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11년 ~1913년 - 청나라 멸망,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의 임시정부가 난징에 세워졌다. 쑨원은 12월 29일 중화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912년 1월 1일에 취임하며 중화민국 원년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쑨원은 혁명의 성공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진압군의 지도자 원세개와 협상을 통하여 2월12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시키고 본인은 13일에 총통 직에서 물러나고 3월10일에 원세개가 신정부 2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해혁명 과정에서 독립을 선포한 각성의 핵심세력은 대체로 지방 인사로 구성되었고 성의 자립과 자치를 강하게 주장하였으므로 원세개도 집권초기에는 각 지방 세력의 자치요구를 수용하여 연성자치를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설립의 소식은 나라를 잃은 조선 간민들에게 자치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
북간도와 용정은 한일합방으로 다양한 조선 이주민들이 폭주하였다. 1911년에는 북간도의 조선인 인구는 12만 6천여 명이었다.
5월에 용정에 대화재가 나서❰용정 일본총영사관❱을 비롯하여 시가지가 불에 탔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기화로 구제의 명분으로 ❰용정구제회❱를 세우고 구제와 복구의 명목으로 돈을 대여하며 고리대를 놓았다.❰간도구제회❱는 용정시 문화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 간민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의 통치권 싸움이 일어나서 조선간민들은 이중을 고난을 겪었다. 일본은 조선간민이 비록 청나라에 입적하였어도 1910년에 일본과 조선이 합병하여 하나가 되었으므로 조선인은 일본신민이라고 주장하며 영사재판권을 행세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토지 소유권을 지키고 친일파가 되지 않으려고 청에 귀화입적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간민들은 일본과 청나라의 회유와 협박,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나라 잃은 백성의 고난과 고통을 고스란히 받았다.
3월, 서일과 현천묵, 박찬익, 계화가 왕청현 덕원리에 ❰중광단❱을 세웠다. 단군숭배로 민족주의를 고취하며 항일의식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였다.
안도현 만간구에서 홍범도 주도하에 항일의병들이 중심이 되어❰친목회❱를 결성하고 둔전형식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고난의 세월 속에서 조선인들은 교육을 희망으로 붙잡았다.
1911년에 훈춘에❮동창소학교❱, 하마탕에❮예수교학교(보진학교)❱, 연길에❮길동학당 부속학교, 여자 야간부 보통반과 고급반❱, 왕청현에 덕원리❮명동학교❱, ❮원동학교❱, ❮고소학당❱, 와룡촌에❮창동(昌東)학교❱, 용정에❰영신학교❱가 세워졌다.
교회는 김계안 조사의 정기적인 순회와 그리어슨과 푸트 선교사 등의 특별 순회 그리고 서울에서 결성된 100만 명 전도대의 영향으로 조직된 ❰삼국전도회❱에 참여한 선교사들과 조사들의 노력으로 북간도에 십여 개의 교회가 순식간에 세워졌다.
1911년 2월, 이동휘 조사는 성진의 ❮삼국전도회❯의 후원으로 북간도일대에서 한 달 정도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명동교회에서 집회하는 중에 정재면, 김약연 김하규, 박태환 등이 만든 ❮길동기독전도대❯를 ❮삼국전도회❯로 이름으로 바꾸게 하였다.
1911년에는 14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2백 명의 집단 이주로 세워진 서성의 ❮장은평교회❱,❮장백현교회❱,❮적안평교회❱,❮국자가교회❱,❮정동교회❱,❮화룡현교회❱,❮은포교회❱,❮간장암교회❱,❮두도구교회❱,❮신풍교회❱,❮일송정교회❱,❮금당촌교회❱,❮탕동교회❱,❮마적달교회❱ 등이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교회에서 울며 기도하고 출애굽기를 읽으며 나라를 되찾을 꿈을 꾸었고 주님 오심을 대망하며 위로를 받았다.
1912년, 청나라는 3월 12일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정식으로 중화민국 시대가 되었다.
조선 간민들은 청 말기에 시도된 지방자치제와 중화민국에서 실시한 연성자치제로 자치에 대한 일말의 꿈을 꾸게 되었고 북간도의 조선인들, 특히 캐나다장로회 교우들은 캐나다장로회의❰용정선교부❱설치에 대한 결정으로 엄청난 힘을 받았다.
