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욘 포세(Jon Fosse, 1959- ) |
국가 |
노르웨이 |
분야 |
희곡 |
해설자 |
정민영(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교수) |
오랫동안 집을 나가 있었던 딸이 갑자기 만삭의 몸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전 그대로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잡담을 즐기고 다리의 통증 때문에 괴롭다. 아버지는 늘 같은 시간에 끔찍하게 피곤한 모습으로 퇴근한다. 여동생은 여전히 저 아래 노점에 가 시간을 보낸다. 물건들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견고한 틀처럼 전혀 변화가 없던 이 집에 돌아온 딸, 베아테의 뒤를 따라 낯선 청년이 찾아온다. 베아테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인 그의 출현은 마치 이 집의 견고한 틀을 부수고 들어온 침입과 같다. 가출했던 딸이 임신을 해서 돌아오고, 뒤를 이어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인 딸의 남자 친구가 찾아온 그날 저녁의 몇 시간, <이름>은 한 가정의 이 짧은 저녁 한때의 풍경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것 이외에 특별한 사건은 아무것도 없다.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인물들 사이의 소통 부재다. 이 집의 세 딸 중 한 명은 여전히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어머니는 오랜만에 집 나간 딸에게서 카드를 받았으면서도 식구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부모는 오랜만에 돌아온 베아테가 임신을 했음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막내딸은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그저 현재, 자신의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 늘 피곤한 아버지와 다리 통증에 시달리는 어머니는 저녁이 되어서야 한 공간에 있게 되지만 항상 각자의 공간에 존재한다. 이들 간에는 어떠한 시선의 교류도 없으며 가족이라면 있어야 할 사랑의 몸짓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베아테에 대한 유일한 사랑 표현은 몇 장의 지폐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는 삭막한 행위뿐이다. 베아테는 아버지의 이 행위에 당혹스러워한다. 이 집을 찾아온 베아테의 남자 친구에게도 베아테의 부모는 큰 관심이 없다. 부모는 이 청년에게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형식적인 겉치레 말이 전부다. 여동생에게 갑자기 나타난 언니와 언니의 남자 친구는 무료한 일상에 잠시 나타난 단순한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 또한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보다는 소통 부재의 상황을 한 가지 더 만들어낼 뿐이다. 그는 이 집에 들어와서도 마치 늘 그래 왔다는 듯이 책만 들여다본다. 타인의 공간에 침입하듯 들어와 오히려 그 공간에 또 하나의 벽을 만들고 있는 그의 행위와 그 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전혀 변화가 없는 베아테 식구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베아테와 남자 친구는 곧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짓지만 합의를 보는 데 실패한다. 남자 친구는 아기의 이름을 짓는 데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태어날 아기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긴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관계를 맺어야 할 부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살아갈 장소에 대해 아기들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인간의 관계 맺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어려움에 부딪친다. 예전에 베아테의 남자 친구였던 비아르네가 찾아온다. 베아테와 비아르네의 관계 역시 잠시 스쳐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이들 인물 사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남자 친구, 그리고 예전의 남자 친구 모두 베아테를 남겨두고 떠난다. 베아테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떠나고 난 후 “그 자리에 서서 어둠을 바라보는” 일뿐이다.
