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장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5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1)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7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8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9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하 된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0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설교
오늘부터 열왕기상을 묵상하게 됩니다. 열왕기상은 구약의 역사서 중 한 권입니다. 역사서니까, 주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겠죠. 다윗의 죽음과 솔로몬의 즉위부터, 북이스라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죽음까지가 열왕기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열왕기의 ‘열왕’은 왕을 나열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왕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반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왕되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또한 배울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의 시작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왕 다윗의 말년에 대한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위대했던 왕 다윗이 약해졌고, 이제 다윗을 이을 다음 왕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무엘서를 읽고 나서 열왕기서를 묵상한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짓고 싶다고 했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세울 것이라고 하셨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함께 하셨던 것처럼, 다윗의 아들에게도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열왕기서가 시작될 때, 다윗의 말년을 보면서 우리는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다윗을 이어 왕이 되어 성전을 건축할 것인가.
1절부터 4절을 보시면, 말년의 다윗이 어떤 모습인지 나와 있습니다. 어떤 모습처럼 보이십니까? 더 이상 왕으로서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다윗이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이제는 다윗이 과거와 다르게 함부로 동침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여자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던 다윗이, 이제 정말로 힘이 없는가보다 하고 해석합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여자와 상관없이 그만큼 다윗이 힘이 없고, 이제 새로운 왕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죠.
그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후에, 5절을 보시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입니다. 6절 보시면,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아들이고, 압살롬처럼 용모가 준수하고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합니다. 열왕기서는 의도적으로, 아도니야를 압살롬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아도니야가 압살롬처럼 사실상 반역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시면,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시도합니다. 5절에, “스스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스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다윗의 계획과 다르다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7절을 보시면 다윗을 섬겼던, 군사령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아도니야를 지지합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순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 좋을 대로 택한 것이죠. 반면에 8절 보시면, 제사장 사독,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선지자 나단과 어떤 사람들은 아도니야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아주 소수입니다. 이들은 아도니야가 왕이 될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뒤에 나오는, 1장 30절을 보시면, 예전에 다윗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의 뒤를 이을 아들은 솔로몬이라고 말이죠.
결국, 아도니야는 그 다윗의 말을 거역하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일 테고, 아도니야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다윗의 말을 기억하여 아도니야를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9절과 10절을 보시면, 아도니야가 잔치를 열어서 자기의 지지를 굳건하게 하려고 하죠. 그 자리에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미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아도니야의 시도를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려는 자”였습니다. 아도니야는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왕이 아니라, 자기가 그 나라의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왕이 된다면, 이 나라를 제대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사울보다 더 심한 불순종의 사람이 될 것이 뻔합니다. 이런 아도니야의 모습은 이스라엘 역사와 우리의 삶을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죄인들의 역사는 스스로 왕이 되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신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가 보기에 듣기에 생각하기에 좋은 대로 하려는 것이 우리 죄인의 특징이죠.
우리는 늘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왕이고자 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나의 삶을, 내 나라를 이끌어 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늘 반역하고,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스스로 왕이 되려는 이 수많은 시도가 얼마나 처참하게 실패할 것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왕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삶의 왕은 따로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시도는 처참히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스스로 왕이 되려는 헛된 시도를 그치시기를 바랍니다. 아도니야처럼 당당하게 반역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나만의 법과 생각을 따라 사는 모든 시도가 왕이 되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시도를 다 버리시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계명에 하나씩 순종하시면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시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