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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1일(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마태복음 25:1-13
신랑 되신 주님을 맞는 지혜로운 준비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는 비현실적이라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자신이 처한 현실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흔한 변명은 “내일부터 하려고”입니다. 이 말은 “오늘은 하지 않겠다.”는 다른 말일 뿐입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생각이 현재를 향하지 않은 것입니다.
한 학생이 영어 공부를 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어 공부를 잘 할 수 있어요?”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교과서 중심으로 단어부터 외우렴.” 학생은 이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단어를 외울 수 있지요?” “교과서 진도에 맞춰 노트에 단어를 적으며 외워보렴” “노트는 어디 가서 사야 하죠?” “뭐 그런 걸 물어? 그냥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사거라.” “학교 앞 문방구까지 어떻게 가야 하죠?”
결국 선생님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너 영어 공부하기 싫지?”
학생의 계속되는 질문은 영어공부를 하고 싶어서 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영어공부를 하기 싫다는 다른 표현이었을 뿐입니다. 게으름은 이런 식입니다. 자신의 현실을 부정합니다. 그 대신 뭐든 자신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상황들을 찾아 헤맵니다.
우리는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이어트를 위해서라면 내일 헬스장까지 가는 시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코앞에 있는 야식 대신 생수 500밀리리터를 마시고 일찍 자기부터 하면 됩니다. 실행 중심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시작해야 부지런함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출처: 송준기, 「살리는 기도」(서울: 규장, 2020년); 「생명의 삶 플러스」(서울: 두란노, 2021년 3월호), p. 215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영성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먼 미래만 생각하며 내가 순종하지 못하는 게으름의 핑계거리만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었던 마태복음 25장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열 처녀 비유입니다. 이 비유 말고도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는 몇 개의 비유들이 더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노아의 비유, 도둑의 비유, 지혜 있는 종과 미련한 종의 비유,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등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종말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함께 읽은 열 처녀 비유도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종말을 준비하고,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에 답하신 분은 제자들과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마태복음 24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셨을 때에 제자들은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은 헤롯 왕이 지었던 건물이었습니다. 헤롯 왕은 이두메 출신의 사람이었는데, 로마황제에게 잘 보여서 유대의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헤롯 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스룹바벨 때에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확장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헤롯 왕이 수리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더 크고 웅장하였습니다. 그러니 갈릴리 출신들의 제자들이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가 영원히 자신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 건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을 들었던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신앙의 자존심과 같았던 성전이 무너진다는 이야기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겠습니까? 다른 곳은 몰라도,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이 머무는 성전만큼은 절대로 무너질 수도 없고, 무너져서도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이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예루살렘 성전이 잔인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였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마 23:3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와 감람산에 오르셨을 때, 충격에 빠진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때를 종말의 때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제자들만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이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수정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단지 재난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마 24:8). 제자들의 생각은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있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이 더 넓게 확장되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제자들의 관심사는 유대인 중심에서 세계 모든 민족으로 옮겨져야만 했습니다. 또 제자들의 관심사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건물 중심에서 천국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것으로 옮겨져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것보다, “종말의 때를 어떤 자세로 준비해야 합니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 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1절에서,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열 처녀들은 신랑 일행을 안내하는 신부의 들러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손에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신랑이 늦게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들은 피곤에 지쳐 모두 졸며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열 처녀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던 사이, 드디어 신랑이 혼인 잔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고, 열 처녀들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들은 황급히 일어나, 미리 준비했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련한 자들의 등불에 기름이 부족하여 불이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황급히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자들은 둘다 나눠 쓰기에는 기름이 턱없이 부족하니, 차라리 기름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며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처녀들은 기름을 구하기 위해 동네로 들어갔고, 그 사이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습니다. 가까스로 기름을 구한 처녀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잔칫집 문이 닫힌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라고 간청하며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신랑의 음성만을 듣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깨어 있으라.”는 경고로 끝을 맺게 됩니다.
저는 이 비유를 근거로 여러분과 두 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무엇에 비유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천국을 무엇에 비유하셨습니까?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1-2절).”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열 처녀들의 모습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미련한 자이고, 누가 슬기 있는 자입니까? 열 사람 모두 손에 등을 들고 있기에 누가 미련한 자인지, 누가 슬기 있는 자인지 그 겉모습만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3~4절에 그 기준이 나옵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담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등만 들고 있으면 무엇 합니까?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야지요. 우리 주님은 겉모습만 가지고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이 눈에 띠지 않는 기름을 준비했듯이, 여러분들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스갯소리로 ‘아내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합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다급한 나머지 기름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자 슬기로운 처녀들이 이를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영적인 현실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다른 사람의 믿음을 빌려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왜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나누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해보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사용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들과 기름을 나누지 않은 처녀들이 오히려 이기적이고 매몰차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혹 어떤 이는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이 아닌가? 혼자만 잔칫집에 들어가려고 상대방의 딱한 처지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과연 사랑인가?”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슬기로운 처녀들의 행동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들은 자신들의 본분에 합당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신부의 들러리로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자신이 들러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혹시 당할지도 모를 일을 염두 해두고, 미리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기름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 쓰려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름은 오직 각자의 등불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름이 유한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유한한 자원을 소중히 여겨 그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할 때 놀라운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름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 쓰려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름은 오직 등불을 밝히기 위해 주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일 뿐입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미리 준비한 기름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우선순위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중한 기름을 낭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은 결코 낭비되어서는 안 되며, 그분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이러한 슬기로운 처녀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들고 나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이 분개하며 이 여인에게 어떤 비난의 말을 했습니까?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 26:8).”
화가 난 제자들은 이 여인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비싼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행동을 낭비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행동이 좋은 일이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입니까? 자신의 소중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했던 여인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여인들과도 같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갈 때, 방주를 지으면서 주님 만날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그 집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줌으로 주인과 만날 날을 준비했습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함으로 신랑과 만날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들도 자신들이 받았던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으로 이득을 남겨 주인과의 만남을 준비하였습니다. 주님께 칭찬받았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받았던 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잘 활용하여 주님을 만날 날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기름은 무엇입니까?
제가 설교 초반부에 예루살렘 성전을 나오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했던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한 건물을 보고는 그들의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에 집중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건물인줄 착각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건물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유대인이라는 혈통 중심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자들은 건물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여깁니다. 즉, 건물 중심이 아니라 사명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미련한 자들은 교회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의 지향점이 ‘우리’에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등은 가졌지만, 기름은 가지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자들은 ‘우리’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즉 슬기 있는 자들은 신앙생활의 지향점을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둡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 행복하다면, 과연 그 교회를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교회에 주신 기름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깨어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사명대로, 우리가 천국 복음을 세상 모든 민족에게 증언하는 삶을 충실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사명을 소중히 여기고, 결코 낭비함이 없이 살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사명을 소중히 여기고, 결코 낭비하지 마십시오.
♤아래의 그림은 제 둘째 딸이 한국화 수업시간에 그린 수묵화입니다. 난을 그렸는데요. 제 딸이 고양이를 좋아해서 난 옆에 귀여운 고양이를 그려 넣었네요^^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내는 젊은이들의 창의성이 좋아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