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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의4
제4강 아들과 천사 (제1장 4절 — 제2장 4절)
4. 천사들보다도 더 좋은 이름을 계승하여 얻으신 것같이 그와 같이 그들보다도 더욱 승하신 이가 되었다.
5. 왜 그러냐 하면, 어느 때 어느 천사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다시
“나는 그에게 아비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던가.
6. 그보다도 맏아들을 이끌어 다시 세상에 들어오게 하실 때에는 말씀 하시기를
“또 하나님의 모든 천사는 그에게 경배하라” 하셨다.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이는 그 천사들을 바람으로 만드시며 그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하신다” 하셨으되,
8. 아들에 관하여는
“당신의 보좌는 영원히 하나님이시요, 또 그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입니다.
9. 당신이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당신의 모든 동류보다 이상(以上)이 되게 즐거움의 기름으로 부으셨습니다” 하셨고,
10. 또
“주여, 당신이 태초부터 땅의 터를 놓으셨고, 하늘들은 당신 손의 지으신 바옵니다.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당신은 영존하실 것입니다. 또 모든 것이 옷처럼 낡아질 것이니
12. 당신이 주의(周衣)처럼 맡으실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터이나 당신은 그대로 계시고, 당신 연대가 다함이 없을 것입니다” 하셨다.
13. 그러나 천사들에게야 어느 때 누구를 보시고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할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았으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던가.
14. 그것들은 다 구원을 얻을 후사(後嗣)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부리는 영들이 아닌가.
2장 1. 그런고로 우리가 들은 바에 더욱더 긴절(緊切)한 주의를 하여 혹 흘러지나가버리는 일이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그것은 만일 천사들로 말씀하신 말씀도 견고한 것이 되어서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정한 갚음을 받았다면,
3.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면, 어떻게 피할 수가 있을까. 이것은 처음에 주님에 의하여 말씀되었고 들은 자들에 의하여 우리게 확실한 것이 되었고
4. 하나님으로부터도 표적과 기사(奇事)와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 뜻대로 성령을 나누어주신 것으로써 함께 증거하시는 바가 된 것이다.
전강(前講)에서 본 첫머리 3절에서 저자가 목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리자는 것이다. 그는 그것으로써, 연약(軟弱)해진 영혼 앞에 놀라 깨는 일대 문제를 내놓으려 하였다. 아마 유혹과 피곤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던 저들이라도 그가 손가락질하는 그 영원의 철주 — 하나님의 유일 완전한 계시자로, 만물의 지지자로, 구원의 근원이신 산 그리스도, 하늘과 땅을 연락하는 그 영원의 철주를 바라보고 영혼 위에 일어나는 일대 진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경탄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그 기둥을 올라가는 것이었다. 진리에 놀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생활하는 것이 필요한 일이다. 고로 4절 이하에서 그는 깨달음이 둔해진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데서부터 순서를 밟아 설명하고 증명하고 권면한다. 본단에서 그는 우선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위대하시다는 것으로써 시작한다. 그리하여 장차 말하려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절대 신종(信從)하고 완전한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라는 주장의 제(第)첫째 근거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분명한 것을 말하여 한다.
1. 좋은 이름
4절은 문법으로 하면 3절에 붙는 말이다. 거기서 아들의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삼격을 말하였는고로, 그 어떻게 위대하신 것을 형용하기 위하여 천사보다도 높으시다고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뜻으로 하면 그것만이 아니요 분명히 그 아래 하려는 말의 시작이다. 천사를 끌어온 것은 단(單)히 인간보다도 더 뛰어난 자라하는 의미에서만 아니다. 장차 올 세계에 대한 이 세계의 대표자로 한 말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조금 알기 어려운 말이나 당시 유대인의 사정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일반 신앙으로 하면 율법은 천사의 손에서 받은 것이었다.(제2장 2절; 갈라디아, 제3장 19절; 사도행전, 제7장 53절 참조) 따라서 그 율법을 생활원리로 하는 이 세계는 그 천사들의 지배 하(下)에 있는 것이었다. 고로 처음부터 두세계의 대립을 마음가운데 두고 말하는 저자가 천사를 내세워 그리스도와 비할 때는 그러한 목적으로 한 것이다. 아들과 천사의 비교는, 그러기 때문에 두 격의 우열(優劣)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율법의 비교요, 다시 더 나가 낡아진 세계와 장차 오는 세계의 비교다. 저자의 생각에 복음은 우주적 사건이요 신앙은 우주사적 행동이다. 그리스도는 어찌하여 천사보다 승하시냐. 첫째로 더 좋은 이름을 계승(繼承)하여 얻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아들이라 하셨다. 율법은 천사에게서 받았다 하나 그 율법은 도리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 아들”이라 부르는 한 인격이 올 것을 말하였다.「시편」제 2편의 작자가
“너는 내 아들이라”
고 할 때 직접으로는 유대의 열왕중의 어떤 누구를 가리킨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또 인간 중에 아무도, 그 명칭에 합당치 않은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다.
