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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태: 31. 우물가의 여인. 요4:1:26
(요 4: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요 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요 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 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요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 4: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요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 4: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요 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요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요 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요 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 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 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4:1-26)
성서 속의 여인들(31) - 우물가의 여인
성서 속의 여인들 오늘은 31번째로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한 우물가의 여인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암8:11절 이하에 보시면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기갈은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임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 풍요와 쾌락으로 또 다른 삶의 맛을 즐기고 있었기에 그들은 믿음을 잊어버린 지가 오래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맛을 알아버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징계가 영적인 기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그것은 내가 잘못을 한 것 같은데 부모님께서 아무런 책망의 말씀도 아니하시면 그 자녀들은 부모님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모스때 하나님께서 주신 징계는 바로 이런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 자신의 쾌락에만 몰두해서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주신 징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목이 말라서 갈증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갈증을 경험하신 분들은 그 갈증이 그 사람에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람의 신체가 적어도 70% 정도는 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닙니까? 그러길래 우리는 계속적으로 물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은 물을 하루에 적어도 5-6컵 정도는 마셔야 한다니 우리 몸이 얼마나 많은 물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은 육신적으로 매우 목이 말라서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나온 그런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온 시간을 성경에는 제 6시라고 기록이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하여는 성경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6시는 로마식의 시간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그들의 말 처럼 이것이 로마식의 시간이라면 여기에 나타난 시간은 오후6시를 가르칩니다. 즉 저녁식사를 준비할 시간인 오후 6시입니다. 왜 이것을 사람들이 오후6시인 로마식 시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이 서신이 기록될 배경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이스라엘에 오랫동안 진행되고 있었기에 대 부분 사람들의 생각에는 이미 로마식의 생활이 익숙해 있기에 이 시간 기록도 로마식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40절에 보시면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곳에 머물기를 원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날이 저물어 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의 주장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을 하셨듯이 이 여인은 생활이 온전치 않은 부정 한 여인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그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시간인 제6시에 즉 가장 무덥다고 하는 낮 12시경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율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온전치 않았기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 하여 이렇게 사람들이 없는 그 시간을 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가능성 중에 많은 학자들의 전통적인 해석은 오전12시라는 시간이 더 정확한 해석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간적인 배경 속에 말씀을 이해하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주님께서 “행로에 곤하여”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또 완전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즉 계속되는 전도여행에 주님께서 피곤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모습 가운데 때로는 울기도 하셨고, 피곤하여 뱃머리에서 곤히 주무시는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귀한 증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주님은 오전 내내 전도여행을 하신 뒤라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이때에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십니까? 라고 그 여인이 말합니다. 그때 주님은 “내가 누구인 줄 알았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말이 그 우물은 야곱의 우물인데 자신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 사람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야곱이 우물을 팠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추측하기는 창33:18절 이하에 보시면 야곱이 세겜에 머물렀던 기록이 있는데 이때 우물을 팠지 않나 하고 추측을 해볼 뿐입니다. 본문에 이 여인은 이 우물이 매우 깊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우물의 깊이는 대략 23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랫동안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깊이라면 그 당시에는 매우 깊은 우물이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우물은 그리이스 정교회의 건물 밑에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이스 정 교회가 건물을 세울 때 이 우물 위에다 건물을 세웠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주님의 전도방법과 주님을 발견한 이 여인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발견하는 주님은 정말 한 생명도 귀하에게 여기는 탁월한 전도자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가지신 전도자로서 마음자세를 한번 살펴보면
첫째는 “인격적인 접촉”이라는 것입니다. 7절에 보시면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시는 말씀에 깜짝 놀라서 하는 말이 9절에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라고 반문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놀랍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만나지도 않고 대화도 하지 않는데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두 나라의 슬픈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나라는 원래는 한 나라였지 않습니까?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진 원래 한 나라였는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임금이 되면서 성전건축과 솔로몬의 궁궐을 건축하느라 너무나도 많은 힘이 들었던 백성들이 자신들을 좀 쉬게 해 달라고 그러면 임금으로서 더 달 섬기겠다고 하였으나 그 르호보암이 거절을 하니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0개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인 여로보암을 임금으로 세워 따로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가 바로 북 왕국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입니다.
