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김현경 지음 『사람, 장소, 환대』
의미와 재미
젊을 적, 사람은 문과 무를 겸비하며 풍류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해서, 문은 책이고, 무는 축구요, 풍류는 술이다라고 하며 번갯불에 콩 볶듯이 재미있지만 정신 없이 바쁜 삶을 살았던 적이 있다. 그러다 집에서 쫒겨날 뻔 한 후 개과천선. 요새는 근신하며 살고 있다. 물론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가끔 빗길로 나가긴 하지만, 공자 왈 이순으로 치닫는 나이가 되다 보니 이젠 스스로 원 위치해 버리고 말고 있다.
윗 경험은 결국 인생은 의미와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일게다. 의미가 없으면 우울에 빠지고 재미가 없으면 권태에 빠진다. 그러나 의미와 재미는 나 홀로 이룰 수 없다. 나 너 우리라는 관계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 관계는 사회라는 울타리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관계의 기초는 우정이라 생각한다. 누가 누군가에 선의로 다가갈 때 호의로 받으면 탄생하는 것이 우정일 터. 그 우정을 통하여 우리는 관계를 다지고 인생의 의미와 재미를 쌓아간다. 물론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선과 위악스런 존재이기에, 서로 실망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하면서 우정에 금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망각과 반성할 줄 아는 존재이기에 용서하고 사과하고 다시금 으쌰 하면서 서로 살아간다.
물론 사회라는 것이 나의 전부일 수 없고 사회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나의 관심사만 온전히 챙겨 주는 것은 아닐 터. 모든 사람이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나름 나의 삶의 지혜라고 하며 말하는 것이 ‘위아래 10% 제하고 만나자’이다. 나의 기준으로 양 극단은 나하고 분명 안 맞는 것(그들이 나쁜 뭐가 아니라)이기에 내가 집중할 영업이나 작업의 대상은 그 가운데 있는 80%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전체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되는가? 나아가 올바른 모습의 작동은 무엇인가? 사회는 다양한 처지에 놓인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들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교류하는 장이다. 개인인 나는 타자를 내칠 수 있지만, 전체로서 사회는 어찌됐든 사회 구성원 모두를 보듬어 내야 되기 때문이다.
환대
저자는 인류학자로 사회를 경제학이나 정치학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각자의 앞에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인 ‘현상공간’으로 바라본다. 그 사회에서는 상호작용의 의례가 일어나고, 그 의례에는 언제나 위반과 중단의 가능성이 있으며, 그 경계에서는 인정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핵심은 사회는 ‘사람이 된다’는 것에 끊임없이 논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것이다. 인간(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의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한다. 그 방식이 바로 ‘환대’다. 그 것도 절대적 환대!
환대에 대한 독자의 직관적 이해를 가다듬기 위해 저자는 동서고금의 인문적 지식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나뉘어진다. 1~3장은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임’을 설명하고 있다. 4~5장은 ‘상호작용 질서에서의 형식적 평등과 구조 안에서의 실질적 불평등’이 어떻게 긴장을 가져오는지 설명한다. 6~7장은 절대적 환대와 그 신성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 책을 읽으며 환대가 유토피아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1~5장에서 예를 든 것들이 다 환대에 반하는 것들 이었기 때문이다. 태아, 사형수, 노예, 군인이 환대받지 못하는 존재들이고, 신자유주의에서 자존감을 유지할 만한 경제적 토대를 잃은 이들에게 사회적 관계에서 진정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저자의 고통이 느껴졌을 정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쟁을 예방하고 낙인과 배제, 차별과 억압의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삶에서 상호작용하는 의례에서 환대의 풍토를 만들자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영혼이 있기에 신성한데, 그 영혼은 사회에서 온다고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쳐 출입을 금하는 의례가 있다. 이 의례는 사회가 만들고 행하는 것으로 아이가 이를 통해 사람이 되고 신성해지고 영혼이라는 신성함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가난하고 처지가 딱한 사람들에게 사회가 자리를 마련해주고 불가침의 신성함을 부여해 주는 것. 이 것이 사회가 성립하는 조건이 된다. 우리는 애초에 가난하고 처지가 딱한 존재들 아니었겠는가! 우리는 분명 아이였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처음 시작 날이 있었으니까.
우정과 환대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면 우정의 조건은 절대적 환대가 된다. 환대가 없는 사회에서 선의와 호의는 위선과 위악에 치이고, 반성과 성찰은 분노와 복수로 들 자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환대가 풍토를 이루는 사회에서도 좋게만 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릴 적 나와 어머니를 학대한 아버지를 증오하며 살 수 있고, 부득이하게 전쟁은 나고 살인 사건과 교통사고는 난다. 어찌 세상이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갖는 환대의 직관에는 이런 것이 있다. 환대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고 실천형임을 직감하게 된다. 환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이고, 기왕이면의 태도다. 홍세화선생님의 똘레랑스 자세이고, 깨방권을 나눠주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먼 미래 우리의 후손들이 행복하고 건강한 사회에서 살 수 있게 만드는 원천이자 토대이기도 할 것이다. 환대가 말이다.
책익는 마을 원진호
첫댓글 36주된 태아를 낙태 수술을 한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살인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고 한다. 헌재는 2019년 04월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1년 1월 1일 부터 낙태는 처벌을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낙태를 한다고 태아를 산모의 배에서 꺼냈을 때, 생명활력징후가 있었다면, 그 순간 태아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이고, 이를 죽이면 살인죄가 되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전통에는 백일이나 돌이 지나기 전까지는 태아나 신생아는 사람으로 취급을 안했다 한다. 워낙 신생아 사망율이 높아서 이게 사람이 되겠나 싶어서 일정 기간 지켜보는 것이기도 하겠고, 사회경제적 조건이 낮은 상태에서 태아 생명을 없애는 것이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관습적으로 저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면에서 '환대' 담론은 역사 발전의 결과이고, 인문적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고, 사회가 발전하는 진보의 영역이다. 신자유주의가 확대되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면, 환대 담론은 약화될 것이다. 경계에서 담을 쌓을 것이고(이민과 난민의 문제), 소유에서 불평등(사회경제적 토대가 취약한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진정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이 확대될 것이다. 극우세력이 발호할 것이고, 포퓰리즘이 휭행할 것이다. 저자는 이럴수록 사회적 담론으로 환대의 가치를 고양하여, 이민과 난민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람이기에 사회 경제적으로도 사람답게 처우를 받는 정책과 제도를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 같다. 전 세계가 정치적 경직과 불평등 사회로 나아갈 때, 우리 나라만이라도 사회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환대받는 사회가 되면 그 자체가 엄청난 사회발전 동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