“나는 그에게 아비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한「사무엘」하 제7장 40절의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천사를 두고 한 말이냐 하면 아니다. 그러면 이는 역사상에 장차 올 어떤이를 두고 미리 한 말이요, 당시에 이 말을 받았던 자들은 그 한개(個)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떤이는 누구냐. 나사렛 예수가 아닌가, 하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가 “천사보다 승하시다” 하지 않고 “승하신 이가 되었다” 하며, “더 좋은 이름을 가지셨다” 하지 않고 “계승하여 얻으셨다”고 한 것은 수육(受肉)의 그리스도 예수를 두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구약 중에 예언 하여 약속되어 있던 아름다운 이름, ‘아들’이라는 칭호(稱號)를 얻으셨다. 과연 그는 장차 올 세계를 위하여 맏아들이 되시었다. 그리고 그가 자기의 나라를 완전히 이루어, 믿음으로 인하여 나는 뭇아들을 모으려 세상에 재림하시는 때를 예언시켜, 그때는 모든 천사가 예배하라고 하시었다. 거기 따라 하나는 실(實)된 세계요, 하나는 예표(豫表)의 세계요 그림자의 세계인 것이 판명된다.
2. 둘의 지위
그러기 때문에 천사는 이 물질적으로 구조되어 있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한 큰 세력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나, 그 이상은 아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아들로 모든 것을 유업으로 얻은 그이에 대해서는 사역하는 바람이요 불꽃이다. 아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영원의 왕자다. 하나님의 영원불변이신 대로 그 나라는 영원부동이다. 그것은 그 나라는 물질적 능력 같은 것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요, 도의를 기초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평의 나라요 의의 나라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에 뛰어나시는 이다. 하나님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여 즐거움의 기름으로 부으시어 영원한 왕의 자리에 앉게 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
3. 있는 것과 장차 올 것
아들이 다스리는 그 나라는 장차 오는 것이요 있는 이 세계는 아니다. 이 세계도 위대하지 않은 것 아니나, 그는 다만 그의 손의 소작(所作)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영원히 있을 운명을 가진 것도 아니다. 낡은 옷을 버리고 새 것을 갈아입듯이 그는 이 세계를 폐하시고 보다 완전한 것을 지으실 것이다. 짓는 자가 지음을 받은 물건보다 위대하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영원하신 자만이 시간적인 존재를 낳을 수가 있고, 지나 갈 것이 지나간 후에 오는 것이야말로 실(實)된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향하여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할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았으라”
하신 것은 그 나라가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영원한 나라가 오는 데 절대 필요한 조건은 인간의 구원이다. 우주 역사의 모든 사건은 다가 오을 중축(中軸)으로 삼아 돌아간다. 그리스도와 천사의 지위는 여기 따라 판연(判然)해진다. 저는 구원의 주장(主掌)이시요주 역사그것을 위해 심부름하는 자다. 천사숭배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무지요,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4. 천사적인 것과 아들적인 것
