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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하찮은 것에 관하여 / 박성구
2010.3.9
나는 결코 유식한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그런지 위대한 사람은 더구나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나마 유식한 이들의 현학적인 거대담론에 현혹되고, 자연 그들을 숭모한 적이 있다. 그러다 늦게나마 50대 초반부터 그것들이 자칫 관념의 장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닫고 그 쪽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거두게 되었다. 신문 칼럼 한 편을 읽더라도 난해한 거대담론에는 별로 눈이 가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가 지적 유희를 즐기려고 계획하지 않는 한 별로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50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내 일상에 대한 시적 형상화에 나름대로 몰두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논자들은 내 이런 태도를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것이라고 말들을 하기도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도 거대담론이기는 마찬가지여서 그것을 깊이 있게 파고 든 적도 없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에 입각해서 일상의 '작고 하찮은 것들'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내 삶을 살찌우는 지름길임을 믿고 있을 따름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전문
2002년 말쯤으로 기억이 된다. 안도현 시인이 고맙게도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시집을 한 권 보내와서 받자마자 통독을 했는데 유독 이 시가 내 머릿속에 오래 저장되었다. 그래, 2007년 가을 내가 운영하는 국어.논술학원에 안도현 시인을 초청해서 학부모님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게 한 일이 있는데 그 기회에 학부모님들이 듣는 곳에서 안도현 시인에게 직접 물었다. "안 시인, <너에게 묻는다>의 '너'가 누구지요? 바로 안시인 자신이지요?" 내 이 하찮은 질문에 안도현 시인은 곧장 간단하게 답했다. "선생님, 맞습니다. 선생님이 바로 시인이십니다." 이로 해서 학부모들로부터 안도현 시인이 박수를 받는 게 아니라 내가 박수를 가로채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나란 놈의 태생이 건방지고 염치없는 놈인 것을
나는 안도현 시인의 많은 시들을 좋아하지만 특히 이 시를 좋아한다.
시로서의 형식미나 수사적 기교 때문이 아니라, '그 작고 하찮은 것'에 바탕을 둔 발상 때문이다. 연탄도 아닌 '연탄재'는 그야말로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고 한다. 그리고
질책하는 어조로 화자와 청자에게 단호하게 묻는다.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그래, 우리는 하릴없이 불이 꺼져버린 '연탄재'에서 한없는 뜨거움을 느끼고,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차가운 존재인가를 스스로 묻고 뜨끔해지기까지 한다. 어떤 거대 담론이 우리를 이토록 성찰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본래 차가운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까지 그런 위대한 담론을 접해 본 적이 없다.
버스를 기다려 본 사람은
주변의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기억한다
그런 사람들은 시골 차부의
유리창에 붙어 있는 세월의 빗물에 젖어
누렇게 빛이 바랜 버스 운행 시간표를 안다
때가 꼬질꼬질한 버스 좌석 덮개에다
자기의 호출번호를 적어놓고
애인을 구하고 싶어 하는 소년들의 풋내 나는 마음도 안다
그런 사람은 저물 무렵 주변의 나무들이 밤을 맞기 위해
어떤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는지도
낮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저녁연기가 어떻게 마을을 감싸는지도 안다
그리고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버스는
천천히 오거나 늦는다는 것도 안다
하찮은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안도현, '그 작고 하찮은 것들' 전문
나는 이 시에서 '누렇게 빛이 바랜 버스 운행 시간표', '때가 꼬질꼬질한 버스 좌석 덮개', '애인을 구하고 싶어 하는 소년들의 풋내 나는 마음', 낮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저녁연기' 등, 시인이 말하는 바 '주변의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 혹은 '작고 하찮은 것'들에 주목한다. 안도현 시인도 분명 이것들에 주목하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내 생각건대 대체로 다음 네 부류가 있지 않을까 한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사람, 머리도 차갑고 가슴도 차가운 사람,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차가운 사람, 머리도 뜨겁고 가슴도 뜨거운 사람, 바로 이 네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럼 안도현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이 시에서 보듯이 세밀하게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잊지 않는 것으로 보아 머리가 냉철한 사람일 것이며, 그렇게 단정하는 것이 혹 속단이라면 적어도 '분명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리라. 아니, 적어도 참교육운동을 함께 한 적이 있는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안도현 시인은 '가슴이 따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선풍기는 날개가 있지만 절대 날아가지 않고, 내 옆에만 앉은 듯 서서, 결단코 모서리 만들지 않고 둥글게만 돌아가는, 바람난 아내다. 미풍이면 미풍대로, 강풍이면 강풍대로, 약풍이면 약풍대로, 고정이면 고정대로, 회전이면 회전대로, 연속이면 연속대로, 시간이면 시간대
로 ... 선풍기는 그렇게만 바람난다. 나는 이렇게 바람난 여자를 참 사랑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우리 친구란 놈이, 시도 가끔 쓰는 분필쟁이 친구란 놈이 술 한 병 들고 집에 오더니 덥지도 않은데 덥다며 날 위해 바람난 선풍기를 발로 밟아 지맘대로 끄곤 에어컨 켜잔다. 이건 분명 겁탈이고 능멸이다. 개자식이다. 후레자식이다. 백정이다. 가지고 온 술병 들고 나와, 정읍집에 가서 왕소금에 쐬주나 한 잔 하자했다. 그랬더니 ..?그는 들고온 술병, 깨고 갔다.