조선어 학습을 마치고 회령선교부에 상주하기로 한 박걸(A. H. Barker) 선교사가 용정에 선교부를 열고 상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박걸 선교사와 같은 지역 소속의 맥도널드 선교사 부부가 성진에 도착하자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서부지역에서 온 선교사들에게 함경북도 북쪽지역의 8개 도시와 북간도와 훈춘지역을 선교지로 분할해주었다. 이때 이미 북간도에는 40여 개의 캐나다장로회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다. 박걸 선교사는 선교부 결정을 따라 1913년 4월에 북간도에 선교부를 열기로 결정하고 가을에 캐나다교회 선교부 대표인 맥퍼슨 스코트 목사, 맥도날드 선교사, 로브 선교사와 함께 북간도 방문하여 선교지부를 용정에 열 것을 확정하였다. 당시 용정에 상주하고 있는 김계안 조사는 캐나다 선교사들과 김영제 목사의 순회를 도우며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을 영적으로 고무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1912년부터 간민교육회는 민족 교육에 맞는 교재를 만들기 위하여 광성학교의 계봉우, 명동학교의 정성면, 창동학교의 남공선을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임명하여 초등•중등 교과서 수집과 편찬에 노력하였다. 간민교육회가 편찬하고 보급한 역사교과서에는 ❰대한역사❱,❰유년필독❱❰ 대동역사략❱,❰월남망국사❱등이 있다. 간민교육회는 산하에 연구회를 설치하여 중국지방정부의 조선인교육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간민모범학당 내에 농림학교 소학당을 부설하였고 임시교원양성소를 설치하였으며 월보를 발행하여 간민들의 소식을 나누었다. 간민교육회는 조선인들의 법적 권리 옹호를 위하여 중국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중재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의병출신 조상갑과 강을남 등이 왕청현 백초구에 ❰급당❱을 세워 무장투쟁을 위하여 회원모집, 군자금 모연, 군수품 운송 등을 하며 국내진공을 준비하였다.
김태일, 장문경, 오만석 등이 화룡현 덕신사에서 본부를 두고❰민권당❱을 세워 무장투쟁을 하고자 준비하였다. 목적이 ❰급당❱과 동일하여 급당의 분회라고 하였다.
김천보, 이동춘, 김익근, 김문호 등이 왕청현 나자구에 ❰농상회❱를 세워 회원 300여 명과 함께 반일흥한(反日興韓)을 주장하며 민족독립을 위하여 농업과 상업 등의 산업을 진흥시키는 운동을 벌였다.
김학천과 황병길은 훈춘현 성에 본부를 둔❰훈춘상무회❱를 세워 훈춘시의 시민과 상인들을 항일투쟁의 길로 궐기시켰다.
1912년에 세워진 학교는 왕청현에❰신성학교❱,❰북대동학교❱,❰태흥학교❱,이용익 후원의❰ 동성의숙❱, 유교 공교회의❰동흥학교❱ 등 5개이고 연길현에❰길신여학교❱,❰창동학원여학부❱,❰구사평학교❱등 3개이고 화룡현에는❰화룡현립제3학교❱와 대종교에서 세운❰청일학교❱,❰ 동일학교❱가 있다. 용정역 부근에 세워진❰광동의숙❱이 용정시교회 산하의❰영신학교❱가 되었다.
1912년에 세워진 교회는 연길현에 세워진 ❰구사평교회❱ ,❰남양동교회 ❱,❰의란골교회❱3개다.
1913년, 캐나다장로교회 용정스테이션이 설립되었다.
영국더기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에 세워진 용정선교본부는 독립에 뜻을 둔 조선인들의 만남과 소통의 집결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일본인들과 중국인의 공식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그곳은 이내 조선인들의 최고의 결집 장소이자 최상의 미팅 장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밀 모임과 연락처가 되었다.
중화민국의 탄생과 연성자치의 사회 분위기는 조선 간민들에게 조선인자치의 절호의 기회를 조성하여주었다. 간민교육회 지도자들은 4월 26일 국자가에서❰간민회❱ 성립대회를 열었다. 간민회는 총회본부를 국자가에 설치하고 연길, 화룡, 왕청에 분회를 설치하였다. 간민회는 곧 바로 15만 명의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북간도의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지방 조직을 체계화시켰다. 동시에 조선인들의 토지 소유권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토지 매매에 직접 관여하려 하였으나 관찰사서의 반대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간민회는 창가(唱歌)교육을 중시하여 창가집을 발행하였으며 체육교육을 중시하여 체육대회를 열었다. 1913년 단오절에 용정의 합성리에서❰연변학생연합대운동회❱를 열었다. 이는 조선 간민들이 간도로 이주한 이래로 처음 있는 연합행사이지 군중집회였다. 1박 2일로 진행된 운동회에 근원각지에서 1,500여 명이 참여하였다. 폐회식을 마친 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용정 시가지를 돌면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규탄하는 항일시위를 하였다. 춘계운동회에 간도지역 교육과 간민사회가 탄력을 받자 간민회는 가을운동회도 기획하여 실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간민회의 자치활동들이 간도지역의 기존세력인 유림들의 강한 반발을 자아냈다.❰간민회❱가 주장하는 민주공화정치와 신문화교육이 유림들이 가지고 있는 중화(中華)사상과 서당교육을 궁지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유림들은 6월에❰농무계❱를 조직하여 간민회와 대항하였으며❰공교회연길지회❱와 ❰동변민족협회❱를 설립하여 공개적으로 간민회 세력을 비난하며 공격하였다. 관찰사서는 농무계와 간민회의 대립에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농무계는 공교회 회원인 정안립이 간민회 회원들에게 구타를 당한 일에 연명으로 관찰사에게 이동춘, 김립, 도성의 죄악을 성토하며 엄벌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또한 연길, 화룡, 왕청의 농무계 대표들이 간민회의 죄악 7가지를 열거한 진정서를 연길현의지사에게 제출하였다. 1914년 농무계는 국자가 서쪽 상발원에서 600 여 명의 회원들과 함께 국자가 연길현 행정공서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연길현 지사에게 청원서를 올려 간민회의 회비 징수를 금지하게 하였다.
