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하는 행위에 영적·의식적 목적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생명체는 목적 지향하는 방식으로 성장”
인간 행위, 기계적·인과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전통 있지만
환경과의 작용 통해 행동 패턴이 뉴런에 연결됐단 해석도 가능
그림=허재경
사람은 끊임없이 행동한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잠들어 있더라도 심장이 박동하고 호흡이 지속되는 등 많은 생리적 현상이 진행된다. 넓은 의미에서 이런 움직임도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행동(behavior)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한 행동을 넘어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행위한다. 의도나 목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동이 행위(action)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행위는 생명체의 행동범위 너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여겨져 왔다. 그런데 만약 의도나 목적이 뇌세포의 물리화학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현상이라면, 인간의 행동이 동물의 행동과는 다른 차원의 행위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체가 목적인(目的因)에 의해 움직인다면서 모든 생명체가 목적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움직이며 성장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송곳니는 음식물을 찢기 쉬운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어금니는 찢어진 음식물을 잘 갈기 위해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식이다. 그리고 다윈 이전 라마르크 같은 생물학자는 종(種)도 목적 지향적으로 진화한다고 믿었다. 단순하고 원시적이었던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하고 번식해 나가기 위한 목적으로 복잡한 고등생물로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런 ‘목적’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왔고, 또 누가 그것을 주재하는가? 물고기나 지렁이가 이런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고 따르며 진화해 왔다는 것인가?
이에 비해 다윈은 전혀 다른 진화론을 제시하며 그런 목적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설명한다. 종(種)의 진화는 생명체가 무작위로 변이(random variation)하면서 환경과의 기계적인(mechanical) 인과적 상호선택 작용을 통해 살아남아 번식하며 때때로 새로운 종을 형성하며 변화하는 과정이다. 여기에 어떤 목적이나 목적을 주재하는 신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오해하고 있다. 우선 ‘돌연변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변이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연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실은 이런 변이가 일어나야 종이 생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소멸되기 때문이다.
현재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이가 문제가 되는데, 변이는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정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백신으로 기존의 알파변이에 대한 인간의 면역력이 높아져 새로운 델타변이가 주종으로 자리 잡는 상황은 델타변이가 인간을 포함한 환경에 의해 자연선택되는 상황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선택’이라는 단어가 마치 자연이 어떤 의도를 가진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실은 환경에 의해 ‘여과선택’되는 물리적 과정이다. 이 ‘선택’ 과정에는 의도나 목적이나 주재자가 없고, 단지 인간의 면역력을 포함한 환경과 델타변이 사이의 물리적 인과 작용만 존재한다.
나는 종의 진화뿐 아니라 생명체의 행동방식 또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생명체가 의식적으로 생존과 번식이라는 목적을 위해 효율적인 행동방식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단지 생명체들 가운데 살아남아 번식하는 그룹을 살펴보면 그들이 그러한 행동 패턴을 보이고, 따라서 행동 패턴의 여러 무작위한 변이 가운데 그 패턴만이 효율적이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말하자면, 살아남은 그룹의 행동방식을 뒤돌아보니 마치 그 그룹이 처음부터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행동했던 것처럼 착각될 뿐이다.
식물이 물이 있는 곳으로 뿌리를 뻗어나가는 것은 물리화학적 현상이다. 어떤 고상한 목적이나 치열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물을 찾는 지렁이의 행동패턴도 다르지 않다. 나아가 고등동물도 예외일 수 없다. 생명체에서 효율적인 행동패턴이 관찰되는 이유는 무작위적으로 시도된 여러 행동패턴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몇몇만 여과선택 되어 그러한 패턴을 가진 생명체군만 생존하고 번식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도나 목적이 아니라 생명체와 환경의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인과적 상호작용의 결과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목이 마른 길동이를 상상해 보자. 목이 마르다는 생리현상이 존재하면 물을 찾아 마시는 우리 몸에 내재된 행동패턴이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물을 마시겠다는 분명한 의도나 목적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고도 기계적으로 물을 찾아 마시게 된다. 길동이는 평소 습관(패턴)대로 물병이 있는 냉장고 문을 열고, 평소 습관대로 컵에 따라 물을 마신다. 그러면 평소처럼 갈증이 사라진다. 길동이의 일련의 기계적 행동에는 생리적 결핍상태를 해소하는 데 효율적이라고 검증된 패턴들이 있다.
의식적 노력 없이도 패턴에 따라 행동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그동안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여과되어 형성된 패턴이 이미 뇌에서 일부 뉴런의 견고한 연결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패턴은 물리세계에서 기계적으로 형성되었고, 뇌의 물리적 토대를 바탕으로 존재하며, 인과관계에 의해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어떤 영적(靈的)·의식적인 의도나 목적이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 불자들은 뉴런의 연결 상태도 조건에 의해 생멸하기 때문에 결국 무상하고 공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런데 글쓰기와 같이 복잡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그 많은 관련된 인과적 패턴을 모두 나열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행위는 기계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목적론적으로(teleologically) ‘의도와 목적’을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기계적 설명이 최소한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따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의도나 목적이란 실은 진화과정에서 여과선택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일련의 행동패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과적 고리의 경로(route of causal chains)에 대한 두루뭉술한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인과적 고리와 그 경로는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인과의 그물 안에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행위는 기계적·인과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의도의 형성이나 목적 지향적 행위를 뇌세포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실용적인 면에서 기계적·인과적 설명이 쉽고 편리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쉽고 편리하다고 해서 진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철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