는 거죠. 주님만 느끼는 거죠. 찬송 288장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하나인데 288장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요.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나는 이제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죄인입니다. 성령과 피로서 거듭났어요. 성령으로 거듭나고 주님의 피값으로 내가 예수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가 뭐예요?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나를 느낄 필요가 없는 거지 세상의 가치관 때문에 내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거죠. 세상의 것들로 나를 가두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거죠.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누구만 보인다고요? 구속가만수만 보이도다. 찬송과 가사대로 세상과 나는 간 것 없고 주님만 보이는 게 여러분의 스토리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에요. 이것이 나의 자소입니다. 그래서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제가 20년을 가족을 여기다 두고 그래서 방학 때 왔다 갔다 하면서 역기러기 삶을 살았어요.
기러기 삶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그 어원을 분명히 정해져 기러기 삶이 아니고요. 역기러기라고 기러기들은 이제 아빠가 여기 남고 가족을 보낸 거잖아요. 저는 이제 공부 마치고 가족을 여기다 남겨두고 저만 갔으니까 역기러기이라고 그렇게 표현하죠.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20년 동안 가족 떨어져서 혼자 지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생활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어떤 분들이 옆에서 어떤 교수님들이 옆에서 한 번씩 식사 같이 하다 보면 외로워서 어째요? 그래요 그런데 외롭다고 느끼는 삶은 제가 실제적으로는 느끼지를 못했어요. 사실 가족들이 떨어져 있으니까 가족들을 생각할 때도 있고 그렇지만 그런 감정보다는 너무너무 감사해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강의 마치고 혼자 집에 들어와도 쓸쓸하다보다는 감사해요.
감사 왜 그래요?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가 됐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제 고백이 아니라 여러분의 고백인 줄로 압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결국은 어린아이처럼 자아의식을 할 수 없는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교회에서 큰 자다.
성경적으로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킹스 크로스 교회를 런던에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
본문 39절을 다시 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위에서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이고 자기의 틀 속에 갇히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로 쓰임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살펴보았는데, 여기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그 내용을 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자가 자기를 의식하지 않은 자가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깊이 새기게 됩니다.
그러면 이 본문에서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랬는데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과연 이 이웃이 누구일까?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예요?
우리가 보통 네이버 그러면 누구예요? 옆에 사는 집 뭐 이런 개념인데 사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의 개념은 누가복음 10장 30절, 37절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잘 나타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알듯이 누가복음 10장 30절 37절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도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성을 얻겠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5절이죠.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으며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때 율법교사가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 말이 옳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내가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 이웃이 과연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그에게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비유해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대어 여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 표현 잘 보세요.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쌈이에요.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고 하는 거죠. 이 사람은 지금 먼 나라에 가면서 아마 자기가 쓰려고 의약품으로 비상약으로서 기름과 포도주를 준비했을 거예요.
근데 자기가 어떻게 될 건가 그런 생각하기 전에 이 사람 상처 났으니까 상처 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는 게 우선이니까 나의 필요가 아니라 그의 필요로 다가가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준비한 기름과 포도주를 볶고 싸며 여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가서 줄 바지되 여러분들 본문 자세히 보세요. 다음 날 아침까지 돌봐줘요. 그냥 여관에 데리고 가서 이 사람 좀 돌봐주세요. 제가 갔다 와서 더 돈 들면 줄게요. 그게 아니고 밤새도록 돌봐요.
그리고 이튿날 아침 여관을 떠나면서 이제 주인에게 말하는 거죠. 내가 돌아올 때 비용이 더 들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기록은 안 돼 있어요. 여러분들 강도 만난 사람이 끙끙 앓는 그 옆에서 사마리아인이 쿨쿨 잠잤겠어요 여러분들 아이가 아프면 그 머리 맡에서 밤새도록 수건으로 그 아이 머리 이마에다가 수건 빨아서 그 열을 내리게 했던 그 어머니의 정성이 느껴지죠.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안 비유의 끝에 율법교사에게 그렇게 말씀합니다.
너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러분의 이웃은 여러분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남편이 됐든 아내가 됐든, 교회에서 어떤 성도가 되었던 여러분 교회에 오면 어떤 성도는요? 여러분이 잘 지냈어요. 그 한 마디에 일주일 동안 스트레가스가 풀릴 성도들이 있어요.
여러분들 여러분이 그냥 냉랭히 지나가는 것보다 집사님, 장로님 잘 지내셨어요.
그 말 한마디에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성도들도 있다고요. 옆에 있는 분들 한번 바라보세요. 그런 사랑으로 그런 이웃의 필요로 다가가는 킹스크로스 교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 여러분의 말 한마디에 여러분의 사랑의 손길에 용기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살 의욕을 가지고 살아갈 여러분들의 이웃이 있다고요. 네 나한테 갇혀버리면 나의 감정 속에 갇혀버리면, 나의 생각의 틀 속에 갇혀버리면 그 이웃이 안 보여요. 그래서 자기를 사랑해야만이 자기의 틀 속에서 자기 의식 속에서 벗어나야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본문 37절 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수녀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어요. 여기 보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수어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구절의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12장 30절과 누가복음 10장 27절은 마음, 목숨, 뜻, 힘 네 가지를 열거합니다. 그리고 구약 신명기 6장 5절에 보면 마음과 목숨과 힘 세 단어가 나옵니다.
마태가 신명기 원문을 힘 대신 뜻을 사용한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 본문은 이제 영어로 말하면 허트, 소울, 그다음에 마인드 그렇게 나오죠. 허트로 번역된 헬라어에 카르디아라고 하는 말은 원래 그 의미가 사람의 진정한 성격과 의도를 반영하는 생각, 감정 의사결정의 자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소 혹은 라이프로 번역된 프시케라고 하는 단어는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측면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감정, 욕망, 의지 등 인간 내면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우르는 인간의 본질을 가리키죠. 그리고 마인드로 번역된 디아노리아나라고 하는 단어는 합리적 사고와 도덕적 의사결정의 자리를 뜻합니다. 이런 의미는 다소 추상적이겠지만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쉽게 연결이 될 수 있을 줄로 압니다. 마음은 심장하고 연결이 됩니다. 그다음에 목숨은 몸하고 연결이 되죠.
그리고 뜻은 뇌하고 연결이 됩니다. 본문에서 자기 사랑을 전제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됨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은 자기 사랑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연결합니다.
오늘 여전도회 헌신 예배로 드리는 주일입니다. 여전도회 회원 한 분 한 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즉 자아 의식에서 벗어나서 자기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틀에서 벗어나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나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헌신할 때 하나님의 교회가 또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이 놀랍도록 역사하는 가정 교회가 될 줄로 압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