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육부서 말씀일기 본문은 시편 69편 34-36절인데
이미 시편 69편을 통째로 올려서
오늘은 교회전체 말씀일기 본문인 욥기 5장을 정리해서 올려 보겠습니다.
욥의 재앙을 보고 일주일을 말을 하지 못한 채 있다가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탄식을
친구들이 들었습니다.
엘리바스 같았다면 이런 상황에서 겸손하게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의 탄식과 원망소리를 듣고서는
자신의 모든 지혜와 경험으로 욥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바스의 말이 우리가 평소에 너무나 합당하다고 여기는 말들입니다.
엘리바스 자신을 보거나 욥을 보거나 간에
자신이 그동안 경험해 온 지식에 의하면
‘욥에게 이런 재앙이 일어난 것은 분명히
욥에게 무슨 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보편타당한 생각입니까!
어느 누구도 여기에 반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 안에 다 장착되어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이 바로 사탄이 하나님께 말한 내용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자랑하실 때에
사탄은 욥이 까닭 없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셨기에 욥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복을 거두어가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산과 자녀가 다 날아가고,
몸까지 전신에 병이 들고, 아내는 욕하고 사라졌지만 욥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의 친구들이 와서 욥을 공격하는 말이
사탄이 하나님께 한 말과 논리가 같습니다.
복음은 이 원리를 넘어서야만 볼 수 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음은 이 원리를 넘어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미혹하여
이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과 욥의 논쟁이 이렇게 길어지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유 없이 이런 고난이 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욥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재앙이 일어났다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런데 욥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그런 죄를 지었기에 이런 재앙이 왔다고 하는 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너희가 말하는 그런 죄를 지은 적도 없기에 이런 재앙의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욥의 이러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욥의 친구들은 계속하여 ‘생각하여 보라’고 합니다.
5:8절.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편견과 교만으로부터 나온 충고입니다.
엘리바스가 아무리 지혜가 많고 경험이 많고 초월자에 대한 체험까지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편견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최고의 진리라고 여기기에
나라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내 일을 의탁하겠다고 합니다.
5:17~21절.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
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히브리서 12:5~8절.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엘리바스가 징계가 복이라고 한 것과 히브리서의 말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엘리바스는 욥의 징계가 ‘죄로 인하여’ 온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죄를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기에 징계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무엇을 잘 못하였기에 징계가 오기도 합니다만
징계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징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들이기에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근실하게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호세아 6: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엘리바스의 말 중에 성경에 있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논리는 천상회의에게 사탄의 논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들은 이런 말에 잘 넘어갑니다.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그 원인을 알려주고
이렇게 하면 해결이 된다고 합니다.
성공하는 비결, 복 받는 비결,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죄 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인과율적인 도덕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원수노릇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들이 쉽지가 않습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하나의 사건을 해석하는 일이 정말로 쉽지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해석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든지, 다른 곳에 마음을 두려고 합니다.
때로는 금욕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도 합니다.
금식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하면 나의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설교를 많이 들었기에
교회 일을 과도하게 해 보기도 합니다.
선교단체에 소속이 되었다면 선교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쏟아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 속에는 엘리바스의 말이 들어있습니다.
엘리바스가 말한 ‘생각을 해보라’는 말은 ‘인과응보로 풀어내려고 생각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죄 없이 망하는 자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을 욥에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면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탁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욥이 고집과 오만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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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공격과 방어가 계속됩니다.
물론 욥을 공격하는 자들은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답을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답이 없는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보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죄 없이 저주 받아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믿는 것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엘리바스와 그의 친구들이 욥에게 공격하는 수많은 질문들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러한 질문들을 받을 때에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인지 알고 믿게 되는 자가
인과율을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긍휼이 임한 자들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를 맛보며, 승리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까닭없는 은혜를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까닭없는 고난도 또한 능히 이겨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