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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위덕후는 아들 3형제가 방촌태생으로 1578년 이전에 이거하여 방촌마을에 위씨 뿌리가 마련되었다고 할 것이다. 위백규선생이
1753년(영조29)에 쓴「안항 공계자서(顔巷公戒子書)」에는 안항(顔巷)은 옛 회주 서항(西巷)으로 우리 5대조 이신 판관공 위덕후께서 사신
곳이다. 공은 당동에서 태어나셔서 …(중략)…나이 40세에 제용감의 판관에 제수되셨으나 나아가지 않으시고, 자제들을 재능에 따라 가르쳐서
후일 문행과 충의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에 ‘고회주치서항(古懷州治西巷)’의 위치를 뒷받침하는 안항공 위덕후의 유서(1757년)
맨 뒷장에 방촌마을 지도가 있어 확실한 증거 를 남겼다.(출처: 관산읍지 P.707)
■방촌마을 이름의
유래 장흥도호부 치소(군청)가 수령현 관아 부근 승방촌 및 방촌에 살던 위씨들이 마을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와 사용하였다는
설이 얼른 수긍되지 않는 것은 150여년을 여러곳을 거쳐 전전하였으며 유독 방촌에 이거한 사람들만 그 이름을 사용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회주관아 터에서 50m 떨어지지 않은 바로곁에 있는 마을을
서항이라 하였듯이 회주관아 옆 바로 주위의 마을을 곁마실(방촌)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안촌이 한글음으로 안마을 즉 내동에 살고 있는 분들은
내동이 원방촌이란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은 족보기록 및 행장, 유고 등에서 편린(片鱗)으로 모은
자료이며 전하는 내용이 빈약하여 추론과 주장을 반복할 수 밖에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할 뿐이다. (출처: 관산읍지
P.709)
■마침말 1454년 이전에 관산 방촌마을이 장흥위씨 터전으로 정착되지 않았고
1640년 이후인 것 같으며, 방촌마을 일대로 이주하면서 마을이름도 그대로 옮겨와 사용하였다고 한다. 라고 했다. 그러나 위덕후 큰 아들
위정훈이 1578년에 방촌에서 태어났으니 입향한 시기는 1578년 이전이며, 방촌마을 명칭은 회주목 관아 옆 주위 마을이여서 ‘방촌’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