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12.
도림동 성당 일본 나가사키 성지순례 세쨋날(1)
어제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아침에는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오전 8:45 국보인 <오우라 천주당 (大浦天主堂)> 방문.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성당이며,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건물 중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이제는 성당의 기능은 없고 유적지와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워낙 극적인 이야기가 있는 유명한 성당이며 유적지라 인터넷의 여러 자료를 취합해서 정리해 보았다.
———————
오우라 천주당은 일본 26 순교성인을 기리기 위해 1864년에 파리외방 선교회 소속 쁘띠쟝과 퓌레라는 두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세워지고 1865년 2월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3개 탑이 있는 고딕풍의 외관으로, 정면 상부에는 불교사원에 걸려있는 편액과 같이 ‘천주당’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으며, 내부는 3랑식(廊式)의 구조였다.
당시 아직 금교령이 해제되기 전이라 오우라 천주당은 외국인을 위한 성당으로 ‘프랑스절’이라 불리고 있었다.
오우라천주당을 헌당한지 약 한달후인 1865년 3월17일 종교 역사상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신도발견'이 이루어진다.
1644년 일본인 마지막 사제 순교 이후 220 년간 사제 없이 숨어서 신앙을 지켜온 잠복 기리스탄이 오우라 성당에 나타난 것이다.
프티장 신부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어제 12시반경, 남녀와 아이를 합쳐
12~15명 되는 한무리가 천주당 문에 있었습니다.
제가 제단에서 잠시 기도를 드린뒤
40세 혹은 5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부인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곳에 있는 저희들은 전부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우라카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타마리아상은 어디 있습니까?"
제가 성모상이 있는 제단으로 안내를 하자
기쁜 나머지 제각기 말하였습니다.
"맞다 정말로 산타 마리아님이다!
보시게 예수님을 팔로 안고 게셔">
이 역사적인 사건은 즉시 소토메, 고토 등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에게 전해졌고, 그들의 지도자는 잇따라 오우라 천주당을 방문해서 선교사와의 접촉을 시작했다.
그러나 선교사와의 접촉은 각지의 잠복 기리시탄 마을에 새로운 신앙의 국면을 초래했다.
선교사의 지도 아래로 들어가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공연하게 신앙을 표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1867년 “에도 막부”는 우라카미의 잠복 기리시탄을 검거하였고, 금교 정책을 이어받은 메이지 정부도 3,000명 이상이나 되는 잠복 기리시탄을 국내 20개 번으로 유배를 보냄과 동시에 배교하도록 고문했다.
이것이 ‘우라카미 욘반 쿠즈레(박해)’다.
고토에서도 신앙을 표명한 잠복 기리시탄을 검거한 ‘고토 쿠즈레(박해)’, 히사카지마 섬에서는 약 200명의 잠복 기리시탄을 불과 6평짜리 감옥에 투옥시켜 많은 사망자를 낸 ‘로야노사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탄압에 대하여 오우라 천주당의 선교사는 재일 영사에게 요청해서 사태 수습에 노력했다. 1873년 해외 각국에서 항의가 빗발치자, 메이지 정부가 드디어 금교령을 철폐했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탄압정책은 끝이 났다.
◈ 글과 사진 : Jung-Woo Hugo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