천사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오늘 우리게는 천사와 아들의 비교론은 그리 큰 교훈을 주지 않는 듯이도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고 모세에게 율법을 전해주었던 천사에는 우리 흥미가 끌리지 않을는지 모르나 천사적인 것을 구하는 마음은 오늘날 사람에게도 의연히 있다. 이는 인간에 유전적으로 들어 있는 한 버릇이다. 천사란 무엇인가. 주에게 부리는 바 되는 바람이요 불꽃 아닌가. 사역자 아닌가. 그는 한 세력이요, 기술이다. 천사를 숭배함은 기술을 숭배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얼마나도 뿌리깊이 기술적인 것을 숭배하고자 하는 버릇이 들어있나. 생명보다는 생명의 세력을, 정신보다는 정신의 소산인 기술을, 인격보다는 지위를, 도덕보다는 정략(政畧)을 중요시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이미 기술인 이상 그 세계는 힘의 세계요, 그 힘의 세계를 성립시키는 연락의 줄은 공포라는 것이다. 공포에 의한 계급의 세계, 이것이 기술 숭배의 세계 구조다. 천사 숭배의 종교가 공포의 종교인 것은 이 때문이다. 공포의 경향은 노예(奴隸)의 버릇이다. 노예의 버릇이라 하면 대단히 불미하게 들리나 기실 인간에게는 노예의 버릇이 들어 있다. 그들은 심한 공포 가운데 일종 쾌감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옛사람으로 하여금 천사를 숭배케 한 원인이다. 하나님 앞에 감히 갈수 없어서 천사를 중간에 세우고, 그 천사에게도 나갈 가치가 없어서 그보다 아래 충의 천사를 세우고, 그리하여 공포를 더하면 더할수록 계급이 불어나간다. 이것은 일견 매우 겸손한 듯하다. 그러나 아니다. 겸손인 듯하면서 기실은 심한 교만(驕慢)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교만하기 위하여, 또 교만한 고로 두려워한다. 상관에게 도(謟)를 하는 자는 반드시 하관에게 교만한 자다. 옛사람이 하나님 앞에 될수록 많은 계급을 두었을 때 그는 결국 하나님이 되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한 것이다.
기술 숭배가 가장 알기 쉽게 드러나는 곳은 소위 정치계다. 그러나 정치관료의 세계만 아니라 종교계에도 있다. 종교계에 가장 심히 깊이 들어있다. 천사의 계급을 설정한 것은 옛사람만 아니다. 가톨릭도 그것이다. 법황이 자칭하여 하나님의 종의 종이라 할 때 대단히 겸손한 듯하나, 그것이 공포주의의 뒤집혀 나온 것인 것을 실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지나가는 세계의 특색은 힘과 공포에 의하여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노예 버릇의 세계다. 그런 버릇이 왜 인간에 있느냐 하는 것은「창세기」첨만이 설명한다. 인간의 교만에 인한다고 한다. 고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보다 기술적으로밖에 승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술적으로 생각하는 한 비록 무한히 강하신 이라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용사(容赦)할 수 없는 교만이라 하며, 그대로 둘 수 없는 종의 심정이라 하신다. 이것은 지나갈 것이다.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고로 낡은 세계요 낡은 종교라 한다.
사람이 만일 인격적으로, 양심적으로 자각이 생긴다면 그때에 요구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요 정신이다. 힘이 아니요 생명이다. 공포가 아니요 사랑이다. 하나님과 나는 기술의 차이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요, 질의 차이관계에 있다. 고로 변질(键됐)을 요구한다. 저와 우리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경에 있다. 저는 안에 우리는 밖에, 저는 광명 속에 우리는 어둠속에. 고로 우리를 그리로 이주시키는 중개자를 요구한다. 그리고 밖에 선 자를 이끌어 아버지의 방에 들어갈 자는 아들밖에 없다. 예수가 세상에서 하신 것은 이 새 종교의 주창이다. 그를 위하여 인간은 대단히 담대하여져야 한다. 그러나 담대는 교만은 아니다. 절대의 겸손이 있어서만 절대의 담대를 가질 수 있다. 절대로 신뢰하는 겸손이다. 이것이 아들적인 종교, 장차 오는 새 세계의 종교다. 새 세계의 특색은 사랑과 감사에 있다.
5. 들으라
제1장 4절 이하에서 구약의 인증(引證)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위대를 말한 저자는, 14절에서 천사의 직능은 우리들 구원 얻을 후사들의 일을 위하여 아들을 섬기는 데 있다고 단정을 기린 후 제 2장초에서 거기 대한 권면을 한다. 첫머리에 “그런 고로” 한 것은 1장 4절 이하에서 한 말 전부에 한 말이다. 이 “그런 고로”는 이 아래 제3장 1절, 제 4장 14절, 제 10장 19절에 나오는 “그런 고로’’ 혹은 “그러면”과 아울러 매우 힘있는 말이다. 그 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할 수밖에 없다 하는 필연성을 주장하는 뜻이 있다.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더 옳으시다, 그런 고로……다.