사랑하는 친구야, 선풍기 발로 밟아 끄지 마라
차라리 네모진 에어컨을 발로 짓밟아 끄라
사랑하는 친구야, 바람난 아내 버리지 마라
오로지 네 둘레만 지쳐 맴돌다 바람났잖냐
-졸시, '선풍기에 대한 예의' 전문
선풍기'는 에어컨'에 비하면 참 작고 하찮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 선풍기를 '지맘대로' 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합께 살기로 맹세한 사람을 시간이 흐르면 결코 대단한 배려를 받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더구나 '바람난 아내'는 버림의 대상이지 배려의 대상은 전혀 아니다. 내가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사랑과 배려를 아끼지 말자는 것이다.
나는 이 시를 포함해서 66편의 시를 묶어 <선풍기에 대한 예의>(문학사상사, 2007)라는 이름의 시집을 한 권 철없이 강호에 던진 바가 있다. 시집을 내는 과정에서 시집의 뒤표지 글을 하나 안도현 시인에게 부탁했는데 그는 부끄럽게도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보내와서 그대로 실었다.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성난 파도처럼 출렁이고, 귀에 대고 냅다 지르는 고함처럼 독자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모든 속물근성을 질타하면서 속된 것을 폐기하자고 말한다. 번쩍이는 사유의 충돌과 거침없이 자유로운 어조는
김수영에 닿아 있고, 참회의 깊이는 저 윤동주의 근본적인 질문과 뿌리를 함께하고 있다. 종횡무진! 박성구 시인의 이러한 시의 문법이 시단의 나약하고 낡은 상상력을 두드리는 큰 종소리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안도현 시인의 립 서비스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속물근성을 질타'하고 있다는 말에는 상당한 동의를 하는 편이다. 속물근성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보면 '금전이나 영예를 제일로 치는 생각이나 성질'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 금전, 명예, 지위, 권력 등속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흙탕물 세상에서 그 흙탕물을 자진하여 뒤집어쓰는 속물근성의 소산임이 분명하다.
나는 요즘 장자의 '추수'편을 다시 읽고 있다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살겠다:'는 예미도중의 일
화를 오독(汚瀆)아닌 오독( 誤讀)을 거듭하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머리나 좀 식힐 겸 자전거를 타고 들녁을 빙빙 돌면서
알맹이 영글어 고개 숙인 벼 한 포기,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한 그루,빨갛게 익은 고추나무 한 그루, 수탉의 벼슬보다 붉은 맨드라미 한 포기, 그리고 이름 모르는 풀꽃들을 뽑아다가 민들레꽃집의 아가씨에게 맡겨 버려진 황토색 화분 하나 세탁하여 모조리 섞어 심었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도대체 존재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
물렉의 기러기들은 정말로 물렉의 비행기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효도를 다하는 것일까
콤바인에 알맹이를 바치는 벼들은 진정 농부들의 사랑에 고개를 숙인 것일까
버려진 화분에 심어진 그 모든 것들은 내 사랑의 방식에 찬동하고 있을까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살겠다.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칠순의 형님께
가을의 엽서 하나를 못 띄우고 있다
한가위 명절도 멀지 않았는데, 그 명절날
아내는 태양초와 햅쌀과 햇밤을 받아 자동차 트렁크에 실을 것이다
그리고 5만 원쯤 든 무거운 봉투를 형수님께 내밀 것이다
-졸시,'존재에 대한 사랑' 중에서
장자가 복수라는 데서 낚시를 하고 있을 때였다. 초나라 임금이 명의 대신을 보내 "국내의 정치를 맡아 수고해 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로 뒤도 안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 듣자니, 초나라에는 점을 칠 때 쓰는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있었는데 죽은 지 3천 년이 되었다고 하지요. 초나라 임금은 이것을 천에다 싸서 상자에다 넣어 두어 묘당에 보관하고 있다고 들었
소. 그런데 그 거북이가 죽어 뼈를 남기기를 바라겠소, 차라리 진흙 속에서 꼬리를 흔들기를 바라겠소?" 그러자 사신은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기를 바라겠지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장자는 "그럼 돌아가시오. 나는 앞으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소."라고 말했다.
이 시에서 언급한 '예미도중의 일화'는 이런 것이다. 안도현 시인이 어쩌면 주둥아리만 너절한 이 시에 주목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나온 내 인생을 많이 후회한다. 가방 끈만 괜히 긴 것이 그 으뜸이다. 대학도 대학원도 나오지 말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돼지나 키웠을 것을. 그랬더라면 한가위 날 '태양초와 햅쌀과 햇밤' 등속을 얻어오며 '5만 원쯤 든 무거운 봉투'를 손모가지 부끄럽게 내밀지 않아도
됐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이순을 모르는 예순 살 철딱서니 없는 놈이 이제 후회한들 뭐하랴.
