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 : 사적 제307호)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법왕에
의해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성주사로 개명된 것은 통일신라 말이다. 성인(聖人)이 거(居)하는 절(寺)이라는 뜻
인데, 성인은 신라 말기의 무염국사를 일컫는다. 무염국사가 성주사의 주지로 있을
당시 성주사는 불전 80칸, 수각 7칸, 고사 50여 칸 등 천여 칸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고
한다.
이때 성주사에서 정진하는 수도승만 2,000여명에 달했다고 하며, 이곳에서 백제
시대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역사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사적으로 지정된
성주사지에는 현재 절의 중창자인 낭혜(朗慧)가 입적한 뒤 그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1962년 지정)를 비롯하여,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물, 1963년 지정), 중앙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서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과 동 삼층석탑(보물, 2019년 지정) 성주사지 석등(충남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철불대좌 등의 유물과 건물의 초석 등 많은 석물이 남아 있다.
그간 발굴 조사에 의해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터가 드러났다.
절터 서북쪽에는 제법 멋을 부려 세운 전각이 있는데, 그 안에 부도비가 있다.
무염국사 입적 두해 뒤에 세운 부도비로 신라의 문장가 고운 최치원 선생이 글을
짓고 그의 조카 최인연이 글씨를 썼다. 낭혜는 무염국사의 시호이며, 신라 태종
무열왕의 8대 손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열 세살의 나이에 입문한 낭혜는 21세에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 그곳에서 선종을
익혔다. 귀국하여 성주사의 주지가 되어 신라의 선종을 크게 융성시킨 낭혜는 88세
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진성여왕이 낭혜를 기리기 위해 시호와 함께 부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 부도비는 전해오는 신라의 부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높이 4.5m, 폭1.5m,
두께 42cm로 거의 원형 모습을 잃지않고 있다. 또한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 역시
조각이 화려하고 뚜렷하여 신라 부도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비신(碑身)의 재질은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재질이 강하고 아름다워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는 남포 오석의 비신에는 5천 여자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스테파노는 가만히 두 눈을 감고 천년 가람의 옛 터전인 성주사지의 모습을 회상해
보며 깊어가는 가을빛 단풍길을 따라서 절 터 담장을 산책하면서 문화유산 답사를
마쳤다.
All for the love of a girl... ─┼ * Johnny Horton *
첫댓글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 🙏
좋은 저녁 시간 되십시오. .().
감사합니다 ~~~ 참 좋은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 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날마다 기쁜 날 되소서 .().
나무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복 많이 짓고 복 많이 받는
일상 되소서!!
관세음보살 .().