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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4 / 축복된 삶을 위한 당부 (대상28:5-10)
스티브 챈들러가 쓴 ‘성공을 가로막는 13가지 거짓말’이란 책을 보면 사람에게는 13가지의 자기 제한적 사고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둘째. 인맥이 있어야 뭘 하지, 셋째.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겠어, 넷째. 왜 나에겐 걱정거리만 생기지? 다섯째. 이런 것도 못 하다니, 난 안돼, 여섯째. 난 용기가 없어, 일곱째. 사람들이 날 화나게 해, 여덟째. 오랜 습관이라 버리기 어려워, 아홉째.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열째. 맨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이야, 열한째.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열둘째. 난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어, 그리고 마지막 열셋째는 상황이 협조를 안 해줘. 라고 하는 생각과 말들인데, 문제는 이런 것들은 변화와 성장을 어렵게 만드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결국엔 일을 망쳐 버리게 만든다고 합니다.
사람이 뭔가를 할 때면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해야 하는데 그런 걸 일컬어 사명 의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사명은 사람을 용기 있게 만들어 주며 도전정신을 가지게 합니다.
물론 실패할 때도 많겠지만, 사명이 분명한 사람은 반드시 실패를 딛고 일어 섭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명을 의식하는 만큼 강해지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명이라고 하니 대단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겠다고 힘든 일 마다하지 않고 일하는 가장들도 나름의 사명감으로 사는 거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속한 직장이고 일터며, 내 가정이고, 내 삶이기에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하나의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저 그냥 하는 것과 사명감을 갖고 하는 것은 일의 결과도 다를뿐더러 일하는 사람의 정신건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리도 중요한 사명이란 뭘 말하는 걸까요?
지금, 그리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명자에게 있어야 할 삶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자식에게 사명을 일깨워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이 점차 노쇠해져 감에 따라 이제까지 자신이 붙들고 살아온 사명을 아들 솔로몬에게 이양하는 유언과도 같은 말들을 기록하고 있는 게 본문의 내용입니다.
보면,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사명적인 존재로 살기 위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권면 이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한 당부이자 조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라!’고 권면합니다.
이 구절은 통상적으로 ‘네 아비’를 ‘아버지 되시는’이라고 해석하여 죽음을 목전에 둔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제부터는 세상에 없을 나 대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을 가지라는 권면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삶이 육신의 부모로 인한 소위 ‘흙수저’로 살았더라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심으로써 인생을 ‘금수저’로 사는 삶이 되게 하라는 권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인 적용면에서 보자면, 9절 초반부에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하는데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알아야 할 하나님은 아비 되는 다윗의 하나님을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냥 하나님을 알라고 하면 될 것을 ‘아비의 하나님’을 너도 알라고 한 걸까요?
여기서 우린 축복된 살을 위한 첫 번째 당부를 알게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단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나 교회에서 듣고 배운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축복된 살을 위한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통해 ‘나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는 확신을 갖고 믿을 때라야 그 믿음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는 끔찍이도 좋은데 아내만 교회 나가고 자신은 불신인 분에게 아내가 다니는 교회 전도사님이 전도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가는데, 하늘나라에 가서도 아내분과 함께 하시려면 이제 그만 교회 나오시지요.’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걱정 마세요. 나는 매사를 아내와 함께해 왔으니 나중에 아내가 천국 갈 때도 아내의 허리춤을 잡고라도 따라가면 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 아내의 하나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는 남편의 하나님은 아니신 겁니다. 그럴 경우 남편분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네 아내의 하나님을 알라!’
그런 겁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는 이유가.
아내가 믿는 하나님을 남편도 ‘나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하고 믿어야만 축복이든 천국이든 가능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라!’고 했던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다윗은 아들에게 내가 믿어온 나의 하나님이 너에게 해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너는 너만의 ‘나의 하나님’을 알고 믿으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는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축복받는 인생을 살고자 하신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하나님이신가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갖고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잘 아시는 송명희 시인 같은 경우도 그랬습니다. 시인에게는 나만의 하나님이 계셨기에 언제든 그 하나님을 믿었고,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어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던 걸까요?
하나님에 대한 그분의 신앙고백은 그분이 지은 시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에서 그분은 하나님을 신실하신 주님이라 부르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나의 하나님은 실망시키시는 분이 아니시란 걸 믿었기에 실망 되는 순간에도 실망하지 않았고 낙심되는 순간이나 분노하고 슬퍼할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에 가선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여러분도 여러분 각자의 하나님을 알고 믿으려는 시도에서부터 여러분의 믿음이 재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이신가요? 여러분에게서의 ‘나의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제가 설교 때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요한복음 14:1절 말씀을 자주 드린 적이 있는데, 왜 그랬을까요?
저 역시 제가 믿는 ‘나의 하나님’은 ‘근심하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심되거나 잘 안 풀리는 일을 만날 때면 늘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지 말라셨지요? 그러니 결국엔 하나님이 근심하지 않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이게 축복된 삶을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나만의 하나님을 아는 것, 그리고 믿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온전하고 기쁘게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9절 말씀을 계속 보면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온전한 마음은 어떤 거고, 기쁜 뜻은 또 무얼 말하는 걸까요?
그 전에 먼저, 다윗은 왜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라고 하면서 곧바로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을 한 걸까요?
