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맛있는 가짜? (짬뽕에 대한 감상문)
얼마 전 친구와 카톡을 하던 중 짬뽕 사진 하나가 날라왔다. 우리는 종종 맛집을 가면 자랑하기 때문에 나는 바로 물었다. "어디냐 거긴" 그러자 친구가 뜬금없이 며칠 전에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청와대 셰프를 아는 지 물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20년 가까이 일했던 셰프 한 분이 유퀴즈에 나왔던 거 같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그분이 청와대에서 나온 후 차린 가게에 왔다는 것이었다. 매스컴의 힘이었을까? 나는 갑자기 급관심을 보이며 "오, 맛있어?", "어때??", "사람 많아???" 등의 폭풍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자 친구는 맛있다며 나중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가게의 위치를 물었고 공교롭게도 그 가게는 내가 학교에서 집을 갈 때 지나치는 광화문 근처에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방문했다. 내가 그 짬뽕에 대해 물을 때마다 친구는 두 가지를 강조했다. 하나는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는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래도 맛있다는 말이었다.
짬뽕집에 도착했을 때는 애매한 점심시간이었지만 사람은 꽤 있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자마자 짬뽕과 짬뽕밥을 하나씩 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가게를 쓱 둘러 보았다. 방송을 탄 가게라고 하기는 작고 구석진 곳에 위치했다. 물론 광화문이라는 중심지에 있었지만 건물 3층 구석에 있었다. 그래도 작은 가게 이곳 저곳에 청와대의 흔적이 있었고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짬뽕이 나왔다. 짬뽕의 첫인상은 꽤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봤던 짬뽕 중 놀라웠던 비주얼은 대부분 홍합이 폭탄이거나 숙주가 폭탄이었다. 그런데 이 짬뽕은 배추와 부추 폭탄이었다. 짬뽕국물을 머금어 붉게 물든 배추와 싱싱해 보이는 초록 부추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그러나 향이 나지 않았다. 짬뽕이라고 하면 응당 식탁에 올라오자마자 코를 찌르는 첨예한 향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이 짬뽕은 어떠한 자극적인 향도 나지 않았다. 나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국물부터 한 술 떴다. 뽀얀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나의 반신반의한 마음은 오히려 커졌다. "이 맛은 뭘까?" 내가 평소 알던 '짬뽕'의 맛과는 달랐다. 어떤 자극적인 불맛도, 아주 매콤하게 땀을 쏙 빼는 맛도 아니었다. 짬뽕보다는 국밥에 가까운 든든한 느낌을 주는 깊은 맛. 생각이 많아지는 맛이었다. 일단 맛의 절대적인 호불호보다 이것을 짬뽕으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들었다. "내가 알던 짬뽕과는 전혀 다른 이 별종을 짬뽕이라고 생각하고 먹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나의 첫 마디를 기다리는 친구에게 말했다. "오묘하다. 신기한 맛이네."라고 하자 친구는 저번에 자신도 절반 먹을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이후부터는 먹다보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수수께끼 같은 말을 뒤로 하고 면을 먹었다. "오!" 면은 단연 고소했다. 그 이상의 형용은 필요없을 거 같다. 단지 고소하고 쫄깃한 "이 집 면 잘하네!"라는 반응이 나올 법한 맛이었다. 그렇게 면을 한 젓가락 더 먹고 면에 국물도 같이 먹어봤다. 그러다 보니 이 국물과 면과 배추와 부추가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짬뽕에 대한 이상한 고차원적인 생각을 뒤로하고 단순히 이 맛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남아있던 짬뽕이 딱 절반이었다. 이후 나머지 절반의 짬뽕 속에서 나는 다양하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국물은 사골을 쓴 거 같으면서도 묘했다. 사골보다 더 다체로운 감칠맛이 났다. 잘 볶아진 배추에서는 단맛이 났다. 이 자연의 단맛은 감칠맛을 품은 국물에 금상첨화였다. 국물에는 어떠한 향신료의 향도, 자극적인 맛도 없었지만 맹맹하거나 싱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짬뽕 한 그릇을 이렇게 비우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내가 이 짬뽕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것은 내 알량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파스타 하나를 만들 때도 이탈리아 전통 방법만 찾아대는, 소위 말하는 꼰대였던 것이다. 나는 음식의 본질이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음식의 본질은 맛이다. 물론 전통과 역사도 가치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음식의 맛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적어도 소비자에게 만큼은 그렇다. 사람들은 전통보다 맛을 찾는다. 전통 레스토랑 보다 맛집을 찾는다. 전통적인 방식보다 MSG를 사용하더라도 맛있게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이런 맛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 덕분에 요리계는 발전한다. 한때 건강에 해롭다느니, 뭘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느니, 온갖 선동과 날조로 이미지가 안 좋았던 MSG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 발견인가! 고기를 48시간 동안 끓이거나 새우 껍질을 볶고 5시간 동안 끓이고 졸이는 전통적인 과정 없이 우리는 한 스푼의 MSG를 통해 엄청난 감칠맛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것은 편법도 반칙도 아닌 발전이다. 전통이라는 틀만 벗어나면 우리는 맛이라는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 친구가 이 짬뽕에 대해 내게 했던 두 가지 말,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는 말과 그래도 맛있을 것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모순적인 말이지만 이 짬뽕을 놓고 볼 때는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다. 향신료 대신 배추와 사골로 완전히 한국화된 짬뽕을 혹자는 가짜라며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짬뽕은 향신료 없이도 특유의 감칠맛과 면의 고소함, 배추의 단맛으로 맛있다는 생각이 드는 짬뽕이었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먹고나서도 속이 쓰리거나 다음날 배가 아프지 않은 일명 짬뽕후유증도 없는, 그런 짬뽕이었다. 과연 이런 짬뽕에 전통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옳을까?
짬뽕에 대한 고정관념을 내려놓으면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광화문 짬뽕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