그러면 무엇을 반드시 하라느냐. 우리가 들은바 즉 복음에 대하여 더욱 긴절(緊切)한 주의를 가하란 말이다. 간도하게 한다면 이 절을 제1장 2절 혹은 4절 밑에 붙여보면 잘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우리게 아들”로 말씀하셨다. 그런 고로 우리는 그 말을 주의하여 듣지 않으면 안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란 율법을 가르친 것이요, 공정한 갚음을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인이 불신으로 인하여 받은 종종의 징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천사로 말씀했던 불완전한 율법도 범할수 없는 것이거늘 이 절대적인 복음을 등한시하여 모처럼 받았던 것을 약간 한 세상 곤란으로 인하여 버린다면, 그야말로 면할 수 없는 무서운 값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앙은 언덕에서 내놓은 걸음이다.
이 구원의 복음이 그처럼 중대한 이유는 그것은 주 그리스도 예수가 몸소 그 입으로, 생애로 말씀하신 것이요 직접 그에게서 들었던 사도들이 우리게 확실히 증거하여 전한 것이요, 또 그 증거가 거짓이 아님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奇事)와 여러 가지 능력을 행케 하셨고 오순절(五旬節)같은 때에 성령을 부어주시기까지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개 위대한 진리를 만난다. — 듣는다는 것. 이 말은 1장 2절에 “말씀하시었다”는 말에 호응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진리는 근본에 있어 계시된 것이라면, 우리 할 일은 듣는 것밖에 없다. 하나님은 무엇이냐, 말씀에 의하여 자기를 드러내시는 존재다. 인생이란 무엇이냐, 듣는 존재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시는 것이다.
“예는 예라 하고 아니는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치는 것은 죄니라.”
듣는 자는 대답한다. “예”라 하든지, “아니”라 하든지.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 라 하는 일에서 다른 것 아니다.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아듣는 것과, 알아듣거든 그것을 듣는 것(聽從)이다. 기술적인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묘한 방법을 행하여서, 하나님이 좋아할 수 있도록 제사를 하여서 하나님 앞에 나가려 하였다마는 예수의 종교는 아니 그렇다. 저는 들을 뿐이다. 예수 자신이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아버지의 명하시는 대로 하시노라 하였고 변화산(變化山)상(上)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도들을 보고 위에서 나신 말씀은
“이는 내 아들이요 내 택한 바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시었다. 예수만이 아니라 고래(古來)의 위대한 이들이 다 들은 이 들이었다. 불경의 말들은 “내가 이렇게 들었노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요, 소크라테스도 양심의 가는 소리를 듣노라 했고, 공자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학(學)이라 해서 들은 이였다. 이것은 현대의 학자식자 들이 이것만은 내 독특한 창견(創見)이라고 자기 것을 주장하는 것과는 잘 대조되는 일이다.
신앙의 태도는 듣는 태도다. 들은 것조차 내가 들은 것이 아니로라는 태도다. 내가 믿었노라 할 때 그것은 벌써 믿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은 듣지 않는 데 있고 모든 답답, 모든 구차(苟且)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알아듣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들으려는 우리 성의의 부족에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죄가 귀못으로 박혀 있다는 말이다.
듣고 나면 우리 일이 얼마나 달라지나. 이때까지 내집 인줄 알았던 것이 내 집이 아니요 감옥이며, 이때까지 나인 줄 알았던 것이 내가 아니요 껍질이며, 이때까지 생(生)인 줄 알았던 것이 듣고 보니 생 아니요 사(死)다. 이것이 대오(大悟)라는 것이며 알았다는 것이요, 이것이 신생(新生)이라는 것이다.
교만한 인간의 철학은 말하기를 인생은 진리를 추구한다고 한다. 어리석은 구세계의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추구 한 것이 인생이요 찾은 것이 인간인가. 아들의 심정에 돌아가서 볼 때, 진리야말로 우리를 추구했고 신이야말로 우리를 두루 찾지 않았나. 우리 한 일은 도망이요 회피였다. 인간 수만 년의 역사는 수탐(搜探)당해온 역사다. 그리고 완강히 대항하여온 역사다. 그 때문에 드디어 듣는 능력을 잃어버린 역사다. 그러나 신 자신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 말씀을 번역하여주시는 날이 왔다. 그리하여 귀가 있어 경청(傾聽)하는 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날이 왔다. 새 세계의 시작은 듣는 순간(瞬間)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