그 답은 이어지는 9절 하반부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감찰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린 진심으로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전적으로 보면 온전하다는 건 ‘본래의 형태에서 변형되지 않은’이라는 뜻이고, 원어적으로는 ‘준비되어 갖춘’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기쁜’이라는 말도 ‘억지로가 아닌’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라는 말은 때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지라도, 가끔은 하나님을 향한 거절감이나 서운한 마음이 들 때라도 ‘마지못해서’나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한결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었어도 믿은 대로 되는 일이 없고 그래서 안 믿자니 달리 해볼 만한 뾰족한 대안도 없고 해서 믿을 수밖에 없기에 ‘믿습니다.’라고 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이는 곧 어떤 경우에서도 ‘한결같은 믿음’이 필요하단 말인데, 그렇다면 애초부터 우리에게 있어야 하고 이후로도 늘 한결같아야 할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 걸까요?
그게 앞서 ‘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믿음을 말하는 겁니다.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기도하는 중에 매년 교회 표어를 정할 때면 기준으로 삼는 것 중의 하나가 이 표어가 우리 교인들에게 일 년간 ‘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올해의 표어를 예로 들자면, ‘주여! 만족하게 하소서.’라고 했을 때, 일 년을 살며 어찌 매번 만족할 수만 있겠습니까? 때론 불만스럽기도 하고 낙심될 때도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서운한 마음과 아쉬움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초심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면 그땐 언제든 나의 하나님은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으로 돌아와서 거기서부터 다시 믿음으로 살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본문에서 다윗이 말했던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권면의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저는 ‘믿을지어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다윗은 ‘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을지어다’와 ‘섬길지어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믿는 건 생각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섬기는 건 행함이 있어야만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은 ‘믿자’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섬기자’라는 행동으로 완성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섬기다’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공경하여 받들어 모시다.’는 뜻이지만 원어를 직역하면 ‘일하다’ ‘시중들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되 자발적인 마음에서 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기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자.’
이게 곧 믿음의 시작점인 동시에 섬김으로 연결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예전에 배웠던 말이 생각나셔야 합니다. 다름 아니라 ‘하나님은 공짜가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만고불변의 진리 가운데 하나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진리는 ‘하나님께 공짜는 없다.’입니다.
둘 사이에 ‘공짜가 없다’는 말이 같아 보여도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도 세상은 나에게서 대가를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나에게 대가를 지불하신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살아오면서 이미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께 공짜는 없다 오히려 대가를 지불해 주신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이미 약속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6:7절을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하든 하나님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믿음을 심으면 믿은 대로, 기도를 심으면 기도한 대로, 순종을 심으면 행한 대로 갚아주시되 무려 삼십 배에서 백배나 있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본문 10절을 보면 다윗은 솔로몬에게 이런 권면을 했던 겁니다. “그런즉 이제 너는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고.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구절에서 성전 건축에만 포인트를 맞춰 교회 건축이라든지 교회 봉사 등만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곤 하지만, 사실 본문에서 중요한 부분은 성전을 건축하라가 아니라, ‘삼갈지어다’와 ‘행할지니라’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하게 하시려고 솔로몬을 택하셨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솔로몬의 사명을 일깨우는 말씀일 뿐 모든 성도에게 성전 건축의 사명이 부여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이 하신 설교 중에 한 대목을 인용할 텐데 성경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를 여러분이 판단해 보세요.
당시 그분이 설교하시기를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신데 그 복을 받지 못해 가난하게 산다면 가난한 것도 죄다.’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분 설교가 맞는 걸까요? 아니면 잘못된 걸까요?
허구한 날 복만 강조하는 분이시다 보니까 가난을 결과로 보고 그리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분의 이런 논리가 잘못된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복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있게 되는 겁니다.
본문의 솔로몬의 경우엔 사명이 성전 건축이었기에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삼가기를 권면했고 행하기를 당부했던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언급했던 삼가다는 말엔 ‘조심스럽게 가려 하거나 하기를 꺼리다.’는 뜻이 있지만 원어적으로는 ‘준비하다’ 또는 ‘무엇 무엇에 관심을 가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로 10절 말씀을 재해석 하자면 솔로몬에겐 솔로몬에게만 주신 사명이 있으니 그 사명을 준비하고, 그 사명 관심을 갖고, 그 사명을 완수해 내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된 ‘가난한 것도 죄다.’라는 말은 뭘까요?
만약에 앞서 목사님의 설교가 맞다면 살면서 실패하는 것도 죄고, 일이 안 풀리는 것도 죄고, 기도 응답을 못 받는 것도 죄고, 심지어 아픈 것도 죄가 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저나 여러분 그리고 모든 성도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가난은? 실패는? 괴롬과 고민은 뭘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이겨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물론 사명이라고 할 때는 자체로 쉬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어려운 일을 믿음으로 해내기만을 기대하시는 것이 사명자를 보시며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이 쉬웠겠습니까?
그러나 그걸 해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대하신 사명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 경험한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내게 절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에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인신매매로 팔려 종살이할 때도 이 믿음으로 버텼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할 때도 이 믿음만 붙잡고 견뎌냈습니다.
그런 요셉의 결국이 어땠습니까?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심으로 모든 이가 절하는 자리에 오르는 응답으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 있는 자에게는 시련이란 없습니다. 연단도 아닙니다. 단지 다양한 형태의 사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미 사명자 된 우린 그 사명들을 감당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믿음으로 힘써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엔 그런 믿음의 사명자들에게 예비하신 응답은 물론이고 세상적인 복까지도 대가로 주시는 분이 바로 여러분 각자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나만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여러분만의 신앙고백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붙잡아서, 현재 여러분이 감당해 내야 할 현실 속에서의 사명들을 잘 감당하고 이겨내서, 결국엔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에서의 복과 응답까지 다 받아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