다만 그 동안 무심했던 '작고 하찮은 것'에 가급적 눈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내가 '사이버문학광장'에 올린 다음 두 편의 시는 바로 이런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2월은 짧은 달
29일마저 없어 더 짧은 달
북부시장 솜리 장날 하릴없이 틀니 빠져
콩고물인절미 손주 불알 만지듯 만들어
큰손 덥석덥석 인절미 안겨 주는
솜리떡'집 손 씨 할머니, 헉헉
삼일절 '대한독립만세!' 만세 삼창 뒤란에서
샛노란 수선화에 쪼글쪼글 얼굴 부끄리고
손주놈 꽈배기도 어련
반 봉지만 시린 가슴에 꼬옥 안고
보름달에 별빛 성긴 사립문을 열겠네
3월 4일, 그 흥청거리는 북부시장 솜리 장날만
늙은 학만큼 쉰 목소리 진양조로 기다리겠네
-졸시, '하찮은 것에 관한 하찮은 단상' 전문
입으로 쓴 책보다는 머리로 쓴 책이 낫고
머리로 쓴 책보다는 가슴으로 쓴 책이 낫고
가슴으로쓴 책보다는 손으로 쓴 책이 낫고
손으로 쓴 책보다는 발로 쓴 책이 낫고
혼자서 발로 쓴 책보다는 함께 발로 쓴 책이 낫고
책장에 책이 없다
책들을 버린다
수선화 마냥 졸고 있는
경칩 절 아침
아, 늦었다
저녁노을 너무 가깝다
단풍잎 저녁노을 속에
허이연 눈썹 그믐달만 차마 외로운 것을
-졸시, '경칩 절에 책을 버리며' 전문
우리는 사실 거대담론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많다. 가방 끈이 긴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과연 얼마나 값진 보약이 될까? 오히려 거대한 것도 사소한 것으로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전문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은 자연의 섭리이다. 그 자연의 섭리가 '사소한 일' 혹은 '오랫동안 전해 오던 사소함'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시인은 짐짓 자연의 섭리를 사소한 것이라고 확인한다. 떠나간 사랑을 부르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자연의 섭리처럼 당연한 것이고, 그
당연한 것은 사소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시인의 인식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이리함으로써 '괴로운 편지'가 '즐거운 편지'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을 많은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한다. 그 포스트모더니즘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 예술사적 조류는 거대담론보다는 미시담론을, 이성적 가치보다는 감성적 가치를,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을, 정연한 질서보다는 깨뜨려진 파격을 우위에 둔다는 데 그 기본 바탕이 있다. 이것이 고전적 규범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일 수 있지만 문학은 바로 이 '낯설게하기'를 통해 그 참맛을 드러내는 특이한 장르이다.
내 인생의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멀다고만 느껴졌던 저녁노을이 어느덧 내 눈앞에 된서리 맞은 단풍잎처럼 펼쳐지고 있다. 그믐달 같은 실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얼마나 보랴만 그래도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작고 하찮은 것들'이나마 찬찬히 보고 하찮은 내 주검을 미리 염하듯 원고지 몇 칸 알뜰살뜰 채워야겠다. 해가 지고 있다. 참 하찮은 일이다.
III
#** '사이버문학광장'의 회원여러분, 그리고 '시'와 '산문'의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 동안 내가 틈틈이 해오던 작업을 실험도 할 겸 '사이버문학광장'을 미력이나마 활성화시킬 겸 철없는 졸시 몇 편과 산문 몇 편을 올린 바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시인이 너무 많다고 느껴져서 감
히 '시는 죽었다'라는 시를 올린 바도 있습니다. 이것이 혹 결례가 되었다면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리고 서성란 선생님께는 더욱 깊이 사죄합니다. '맞짱' 운운했던 것이 아직도 못내 걸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나는 내 글이 우수작 혹은 최우수작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고 싶은 속물근성은 버린 지가 오래입니다. 앞으로는 '문장'에 시는 쓰지 않겠습니다. 아직 소설가라는 모자를 써 본 적이 없으니 '산문'과 '소설'을 이따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 이것도 '사이버문학광장'을 혼탁하게 만드는 미꾸라지 짓이라면 쾌히 그만두겠습니다. 그 동안 제 글을 읽어 주신 여러분께 가슴 열고 고마움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솔직한 글' 많이 쓰세요. 글을 쓰지 않고는 당신의 영혼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느낄 때 글을 쓰세요. 릴케의 말입니다. 이 말은 한국문학의 비옥한 토양을 위해서도 반드시 되새겨 볼 만한 말입니다. 별것도 아닌 것이 별말을 해서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박성구 시인
1952년 생
출생지 전라북도 김제
학력 전북대학교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문학석사
수상 1992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경력
이일여고 교사
연극협회지부장 역임
작품 시집 선풍기에 대한 예의(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