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라 안되아.
다 ‘이 뭣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정법시대
부처님 당시 정법시대라야지
이 말법시대는
업장이 두텁고 근기가 쇠해가지고 이 뭣고?’ 헌다고
되덜 안혀.
그러니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러가지고 다 죽어서 극락세계나 가지 ‘이 뭣고?’ 해봤자 되지도
안 해여.”
이런 말을 헌 사람은
정법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스스로 성불 헐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포기허는
것입니다.
이 마음자리는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역대조사나
우리 자신이나 그 우리의 그 진여불성자리는
조끔도 차등이 없어.
우리가 탐진치 삼독
그걸 버릴라고 헌다고 해서 일시에 버려지진 않지마는
그놈에 즉 해 가지고
그놈을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를 찾는다면
바로 그때가 정법시대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자기가 성불헐 수 있는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거고
정법을 믿고 ‘이 뭣고?’를 허며는
바로 불조와 한자리에 앉는 것이고 손을 같이 잡는
것이 된다 그 말이여.
스스로 포기헌 것처럼
불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내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나도 ‘이 뭣고?’만 허며는 얼마든지 견성성불을 헐 수
있다고 자신을 가지고 허며는
바로 그 사람이 대장부다 그 말이여.
참선은
대학을 나와야만 허는 것도 아니고,
대장경 경전을 많이 읽어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남자라야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잘나고 똑똑해야만 되는 것도 아니여.
우리는 과거에 지은 인연으로
부자로도 태어나고 가난한 사람으로도 태어나고,
얼굴이 잘나게도 태어나고 못나게도 태어나고,
남자로도 태어나고 여자로도 태어나고,
다맛 껍데기만 차등이 있는 것이지
이 몸띵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의 자성자리는 똑같은
것이여.
지금이라도 우리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산승이 지금 말씀을 허고 있는
이 정법을 믿고 지금부터서라도 ‘이 뭣고?’ 허고 한 생각 돌이키며는 우리는 대근기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대장부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하잘 것 없는 불쌍한 중생이 아닙니다.
‘이 무엇고?’ 한번 허며는
관세음보살’ 또는 ‘지장보살’ 육백만 번 부른 공덕이
있는 것입니다.
지장보살을 육백만 번을 부를라며는
백 일(100일) 동안을 쉬지 않고 불러야 하는 것인데,
‘이 뭣고?’ 한 번 허면
육백만 번 허는 공덕이 그 속에 들었다 이거거든.
‘아, 지장보살 백일기도 동참을 했는데
지장보살을 안 부르고
이 뭣고’를 허면 지장보살이 섭섭허게 안 생각 허실란가?’
그런 염려는 허실 것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내가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
아미타불’을 불렀는데
그것 저것 다 놔두고 ‘이 뭣고?’만 하면
아미타불이나 지장... 관세음보살이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허실란가?’
그거 절대로 걱정허실 거 없습니다 왜 그러냐?
‘이 뭣고?’가
관세음보살도 ‘이 뭣고?’ 속에 다 들었고,
지장보살도 ‘이 뭣고?’속에 들었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공덕도 ‘이 뭣고?’ 속에 다
들었습니다.
‘이 뭣고?’ 한 마디를 허며는
팔만대장경을 읽는 공덕도 그 속에 다 들었기 때문에,
중생의 근기가 약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을 부처님께서 설하셨으나
궁극에 목적은 ‘
다 누구나 내 마음을 깨달러서 성불허라’는 그 말,
구경에 가서는
모든 경전에 뜻이 그 한 마디 속에 다 귀착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