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2시, 1호선 서울시청역(종각역 방향) 10-4 승강장. 2호선으로 이어지는 환승구역에 편의점에서 사용할 법한 빨간 테이블을 놓고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들 손에 들린 자그마한 노란 깃발에는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들은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가 죽었다’는 소식에 연대를 온 경기도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70여 명의 노동자들은 “씨! 알! 피! 디!(UNCRPD,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지칭) 아! 시! 나! 요!”를 한 글자씩 또박또박 외치며 장애인의 권리를 이야기했다.
“여러분들은 경기도에 있기 때문에 아직 안 죽었어요. 여러분들은 팔팔합니다. 그런데 서울형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죽었어요. 죽었으니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 서울시가 ‘권익옹호활동 직무 삭제’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12일부터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부활할 때까지 무기한 장례투쟁을 할 겁니다. 서울 동료들을 버리지 말아 주세요. 같이 삽시다. 어때요?”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의 말에 사람들이 “투쟁!”이라고 답했다.
‘서울형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서 권익옹호 직무가 삭제되고 ‘서비스업 보조’가 신설됐다. 권익옹호 직무를 ‘장애인의 집회, 시위 참여’로 바라보며 언짢게 여기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이 직무를 끝내 없애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전장연은 6일 오후 2시 서울시청역 승강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권리’가 빠진 ‘서울형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서울형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는 참여하지 못했다. 지난 1일부터 서울시가 허용한 직무 외 활동에 참여할 경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는 해고될 수 있다고 엄포했기 때문이다.
2020년 7월, 서울시에서 시작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가장 노동능력이 없다’고 평가받는 최중증장애인을 국가와 지자체가 우선 고용해 일자리를 제공해 왔다.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최근 3년 이내에 지역사회로 탈시설한 최중증장애인이 고용 1순위다.
이들은 3대 직무(권익옹호활동, 문화예술활동, 인식개선활동)를 통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아래 협약)을 홍보하며, 장애인 권리를 모니터링하는 활동을 한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가 ‘장애인 인식개선을 위해 국가와 지자체가 노력해야 한다’고 한 권고를 이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권익옹호활동에 기자회견, 집회·시위, 거리 캠페인 등이 포함된다. 최중증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정부와 지자체에 협약 준수를 요구하며 지역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것, 장애 당사자가 장애인 권리를 외치는 것 자체가 권익옹호활동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최중증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 즉 ‘맞춤형’ 직무를 제공한다. 장애계는 이를 자본의 이윤을 창출하는 대신 ‘장애인의 권리를 생산해 내는 노동’이라 칭했고, 장애 당사자들도 ‘세상을 바꾸는 노동을 한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직무를 수행해 왔다. 실제 이러한 의미를 인정받아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경기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강원도 등으로 확산됐다.
서울시도 2022년까지 이를 ‘노동’이라 인정했다. 하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임하고 정권이 바뀌면서, 서울시는 더는 ‘노동이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공격은 지난 3월 초부터 시작됐다. 서울시 장애인자립지원과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현장실사를 진행한다며 전국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협회(아래 전권협) 소속 14개 단체에 최근 3년간 자료를 닷새 내에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조사에서 서울시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지도점검표 직무 유형에서 노동자들의 시위 참여 횟수와 비율만 따로 조사했다. 당시 비마이너 취재에 따르면 서울시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입장이었다.
하태경 국민의힘 국회의원(시민단체 선진화 특별위원회 위원장)도 가세했다. 하 의원은 “전장연이 불법·폭력 시위에 중증장애인을 강제 동원했다”, “서울시 보조금을 유용해 시위 참여에 대한 일당을 지급했다”라며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대한 허위 사실을 퍼뜨리며 전장연을 공격했다.