<기타맨>은 중년의 거리 악사가 들려주는 남성 모놀로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거리의 음악가는 수년 전부터 매일 같은 지하도에서 동전을 얻기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은 그의 곁을 지나가지만, 그의 노래를 관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한 여자를 사랑해서 이 도시에 왔고 아들 때문에 이 도시에 남았다. 그러나 사랑했던 여자와의 관계는 지속되지 못했고, 아들은 아버지를 부끄러워한다. 그는 평범한 도시의 삶 끝자락에 서 있는 외톨이로 자신의 삶 이야기, 그리고 지하도에서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기타를 가진 한 남자”일 뿐이고, “실패한 발명품”이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의 언어”로 살아간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고 지하도에서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를 지나치듯 모든 것은 그를 지나쳐 간다. 어느 날 아내를 화장하고 돌아온 남자가 그에게 다가와 돈을 준다. 아내의 죽음은 그 남자에게 중요한 관계의 단절이며 거리의 악사는 그 남자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모습을 본다. 삶은 관계의 끊어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과 같다. 그는 자신의 삶과 함께했던 기타 줄을 끊는다. 끊어진 기타 줄은 마치 우리 삶에서 단절된 수많은 관계처럼 흔들거린다. 그는 기도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절 자유롭게 하소서
절 그렇게 만들어주소서
예전의 제 모습으로 그렇게
무엇인가로 충만한 비어 있음, 그 모습으로
절
비어 있게 하소서”
그에게 진정한 자유는 “비어 있음”일지도 모른다. 그 비어 있음은 그에게 충만함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관계도 끊고자 한다. 자기 삶의 동반자였던 기타의 줄을 끊고 기타와 이별하며 동전을 받던 기타 케이스도 함께 남겨두고 그는 떠난다. 그는 노래하기를 그치고 연주하기를 멈춘다. 그의 뒤에 남아 있는 것은 그가 마시고 난 빈 맥주잔이 덩그러니 놓인 아무도 없는 바(bar)다. 빈 맥주잔만 놓인 빈 바처럼 우리가 삶에서 바라보고 있는 곳은 모두가 떠난 빈 공간일지도 모른다.
<이름>과 <기타맨>은 욘 포세의 전형적인 글쓰기 방식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우리 삶의 주변에서 항상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다. 대부분 이름이 없고 특별한 성격이 없는 단순한 인물들이다.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상의 갈등과 평범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정신적 번민이 겉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포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정체성이 분명한 특별한 인간의 유형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마치 현미경을 통해 포착한 듯 사람들의 관계는 세밀하게 그려진다. 포세는 말한다. “삶을 조종하는 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들이다.” 그러나 포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관계의 불가능성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 단절의 깊이는 어쩌면 포세가 보고 있는 것만큼 클지도 모른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단지 그 깊이를 피상적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며 실제로 진지하게 그 깊은 공간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름>에 등장하는 베아테가 남자 친구에게 반복하는 대사, “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거지”, “넌 내가 얘기할 때 잘 듣는 적이 없어”는 우리 또한 일상에서 늘 반복하는 말이지만 그 단절의 깊이가 얼마나 큰지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타맨이 말하는 비어 있음의 충만 또는 충만한 비어 있음 또한 관계와 소통의 단절이 만들어낸 한 가지 인생관으로 보인다. 그가 말하는 충만한 비어 있음, 그 비어 있음에 대한 희구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득하다. 완벽한 상실의 느낌, 무엇인가 제대로 된 것, 진정한 것을 말할 수 없는 관계가 지배한다는 것, 이는 분명 우리가 안고 있는 비극성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존재의 본질과 그 한계 사이에서 우리는 번민한다.
포세는 이 같은 우리 삶의 현실을 철저하게 압축되고 생략된 언어로 옮긴다. 반복과 축약 가운데 수많은 침묵, 사이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언어 자체로 본다면 <기타맨>은 한 편의 시극이다. 읽는 호흡에 따라 포세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공간은 변화한다. 포세의 언어는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그의 언어는 끊임없이 숨긴다. 포세의 텍스트가 담고 있는 언어는 그 인물들의 관계가 소통의 불가능을 보여주듯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어느 면에서 인물들은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보다는 단지 자신이 거기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말을 하는 듯 보인다.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 그 신호 뒤에 수많은 의미가 숨어 있다. 그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독자, 관객, 연출자, 배우들의 몫이다. 때문에 포세의 언어는 침묵과 사이, 그리고 중단의 공간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동안 우리의 연극에서 언어가 사라졌다면 포세의 희곡은 연극이 결국은 언어의 예술일 수밖에 없으며 언어로 되돌아가야 함을 증명한다. 언어는 사유 자체이며 생각의 힘은 연극의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