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芒種) 무렵이면 / 곽주현
오늘(6월 6일)이 망종(芒種)이다. 해마다 맞는 날이지만 무슨 날인지 잘 몰라 국어사전을 펼쳤다. ‘벼나 보리 같이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 24절기의 하나.’라고 한다. ‘이맘때가 되면 보리가 익어 먹게 되고 모를 심게 된다.’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보리, 6월이 되면 농민들이 거둬들여 주식으로 먹었던 곡식이다. 우리네 여름 식량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지만, 지금은 시골에 가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었다. 지난 5월에 손녀와 손잡고 시골길을 가다가 논둑에 보리가 한 포기 자라고 있는 것을 봤다. 걸음을 멈추고 “이게 무엇인지 아니?”하고 물었다. 이제 갓 입학한 초등학생이라 알지 못할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은 있었다. 풀이라고 말한다. 작년에는 서울에 사는 5학년 손자가 다니러 왔기에 물었다더니 역시 모른다고 했다. 하루는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손자 또래의 아이가 지나가기에 보리를 가리키며 이름을 말해 보라 했다. 잡초 아니냐고 되묻는다. 허허 참, 시골에 살아도 모른다니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보리는 늦가을에 씨를 뿌려 겨울과 봄을 지내고 망종 무렵에 거둔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나라의 곡식처럼 되어 버렸다. 작년 가을에 채워놓은 쌀독이 바닥나면 보리방아를 찧어 항아리를 채웠다. 쌀 한 톨 없는 꽁보리밥이지만 그것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가정은 살림이 괜찮은 집이었다. 그때 ‘보릿고개’라는 신조어가 생겼고 그것이 어려웠던 때의 상징적인 낱말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작물에 비해 수익이 박하다는 이유로 농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어 농촌에 가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는 건강식으로 보리밥 전문 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 되었다.
누렇게 익은 보리가 들녘을 가득 채우면 눈은 호강했지만, 배에서는 늘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것을 베느라 구슬땀을 흘리다가 잠깐 허리를 펴면 그때 논 끝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한 모금의 청량음료 같았고 물결치듯 일렁이는 보리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새참으로 내온 막걸리 한 잔과 찐 감자 두어 개는 지금의 어떤 간식보다 더 맛있었다. 취기도 오르고 배도 채워져 정신없이 낫질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무엇이 갑자기 푸드덕 날아오른다.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저만치 까투리 한 마리가 낮게 나른다. 알을 품고 있어서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고 있었나 보다. 잡히면 곧 인부들의 안줏거리가 될 판인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단한 모성애다. 가슴이 벌렁거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노다지를 캤다며 일꾼들이 다 내 곁으로 모여든다. 알은 먼저 찾은 사람이 임자다. 많을 때는 일고여덟 개를 줍는 횡재(橫財)를 만나기도 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것을 손에 넣은 사람은 낫을 던져 놓고 온 들녘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지르며 뛰어다닌다. 고된 일손이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이 된다.
놉을 부리지 않고 가족끼리 보리를 베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아직 덜 읽는 것을 골라 자른다. 나와 동생들은 마른풀과 나뭇가지를 모아 오고 어머니와 누나는 입으로 바람을 내어 불을 지핀다. 거무스름하게 익은 이삭을 꺼내 두 손바닥으로 비비면 초록의 알갱이가 되어 나왔다. 호호 불어 까끄라기를 날리고 입에 털어 넣으면 그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가족끼리 일할 때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그렇게 구운 보리 몇 모개 먹는 것으로 새참을 대신했다.
장난꾸러기 막내가 누나에게 다가가 얼굴에 풀잎이 붙었다며 검은 그을림이 눌어붙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쓱 문지르면 까만 한일자가 길게 그어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배를 움켜쥐고 논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어머니는 이러다 배꼽 빠지겠다며 다시 낫을 들고 일어섰다. 생활이 어려워 늘 허기가 졌지만, 그런 날이 있어 잘 견디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전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보리가 거두어지자마자 곧 모내기로 이어진다. 거두기와 또 다른 시작이 같은 시기여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 된다. 농사의 전 과정이 사람과 동물의 힘으로 해결해야 했던 시절이어서 6월 한 달 동안은 허리 펼 날 없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도 초등학교 4학년 정도만 되면 몇 날씩 동원되어 일손이 없는 가정의 모심기를 도왔다. 겨우 여남은 살 어린애들이 그런 중노동을 했다. 내가 겪었어도 믿기 어려운 일이 되었지만,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행해졌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공부하지 않고 이 논 저 논으로 몰려다니며 모내기하고 새참으로 볶은 보리를 한 움큼씩 얻어먹는 것이 더 재미있기도 했다.
지금 들녘에는 엊그제까지 해도 논에 물만 그득하더니 벌써 모내기가 거의 다 끝났다. 쟁기질하기, 모종 키우기, 모내기하기 등 벼농사의 과정이 대부분 농기계의 힘을 빌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논 주인과 계약이 되면 이웃도 모르게 모를 심는다. 큰 힘 안 들이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 편해졌지만, 서로 품앗이하며 온 마을이 늘 잔칫날 같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망종, 이 무렵에 보리 거두기와 모내기만 하는 게 아니다. 감자, 매실, 양파, 마늘, 완두콩 등을 거두고 콩, 팥, 녹두를 심는다. 농촌은 마무리하고 시작하는 일로 늘 바쁘다.
첫댓글 초등학생 때 겨울이면 보리밟기하러 다닌 때가 생각납니다. 망종이 그런 날이라는 것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러다간 앞으로 우리 주식인 벼를 아는 학생이 몇이나 될런지요?
망중, 보리 즐거운 여행하고 갑니다. 까투리가 좀 맘 아픈 이야기기만 그때는 먹고 사는 일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라~. 글 고맙습니다.
저도 며칠 전에 망종을 찾아봤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확실히 알겠네요.
선생님!
글이 정말 좋습니다.
손자 돌보미가 끝나서 더 이상 아이들 이야기는 읽지 못하겠구나 하고 아쉬워했는데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그에 못지 않네요.
당시에는 고통스러웠겠으나 세월이라는 더께가 입혀져
동화처럼 아름답네요.
공모해도 좋을 글로 보입니다.
엄지 척!
선생님, 팬입니다.
진로 체험하러 해남에 데리고 갔는데 마침 길가에 보리가 익어가고 있었어요. 물어 보니 시골 아이들이어도 모르더라고요.
저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보리 베러 다니고, 중학교 때는 모내기 봉사하러 다녔는데, 선생님 글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저 발령받고서도 학생들과 보리베기 노력동원 갔었어요. 저도 낫을 들고 보리를 베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학생들이 질색하면서 그렇게 하면 낫이 정갱이를 벨 것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서 일을 하던 아이들이라 저보다 더 나았던 것이지요.
봄소풍가면서 보리 피리 만들어 불던 추억도 있습니다. 저는 못 만드는데, 아이들이 잘 만들더라구요. 아이들이 만들어 준 피리를 좋아라 불었던 그때가 갑자기 그리워집니다..
읽는 맛이 나네요.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보리가 익듯이 선생님의 글도 익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