- “7월 1일부터 시위·집회 참여 시, 참여 중단 조치할 것”
통보는 지난 6월 29일 이뤄졌다. 서울시는 “일자리 참여자의 직무에서 시위·집회·캠페인 활동을 제외하여 시행”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수행기관에 뿌렸다. “집회신고 여부 불문”하고 “선전전, 촉구·결의·투쟁대회 및 기자회견, 가두행진 등과 유사한 행위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한 “참여자가 근로시간 중 허용되지 않는 직무 활동에 참여한 경우 참여 중단 절차에 따라 참여 중단 조치”를 할 예정이며, “참여자가 근로시간 중 허용되지 않는 직무 활동에 참여한 것이 수행기관 귀책인 경우, 수행기관 보조금 교부 취소 및 협약 해지 가능”성도 있음을 경고했다.
서울시는 7월 1일부터 바로 변경된 직무를 시행했다. 현재 직무는 △서비스업 보조(체육시설 보조, 병원·검진센터 보조, 도서관 사서 보조) △장애 친화적 환경 조성(온라인 콘텐츠 모니터링, 장애인 편의시설 모니터링) △장애인식 개선 및 문화예술 활동(장애인 인식개선 보조 강사, 문화예술 활동)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가장 큰 변화는 권익옹호 활동이 사라지고 ‘서비스업 보조’가 추가된 부분이다. 서비스업 보조는 체육시설, 병원 등에서 고객들을 안내하는 일을 한다.
업무 변경에는 두 가지 문제가 지적된다. 우선 권리중심공공일자리 취지를 훼손한다는 것과 서울시가 신설한 서비스업 보조는 이미 보건복지부 장애인 일자리에 존재하는 직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 참여하는 이들은 보건복지부 장애인 일자리에서 한 차례 밀려난 최중증장애인이기 때문이다. 기존 장애인 일자리를 수행할 수 없는 이들이 참여하는 일자리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인데, 이들이 할 수 없는 일자리를 대체 직무로 제시한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날 전장연은 “더는 협약에 기반한 권리와 그 권고를 이행했던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본래 의미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면서 “서울형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더 이상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칼질당해 중증장애인 노동자는 다시 길바닥에 주저앉게 될 운명에 처했다”고 규탄했다.
우정규 전권협 활동가는 “서울시가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서비스업 보조로 전락시켰다”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는데 이제 서울시는 그 발버둥도 치지 말라고 한다. 2023년 7월 1일부터 중증장애인 맞춤형 직무인 ‘권익옹호’가 없어졌기에 이 일자리의 존재 이유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정혜란 한국장애포럼 활동가는 지난 8월 위원회가 한국정부에 한 권고를 이야기하며, 협약 이행을 수행하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훼손한 서울시의 행태를 지적했다. 위원회는 한국정부에 장애인단체와의 긴밀한 협력과 참여를 통해 장애인 인식을 제고하고 장애인 편견에 대항하는 국가 전략을 채택할 것, 정부와 언론·시민 등을 대상으로 장애인 권리 교육과 인식 제고를 실시할 것 등을 권고한 바 있다.
정 활동가는 “권고에 따르면 협약을 비준한 한국정부는 협약의 가치를 알리고 실천을 촉진하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이 더욱 확산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 주체”라면서 “정부와 서울시의 행태는 전 세계인들이 오랜 고민과 논의 끝에 만들어 낸 세계적인 인권의 가치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규탄했다.
장애인 당사자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과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로 일한 적 있는 최진영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중증장애인은 밖에 나가 활동하는 것 자체가 노동이자 변혁이다. 중증장애인도 저마다 잘하는 일이 있는데 왜 우리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시설에 갇혀 몇십 년 동안 갇혀 살아야 하나”라면서 “그렇게 많은 시간 싸워왔는데 여전히 정부는 장애인을 냉대한다. 장애인도 시민이다. 우리도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경기도 권리중심공공일자리에서 일하는 엄소현 씨도 “장애인들 무시하지 말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라. 차별하지 말라”고 외쳤다.
전장연은 오는 11일까지 서울시에 ‘권익옹호 직무 삭제’ 결정을 철회할 것을 요구할 예정이다. 이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다면, 12일부터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서울형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부활’을 촉구하는 분향소를 설치하고 무기한 장례투쟁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