이에 맞서 간민회는❰건백안❱을 올려 회비 징수를 허락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농무계❱와 ❰간민회❱의 대립은 해를 넘겼다.
국자가 신시장에서❰학우회❱가 결성되었다.
❰기독교교우회❱가 훈춘현성에 본부를 두고 설립되었다. 회장은 황병길이고 백삼규, 오병묵이 함께 하였다. 교우회는 훈춘지역의 기독교 신자들을 항일 민족운동으로 집결시켰으며 훈춘현 북부와 서부 지구에서 급속히 발전하였다. 이는 1919년에 결성되는❰훈춘한민회❱의 기초가 되었다.
❰둔전영❱이 훈춘현성에 본부를 두고 발족하였다. 총리는 박상규, 부총리는 이춘식 이었다. 그들은 훈춘현 순경국장 왕결청, 육군 훈춘영대장 왕모, 길림참모부원 두보천 등과 연계하여 조•중 항일투사들의 연합과 항일투쟁 공동전선을 결성할 것을 제창하였다.
❰사우계❱는 연길현 동성용 소허문에 본부를 두었고 주요 간부는 김정규, 지장회, 강수희, 정재열, 현원극 이었다. 사우계는 민족의식을 고창하는 일에 앞장을 섰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는 처음에 용정가 성경서원 뒷마당의 초가집에 설치하였으나 1913년 현재 동산로 앞에서 시작되는 영국더기 동산 언덕에 26에이커(3만 2천평)의 땅을 매입하여 두 개의 주택과 선교스테이션의 본부의 건물을 지어서 6월 6일에 입주하였다. 캐나다장로회 연합선교위원회가 프록터 목사 부부, 스미스 양, 맥에른 양, 커크 양, 맥퍼레인 양을 파송하였다. 용정선교스테이션은 교육과 신앙집회, 의료봉사로 활기가 넘쳤으며 북간도 교회들과 크리스천들 그리고 독립투사들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간도 지도자들이 세계 뉴스를 듣는 장소이며 북간도 소식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가 되었다.
1913년 원산에서 소집된 제3회 함경장로회의에서 선교사 박걸은 삼국전도회의 요청에 따라 김내범을 북간도 순회목사로 받아들였다. 그는 9월 15일에 연변에 도착하여 연변지방의 최초 목사로서 시무를 시작하였다. 용정중앙교회(용정시교회)에서는 김내범 목사를 청하여 제1차 당회를 열고 김계안 조사를 제1임장로로 선임하여 안수하고 강두화를 조사로 박례헌을 목사로 정하였다.
2월과 3월 사이에 구례선 선교사의 보호 아래 이동휘 조사가 북간도로 들어왔다. 그는 캐나다장로회 교회를 순방하여 부흥회를 이끌며 신앙과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을 호소하였다.
1913년에 설립된 학교는 총 8개로 왕청현 천도교의❰중동학교 ❱,대종교의❰명동학교❱, 용정 캐나다장로회의❰명신여학교, 6월 4일 캐나다 선교사 박걸 부인 레베카가 상정여학교를 흡수하여 재정비함)❱와 화룡현의 ❰동야학교❱,화룡현 캐나다장로회의❰목흥학교❱, 박기평과 김성운이 주도한❰신흥서당❱, 왕청현의 배초구학교와 밀산에 세워진❰한흥의숙❱과 캐나다선교부가 용정에 세운❰성경학원❱ 이다.
1913년에 세워진 교회는 ❰하마탕교회❱,❰구세동교회❱,❰광제촌교회❱, ❰명신동교회❱와 정재면 목사와 명동교회 여전도회가❰수처에 세운 미확인된 교회들❱ 이다.
5부로 계속
2026년 3월 1일 축시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