물론 이 나라는 나라를 세운 뒤 백성들이 성전제사를 핑계로 남 왕국 유다의 땅인 예루살렘에 가서 머물게 될까 봐 벧엘과 단이라는 곳에 제단을 세우고 자신들이 스스로 제사들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엄청난 죄로 여겨서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을 앗수르라는 나라를 통하여 멸망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라는 임금이 이스라엘민족과 자신들의 나라 백성들과 결혼도 시키고 옮겨가서 살도록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순한 혈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고 대화도 하지 않고, 갈릴리 지역으로 올라가려고 해도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는 먼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감정적인 대립이 있었기에 오늘 본문 4절에서 “사마리아로 통행 하여야 하겠는지라”, 라는 말의 배경과 9절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 가지 환경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제약조건이 있었지만 그것에 매여있지 않고 그 여인에게 인격적으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어떤 어려운 경우라고 하더라도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대적자 사마리아인으로 대하신 것이 아니라 한 인격으로 접근 하셔서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두 번째는 “점진적인 주제의 발전”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물이라는 아주 간단한 주제를 통하여 결국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까지 Story를 전개 시켜가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육신이 목이 말라서 물을 길으러 나왔지만 주님은 영적인 물로 승화시켜서 말씀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이 여인이 주님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유대인들의 정결 법에는 “이방인들이 사용한 그릇은 유대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당신에게 담아서 줄 물을 담아서 줄 그릇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욱 주제를 발전시켜서 이 물은 담을 그릇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도 정확하게 모르던 이 여인이 주님께 요청하기를 자신에게도 물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을 길으러 나오는 수고를 안 해도 자신이 필요한 것을 해결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수인 구원을 받기 전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숨기고 싶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대답하길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여인의 말에 주님은 지난 날의 아픔을 들추어 냄으로 그로 하여금 더욱 은혜를 사모하게 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편이 없다는 너의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5명이나 있었으나 지금 있는 네 남편도 분명한 너의 남편이 아니니 옳도다” 라고 그 여인의 아픔을 지적합니다. 이 지적에 대하여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라는 말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결국은 이 여인이 주님을 통하여 참 믿음을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서 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대화의 주제가 물에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그리고 남편문제로 결국에는 예배의 정신까지 이어지다가 메시야로 고백하면서 그 여인은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모습도 주님을 향하여 이런 발전적인 모습이어야 한다 저는 생각합니다. 우린 처음에는 예수님으로 고백하고 주님의 사랑을 나누다가 나중에는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지 못하고 도리어 퇴보하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가질 영적인 교훈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첫째는 “내가 가진 인간적인 어떤 판단도 버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시에 있던 사회적인 관습이나 환경에 따른 생각 거기에 매여 있었다고 하면 결코 이 사마리아 여인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편견을 주님은 버리셨고, 남자와 여자라는 관습적인 조건도 주님은 버리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한 생명을 구원 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가진 낡은 생각을 버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제약조건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포용하여야 합니다. 비록 그가 나와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를 용납하고 끌어 안아야 합니다.
둘째는 예배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만나는 거룩한 경험의 자리입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엄숙하고 경건한 자리입니다. 대통령을 만나고 직장의 상사를 만나도 옷 매무새를 다시 만지고 헛기침도 하고 준비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는 엄숙하고 경건한 자리에 함께 있기를 원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믿음을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은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신령”이라는 말은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사람은 영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12:2절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신 산 제물로 드려라”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신령이라는 말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분명히 임재하시는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고전14:15절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고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찬양은 영으로 하되 또 나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하라는 것입니다. 또 “진정으로” 라는 말은 진리 안에서 또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그분의 거룩을 경험하되 자신의 감정에 의하여 움직이지 말고 말씀에 따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한 치유와 회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끊임없이 성장하여야 한다는 것 입니다. 오늘 이 여인의 신앙고백을 보면 먼저는 주님을 향해서 당신은?(9절) 이라고 하였지만 곧 그는 주님을 주여(11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9절) 결국에는 메시야, 즉 그리스도(29절)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과정을 거친 이 여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하며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정말 우리가 주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우리의 삶의 자세가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그리고 자매들에게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소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거듭남의 은혜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로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히12:2절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만이 결국에는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점점 성장하는 아름다운 축복이 주안에서 있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은 영양분 중의 영양분이고 최고의 보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방에서는 보약을 다릴 때 최고로 치는 것은 정성입니다. 그런데 이 정성의 시작은 물을 어떻게 선별하느냐? 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새벽이슬을 모은 물을 최고의 보약재로 쓰는 것도 아마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을 창조한 원료가 흙이라고 합니다.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 싱싱하고 푸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토양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고 합니다. 깊은 암석을 뚫고 나오는 물은 정말 인체에 필요한 미네럴을 함유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잠자기 전에 마시는 물 한잔은 밤사이에 있을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아침 공복에 마시는 생수 한잔은 위장기능을 강하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물의 섭취는 노화를 방지하고 피부를 탄력이 있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에게 주는 진장한 물의 근원을 성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지는 최고의 행복과 기쁨은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최고의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만 누릴 수가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여러 가지에 만족을 가지지 못하고 살던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인생목표를 가지게 된 것처럼 우리도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다시 모셔 드림으로서 진정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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